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한양으로 가는 길목 안양 인덕원(仁德院)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정보통]역사의 숨결-안양 인덕원(仁德院)


인덕원이란 지명으로 유명한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은 예부터 교통 요충지로 인덕원 옛길은 과거 한양에서 한수이남지역을, 영.호남.충청 등 3남 지방에서 한양을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으로 조선시대 6대 대로(大路)의 하나였다.

인덕원(仁德院)이란 마을 지명은 조선시대 때 내시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내시는 비록 거세된 몸이지만 궁중을 출입하고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높은 관직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거주하는 내시들은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해 '인화를 베푸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란 명칭이 생겼고 이후 나라에서 공무나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원(院)을 설치하면서 인덕원이라고 부르게 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광주에서 서쪽 45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천현에서는 현의 서쪽 15리 지점에 인덕원이 소재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후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게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곳의 원은 조선전기에 주로 활용된 뒤 임진왜란을 즈음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시 김지석 문화재전문위원은 '임진왜란 이후 봉수대가 전국 각지에 설치되면서 원의 중요성이 크게 감소했고 이로 인해 전국 1천200여개에 달하던 원이 대부분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과거 인덕원길은 노비신분에서 상인, 선비, 왕에 이르기까지 만민이 이용해야 했던 중요한 교통로였고 특히 왕의 어가행렬이 지나갈 정도로 당시대에는 매우 넓은 길이었다.

인덕원 옛길은 조선조 제 22대 왕인 정조대왕과 깊은 인연이 있다.

정조는 즉위 13년(1789년) 10월 양주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인덕원을 지나갔다.

정조는 이후 다음해 1790년부터 1799년까지 11차례에 걸쳐 능 행차를 했고 이중 6차례를 인덕원 옛길을 이용했다.

5차 능 행차인 1793년 1월에는 인덕원에서 친히 어가에서 내려 인근에 있던 마을노인들을 접견하고 위로했다고 한다.

정조는 그러나 즉위 19년 1795년 안양천에 만안교가 가설되면서 인덕원길로 행차하지 않고 서울-시흥-안양-수원 노선으로 바꾸게 된다.

김 전문위원은 '왕이 인덕원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남태령을 넘어야 했는데 고개를 넘는 과정에서 왕이 탄 어가가 흔들리는 등 문제가 있어 만안교가 가설되면서 비교적 길이 평탄한 시흥노선을 이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남태령이 여우고개라는 명칭이 있어 불길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당시대 인사의 가족 무덤이 있어 기피하게 됐다는 학설도 있다'고 말했다.

인덕원은 교통 요충지였던 만큼 충무공 이순신장군과도 관련이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남쪽으로 내려갈 때 인덕원을 거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왕의 행렬이 지나갈 정도로 넓었고 만인들로부터 각광받던 인덕원 옛길은 그러나 급격한 개발붐을 타고 각종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자취를 찾기 힘들다.

원이 있던 자리에는 대아파크장이란 여관이 자리잡고 있고 옛길은 편의점과 호프집 골목으로 변하는 등 인덕원 전체가 유흥지역으로 돌변했다.

근래 들어 옛길에서 약 60m떨어진 새마을금고 앞 놀이터 모퉁이에 인덕원 옛길 표석이 세워졌다.

표석 앞에는 인덕원 옛길 터 정조대왕 현륭원(顯隆園:부친 사도세자 묘소) 노정지라고 음각돼 있고 뒷면에는 인덕원 옛길의 유래와 정조대왕이 이 길로 능행차를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안양시는 원이 있던 자리 인근에 높이 2.4m, 너비 2.2m크기의 '인덕원지'라는 표석을 세워 과거 원의 명성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2003-05-31 16:11:03


청계공동묘지 옆 신비한 ‘도깨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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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청계공동묘지 옆 신비한 ‘도깨비도로’


청계공동묘지 옆 이상하고 신비한 ‘도깨비도로’

안양에도 실제는 내리막 길인데도 마치 오르막을 오르는 것 처럼 느껴지는 ‘도깨비도로’가 있다.

서울구치소 앞을 지나 성남방향으로 가다가 청계공동묘지와 정신문화연구원 쪽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그 곳(오른쪽 위). 구(舊)도로 내리막길인 이곳 1백여m 구간에서는 자동차의 기어를 중립에 놓고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고 있으면 자동차가 위로 밀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가운데). 또 공을 내려 놓으면 오르막 경사를 따라 굴러 올라가는 것 처럼 보이며(오른쪽 위에서 두번째), 물을 뿌려봐도 이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착시현상에 의한 것으로 그 착시구간이 100미터나 되며, 원인은 이 구간과 평행한 57번 도로쪽의 경사가 상대적으로 더 가파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 차를 세우고 도깨비현상을 여러 차례 테스트 해 보지만 눈을 의심할 정도로 차는 분명히 내리막을 거꾸로 오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신비한 도로, 그에 따라 사고의 위험을 조심해야 한다(오른쪽 위에서 세번째).

북한의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제주도의 도깨비도로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지만, 안양시민들은 힘들게 제주도까지 갈 필요가 없다.

한편 이 곳에서 신비로운 도깨비현상을 체험한 후 청계공동묘지 앞에 가면 맛있기로 소문난 라면집이 있다(오른쪽 맨아래). 이 곳 라면은 공동묘지에서 흘러나온 물로 끓여서 더 맛이 있다나…!

안양시민신문 김우태 기자 kwt@aynews.co.kr

2003-05-31 16:10:07

시민의 휴식처 수리산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시민의 휴식처 수리산


안양과 군포시민의 사랑을 받는 수리산(修理山)

수리산 지형은 청계산(618m), 광교산(582m), 관악산(629m), 백운산(564m)등 광주산맥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산지중의 하나로 군포시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큰 산으로 태을봉(해발 489m)을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슬기봉(해발 451.5m)북쪽으로는 관모봉(해발 426.2m) 북서쪽으로는 수암봉(해발 395m)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계는 수리산 (태을봉 489m, 슬기봉 451.5m)이 군포시 서측에 남북으로 형성되어 안산시, 안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수리산 능선이 동서 로 뻗어 군포시를 양분하고 있으며 수리산은 평지에서 갑자기 솟아 오른듯한 산계를 이루고, 봉우리 및 절벽은 대체로 규암이고 계곡지대에는 풍화에 약한 흑운 모호상 편마암이나 안구상 편마암이 많으며 부분적으로 백운모 및 흑운모 편암이 협재되어 있다.

수리산의 일반현황을 살펴보면 위치는 동경 126°50 126°55′,북위 37°21′ ~ 37°24′으로, 군포시 전체면적(3,639ha)의 약 29%를 차지하고 있는 1,047.5 ha이며, 기후는 전형적인 온대 온순 기후에 해당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14.7mm이며 월평균기온은 12.1℃로, 계곡은 노랑바위 계곡외 2개소 1,390m, 능선은 총 연장 5,490m이다. '97년 10월 수리산 등산자수는 일일평균 2,091명으로 96년 일일평균 등산객 624명에 비하여 3.3배증가 하였으며, 시민 생활수준 향상 및 인구증가로 인하여 산을 찾는 시민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수리산에 임상은 활엽수림 45%, 혼효림29%, 침엽수림 26%로 구성성되어 있으 며, 1ha당 평균 축적은 40㎥이다. 속달동에는 경기도유림 327ha가 있어 각종 수 목에 대한 연구 . 조사를 하고 있다. 또한 도유림은 보존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울창한 산림에 다양한 동 . 식물이 서식 하고 있으며, 도유림 중턱에 "수리사"라는 전통 깊은 절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충주의 서쪽은 경기도의 죽산, 여주와 경계한다. 죽장의 칠장산 畿湖 경계에 우뚝 솟았고 서북으로 뻗쳐 水踰峴에서 크게 끊어져 평지가 된다. 그리고 또다시 일어나 용인의 負兒山이 되고, 또 석성산, 광교산을 일으킨다. 광교산 서북에서 관악이 되고 똑바로 서쪽에서 修李山이 되어 서해로 들어간다] 과하여 수리산이 광주산맥의 한 자락임을 밝히고 아울러 수리산을 또 다른 이름으로 修李山임을 기록하고 있다. 어떤 기록에는 見佛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어느 왕손이 산중에서 기도 중 부처님을 親見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군자 앞 바다와 소래염전 및 인천, 수원의 시가지까지 조망된다. 산 남쪽에는 修現寺라는 작은 절이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 信心을 닦는 聖地의 절이라 하여 修現寺라 했는데, 그 후 산명도 寺名을 취해 「修現山」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일부 풍수연구가들은 아주 먼 옛날 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 서해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수리가 앉을 만큼 남았다 하여 수리산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또 안산지방에는 예로부터 秀岩峯의 옛 이름인 독수리봉(鷲岩)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北崖老人의 《揆園史話》상권 檀君記에 「동방의 여러 산에 馬耳, 摩尼 등의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摩利로 부르고 일찍이 서로 구분하지 않았다. 대개 마이와 마니는 머리 「頭」字의 「머리」에서 나왔다. 지금 廣州에 修理山이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수리산(鷲山)이다」 고하여 「독수리봉」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李世鍾 성결신학대학 교수는 수리산에 대해 <수리산 散稿>라는 시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수리산에는 큰 바위가 별로 없다. 가파른 벼랑도 없고 숲이 울창한 土山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그 약수터에는 남녀노소들이 끊일 사이가 없이 모여들고 산새들은 한가로이 지저귄다. 골골마다 산채와 약초가 무성하고 옛날부터 사찰이 없는 유명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산이다.

안양은 그 수리산 기슭에 터를 닦았고 수리산은 도시화되고 대형화되어 가는 안양에 경이로운 산이 아니라 적당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획일화되고 규격화 되어가는 현대문명 속에서 人間性 回復의 機會를 제공하며 안양을 싸잡고 지키는 자애로운 암탉이다.

수리산, 수리산이란 무슨뜻일까?. 「살다」(生)의 語幹 「살」에서 파생된 언어로 「쌀」등 米의 뜻이 있고 곡식(主食)에 「입쌀」「좁쌀」「수수쌀」「보리쌀」등등 生活生命과 연상된 언어가 되었다.(지금도 경북 方言에서는 「쌀」「살」이라고 한다)生活에 곡식만큼 중요한 필수품이 연료였다. 紫炭中에 중요한 것이 松林이다. 「솔나무의」「솔」은 「솔」에서 語原을 찾아야 한다는 學說이다. 전국 지명이나 산명 가운데 「수리」「설악」「설원」등이 많은데 이들은 모두 「살」에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一說에는 「수리」「수리치」「수리골」「수리재」「수리절」등등의 명칭은 단오 명절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단오 때(초여름)沐浴하고 산채를 뜯던 풍속과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수리란 이름을 가진 지명에는 반드시 냇물 또는 시내가 있고 산채 「수리치」가 풍성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수리산은 이 지방에 紫炭과 산채를 풍성히 공급하던 산이고 여름이면 목욕하고 빨래하던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밤나무가 많아 알밤을 줍던 정든 터전이 있으며 머루와 다래와 개암이 영글어 가던 유명하기를 거부한 안양 정신의 母胎였다.

자료 : 이중환 <택리지>1714, 이긍익 <연려실기술>1934,
본말사주지회 <용주사본말시지>1984, 조선일보 <월간 산>1988.5,
방극인 <수리산>안양문화 3-1984, 안양시 <수리산산림욕장현황>1990,
<수원신문>1990.6.9, <수원신문>1990.6.16, <경기평론뉴스>1990.9.15

□ 위치 : 안양시와 시흥시 장상동과 군포시 산본동 및 화성군 반월면 속다리에 걸쳐있는 산이다.


□ 산행코스
☞ 주 등산로
병목안 주차장 ⇒ 덩굴터미널 숲 ⇒ 만남의 광장 ⇒ 백영약수터 ⇒ 태을봉 ⇒ 수리산
☞ 부 등산로
▷ 안양서여자중학교 ⇒ 독서하는 숲 ⇒ 한마음놀이터 ⇒ 태을봉 ⇒ 수리산
▷ 현충탑 ⇒ 팔각정 ⇒ 한마음 놀이터 ⇒ 태을봉 ⇒ 수리산
▷ 소골안 ⇒ 전망대 ⇒ 태을봉 ⇒ 수리산
▷ 성문여자중학교 ⇒ 덩굴터널숲 ⇒ 봉수정약수터 ⇒ 명상의 숲 ⇒ 시관모봉 ⇒ 태을봉 ⇒ 수리산

□ 교통편
☞ 대중 : 안양시내버스 10, 11-3, 13, 16 (소요시간 : 15분)
☞ 자가용 : 안양역에서 병목안 방향으로 직진하여 병목안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00m가량 올라오시면 병목안 주차장이 있음. (소요시간 : 10분)

□ 기본 소개
면 적 : 1,047.5ha(군포시 임야면적의 55% 차지)
표 고 : 489m 태을봉: 489m, 슬기봉: 451.5m, 관모봉: 426.2m, 수암봉: 395m
식 생 : 식물상 총 120과 311속 474종
균 류 : 1문 1아문 2강 4목 12과 28속 35종
조 류 : 총 5 목 12과 26종
곤충류 : 15목 117과 300종
수리산 대표 상징물 : 은판 나비
수리산 사랑 가족 그림 그리기: 매년 10월
수리산 등산로 수목 식재 : 벚나무 등 3종 1,760본


□ 전설①
안산의 鎭山인 수암봉 즉 鷲岩에서 연유됐다는 내용인데 취암의 독수리 취자 (鷲)는 독수리과(禿鷲科)와 수리매과 (鷲鷹科) 등으로 쓰이는 글자인데 이곳에서는 후자를 택한듯하고 「수리」하면 흰죽지 참수리. 검둥수리. 독수리. 참수리. 흰꼬리수리 따위등 사나운 새의 속칭인데 필자가 이곳을 찾아가기 위하여 안산시 부곡동 방면에서 북쪽의 취암을 바라보며 가다보니 수암봉 정상에 거대한 검둥수리가 남쪽하늘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그 이름과 흡사하여 동행한 일행과 함께 탄식할 정도였으니 옛어른들이 보고 보고 또 보고 지은 이름이 아니겠느냐? (수리봉)이라고 하는 느낌을 떨칠수가 없었다.

또 安山의 이름이 문헌에 보이기는 고려태조 23년(940)에 安山縣이라 했고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文宗 탄생으로 安山郡이라 했으며 1914년 3월 시흥, 안산,과천군이 시흥군에 흡수 될 때까지 974년간 지속되어온 이름이 안산이요 취암 즉 수리바위산이 진산이었던 듯하다. (현재의 시흥시 안산동 소재지인 수암봉아래에 「옛 안산읍성터 및 관아터」가 경기도 기념물 127호로 보존되고 있음)

세종실록 지리지 (1454년간행) : 京畿 南陽郡 都護府 案山郡편을 보면 「高麗開爲安山郡... 本朝因之. 鎭山. 曰鷲岩(在郡東).. 동국여지승람(1481년간행) : 案山郡 山川에 보면 修理山 : 군동쪽 1리되는 곳에 있으며 일명 견불산(見佛山)이라 한다.
鷲 岩 : 수리산에 있다.
大東地志(1864년간행) : 安山郡 山水에 보면 修理山 : 東五 一云太乙山 一云見佛山 頗峻高 有鷲岩峯 方言 謂鷲爲修理 「동5리에 있는 산을 일러서 태을산 또 일러서 견불산이라고 한다. 자못 크고 높은 취암봉(수암봉)이 있는데 독수리 취자를 일컬어 수리(修理)라고 한다.
경기도 지명유래 : 시흥군편 P477에 보면 「秀岩峯 옛 안산군의 진산, 수리산의 연봉으로 본래의 산명은 鷲岩... 등의 문헌 내용으로 봐서 취암 또는 취암봉이 수암봉이 되었지만 취자를 우리말로 「수리」라 하고 수리를 이두(吏讀)식으로 만따서 修理라고 썼을뿐인 것이 대동지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전설②
시흥군지 상권 p124에서 보면 「수리사는 고려중기 瑜伽宗의 고승 관오(1096∼1158)가 주지 한적이 있었던 사찰이기도 하였다...」는 내용으로 봐서 최소한 900년이상 된 사찰임이 확실한데 전술한 설 대로 신라 진흥왕때(539∼575) 창건 했다면 약1450년전 전후가 될 수도 있다. 여하간 오래된 사찰인둣 한데 필자가 방문하여 보니 조그마하고 조용한 사찰에 이성우(李性盂:남자)주지 스님 한 분이 지키고 있을뿐 연혁에 참고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데 실망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찰이 정말로 역사 오래인 사찰일까? 하고 다만 수리사 입구 양편의 도로 가에 서 있는 많은 고목 느티나무만은 지난 일을 말할 수 있으리라! 라고 자위하고 싶다. 한편 역사 오래인 수리사라는 것은 이해가 되나 산 이름이 먼저인지 절이름이 먼저인지는 선 듯 이해 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전설③
택리지(澤里誌) (1756년에 발간된 것으로 추리함) : 경기편에 보면「廣州 서쪽은 修李山이며 安山 동쪽에 있다」는 식으로 이 중환이 지은 택리지의 여러곳에서 오얏리(李)자 수리산 이라는 기술로 일관 되었음을 본다. 修李山이 맞는다면 다른 책에서도 볼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상과 같이 위의 3설을 살펴본바로는 물형(物形)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①의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2003-05-31 15:33:08

보물 제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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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안양에 보물이 있는 사실을 아십니까


안양에 보물이 있는 사실을 아십니까
보물 제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

안양시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며 보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최근 120일간에 걸친 수리복원공사의 완료로 제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공사는 당간지주의 북쪽 지주가 기울어져 이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업으로 총 공사비 3천만원(국비 2천1백만원, 도비 4백50만원, 시비 4백50만원)을 들여 지난 3월 28일 착공해 120일만인 지난 7월 24일 수리 및 복원을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복원공사 중 전체적인 공사는 (주)동안건설에서, 설계와 수리보고서는 세안 삼덕건축이, 발굴조사는 단국대 매장문화재 연구소에서 용역사업을 시행했다.

특히 이번 공사는 효율적이고 충분한 검토를 위해 설계 초기부터 고건축 전문위원회의 자문을 받아 제시된 의견을 현장공사에 반영했으며, 석조불교 미술품인 점을 감안해 불교미술분야 전문위원의 자문을 추가로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문에 지주를 설치하고 당에 깃발을 달아 불심의 위신과 공덕을 기리고, 중생을 계도할 목적으로 세운 당간을 고정하는 지주대를 말한다.

특히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신라 흥덕왕 826년에 채석하여 그 이듬해인 827년에 완성한 것으로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조성연대의 명문이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212-1번지)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번에 안양시에서 발간한 복원 및 수리보고서는 시굴조사에서 부터 복원공사에 이르기 까지의 전과정을 담고 있어 향후 문화재 복원시 자료의 활용은 물론 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한 기록물로서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중초사지(中初寺沚) 삼층석탑(三層石塔)과 함께 남아 있으며 양 지주가 원상대로 85cm의 간격을 두고 동서(東西) 로 대립하여 있습니다. 아무런 조각이 없어 장식적(裝飾的)인 의장(意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상부(上部)에는 약간의 가공(加工)이 있어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습니다.

양 지주의 상부(上部)는 내측면(內側面)의 면위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활 모양(線)을 그리며 위로부터 굴곡없이 깍여졌습니다. 당간(幢竿)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은 양지주 모두상.중.하의 3곳에 간구(杆構)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공(長方孔)을 마련하여 간을 장치하였고 중하부는 관통된 원공(圓孔)에 간을 시설하게 되어있습니다.

기저(基底)에는 장대석(長臺石)의 기반석(基盤石)을 지주사이와 양지주의 외측에 각기 1매씩 깔아서 기대를 삼고 있으며 간대는 지주사이의 장대석 중심부에 원공을 시공하고 그 주변에 원대(圓帶)로 돌려서 마련한 간단한 간대입니다.

이곳을 중초사지(中初寺沚)라고 하는 것은 서쪽 지주의 바깥에 각자(刻字)한 명문(銘文)에 의한 것이며 이 지주는 신라(新羅) 흥덕왕 (興德王) 원년(元年)(826)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이듬해인 흥덕왕2년(827) 2월 30일에 세운 조성년대(造成年代)가 확실한 명문이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입니다.

2003-05-31 15:19:44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8호 만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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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행]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8호 만안교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8호 만안교

소재지 :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260번지
지정년월일 : 1973년 7월 10일

이 다리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朝鮮) 정조(正祖)(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참배하러 갈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朝鮮)후기(後期)의 대표적인 홍예석교 (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 한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駑梁津), 과천(果川), 수원(水原)을 거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과천 남태령고개를 넘는 등 험난한 고개를 넘어가는(그 로변에 대왕과 원한이 있는 김약로(金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 하여)등 노정이 바뀌어 시흥(始興), 수원(水原)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 다리를 축조 한 것이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며 축조공사에는 당시 경기관찰사 (京畿觀察使)를 서유방을 중심으로 온백성의 힘을 모아 축조한 것으로 길이 31.2m, 너비 8m에 7개의 홍예수문과 그위에 화강암판석(花崗岩板石)과 장대석 (長臺石)을 깔아 축조한 것이다.

원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으나 국도(國道)확장으로 1980년 8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만안교 다리밟기가 펼쳐지는 곳이다.

2003-05-31 15:16:12

군포지역의 문화재 찾아나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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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해 보세요

정난종 선생묘 및 신도비외 묘역일원

위치: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번지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15호)
지정일: '89. 6. 1
보호구역: 19.800m3
연고자(소유자): 동래정씨 문익공파 종친파
관리자(명예관리인): 정상봉(Tel : 031 - 480 - 0518)

수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묘역 일원은 경기지방에 현존하고 있는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묘역중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세조때의 명신인 정난종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장자광보(영산~중종대),차자광필(중종대영상),그리고 광필의 4자복겸과 6세주손 진원의 묘 등이 신도비와 혼유석,석등,동자석,문인석과 함께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어, 조선전기의 분묘사 내지 석비,금석문 등 고고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재료가 되고 있다.

정난종(1433~1489)선생의 자는 국형,호는 허백당,본관은 동래이다.
일찌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세조 13년(1467) 황해도 관찰사로서 이 시대의 난을 평정하고 북방의 방비를 견고히 하기 위해 평안북도 온정진 40리 장성을 축성했고, 좌리공신 4등으로 동래군에 봉해졌다.

관작은 우잠찬,이조,공조,호조의 판서등을 역임했고 시호는 익혜이다. 성리학에 밝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초서,예서를 잘쓰고 촉체에도 뛰어나 원각사비,돈화문 현판 등의 필적을 남겼다.

묘역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남곤이 지었고,글씨는 둥지중추부사 강징이 쓴 것이다.한편,차자 정광필(1462~1538)선생의 자는 사훈,호는 수천으로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때 영의정으로 조광조 등을 구하려다. 파직뒤에 퇴계 이황을 비롯한 사람들에게서 크게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문익이며 선생의 신도비 비문은 좌찬성 양곡소 세양이 지었고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이기조 선생의 묘

위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1152-11번지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21호)
지정일: '90. 4. 30
보호구역: 총 3,000m3 중 1,126m3
연고자(소유자): 한산 이씨 종친회
관리자(명예관리인): 이명원(Tel : 042 - 822 - 5751)

이곳은 조선 인조때의 문신인 이기조 선생의 묘로 석물로는 상석,향로석이 각 1기 동자석 망주석,문인석이 각 2기씩 있으며 묘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 신도비 1기가 있고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며 비문은 숙종때 좌의정을 지내고 예학에 밝았던 박세채가 짓고 손자 이명필이 썼으며 1705년(숙종31) 영의정을 지내고 평천군에 봉해진 외손 신완이 전액을 하여 건립하였다.

이기조의 주요 행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 : 자선, 호:호암, 본관:한산, 박동열의 문인
1615년(광해군 7):사마시 합격으로 알성문과 병과 급제
1623년(인조 원년):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에 기용 부응교 병조참의 경상도 관찰사 역임
1636년(인조 14년):병자호란때 안변부사로 청군과 격전을 벌임
1646년(인조 24년):민양빈 강씨의 사사에 반대하여 삼척부사로 좌천
1650년(효종 원년):효종의 북벌계획과 송시열이 지은 장릉지문에 청의 연호를 사용치 않은 일이 외교 문제로 대두되어 당시 영의정 이경석이 모든 책임을 지려 했으나 연대 책임을 주장하여 진주부사가 청에 가서 이를 수습 1653년(효종4년):김육의 대동법 시행에 반대 공조판서로 부임도중 병사

특기사항
이곳의 묘역은 1728년(영조4년)경기 개성 장단에서 이장하였으며 묘역의 형태는 조선 중기의 양식임



전주 이씨 안양군묘

위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 27번지
종 별 : 경기도 기념물 (제 122호)
지정일: '90. 4. 30
보호구역: 4,480m3
연고자(소유자): 안양군파 종친회
관리자(명예관리인): 장명기(Tel : 031-456 - 5932)

이곳은 성종의 삼남 안양군 이항의 묘다.
묘역의 규모는 약 300여평으로 연지,사당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석물로는 상석,향로석,묘표 장명등이 각 1기 동자석,석수,망주석,문인석이 각 2기씩이 있다.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비문은 통정대부 거창 신중묵이 지은것을 1976년 이형이 쓰고,김충현이 전액을 하여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전주 이씨 안양군묘의 주요행장은 다음과 같다.
자 : 성의, 호:만송, 본관:전주
1480년(성종11년) 출생
1500년(연산군10년):갑자사화때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폐출케 했다는 이유로 어머니 귀인 정씨 봉안군과 함께 사사됨
1506년(중종 원년):복작

특기사항
이곳의 묘역은 1901년(광무5년) 경기 양주에서 이장 하였으며 묘역의 형태는 조선 중기의 양식임



조선백자 도요지

위치: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1057 - 4번지
종 별 : 사적 342호
지정일: '91. 1. 9
보호구역: 2,348.2m3
연고자(소유자): 국가
관리자(명예관리인): 군포시청 문화체육과

조선백자 도요지는 조선 전기(15세기말 ~ 16세기 전반) 지방백자 요지로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백자제조를 위한 기마터이다.

도요지는 2개의 작업장으로 이루어졌으며,처음에는 산구릉의 자연경사를 따라 구릉 중턱에서부터 산위쪽으로 사용하다가 이를 폐기하고 자리를 옮겨 앞가마와 거의 직교되게끔 서남쪽의 구릉 아래에서부터 구릉 위쪽으로 축조 운용한 것이 특징이다.

가마터는 지표면을 30 ~ 40 cm 파서 반지하식의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모래를 깔고 진흙으로 개떡을 만들어 질서 정연하게 계단식으로 놓아 수평을 잡았으며 양벽을 쌓아올려 이룩한 터널형 칸가마로 이루어졌다.

특기사항
조선 전기의 도요지 연구 및 백자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



김만기 선생 묘역

위치: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번지
종 별 : 경기도 기념물(제131호)
지정일: '92. 6. 8
시설명 : 묘역신도비
보호구역: 29.058m3
연고자(소유자): 광산 김씨 광성부원군 종친회
관리자(명예관리인): 허행길(Tel : 031 - 480 - 1732)

김만기(1633 ~ 1687)선생은 조선숙종의 장인이자 문신으로 자는 영숙,호는 서석,본관은 광산이다. 생원 익겸의 아들,참판 반의 손자이자 구운몽을 지은 서포 만중은 그의 아우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효종 3년(1652)사마시에 합격하고,이듬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수찬,정언교리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한 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서인으로 윤선도 등을 공격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사헌부 집의,성균관 사성,사간원 사간,승정원 좌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헌종12년(1671)딸이 세자빈이 되었고,이후 병조판서,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한 후 국구로서 영돈영부사에 올랐고,광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공을 세워 보사공신으로 1등에 책록되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이다.

저서로서는 [서석집]을 남겼다. 묘역 중앙에는 대형문묘가 8개의 호석에 둘러쌓여 있고, 그앞 좌측에는 묘표가 우측에는 숙종 어필의 묘표가 있으며 그 앞 좌측에는 8각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위치해 있다.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묘표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것이고 숙종 어필의 묘표는 숙종 25년(1699)에 세운 것이다.신도비는 묘표와 마찬가지로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규가 글씨를 쓴 것으로 4각의 기단위에 비신을 그 위에다 첨석을 얹었다.

2003-05-31 15:14:39

안향의 신위를 모신 의왕 월암동의 안자묘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안향의 신위를 모신 의왕 월암동의 안자묘


안향의 신위를 모신 의왕 월암동의 안자묘

의왕시 월암동에 있는 안자묘는 안향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던 것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으로 옮겼다가 197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묘당의 전체면적은 약 1,500여평으로 입구에 안자묘 란 비석이 있고 소슬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팔각지붕에 내부 전체를 붉은 단청을 한 3칸의 한옥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묘당의 가운데 처마밑에는「안자묘」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공자의 후손인 공덕성이 쓴것이라고 전한다.

안향은 고려시대의 명신·학자로 호는 회헌, 시호는 문성공으로 흥주사람이다. 충렬왕 12년(1286)에 정동행성의 좌우사랑중과 고려유학 시거가 되었으며 이해에 왕을 따라 원의 연경에 갔다가 처음으로 <주자전서>를 보고 손수 책을 베껴썼으며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 하였다.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장학기금으로 6품이상은 각각 은 1돈씩, 7품이하는 포를 내게하여 이를 양현고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서 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박사 김문정 등을 중국에 보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의 조상을 그리고 제기·악기·경서 등을 구해오게 하는등 고려말기 유학진흥에 큰 공을 남겼다.

우리나라에 맨 처음 주자학을 받아들인 최초의 주자학도로 보고있으며, 죽은지 12년째되는 충숙왕 5년(1318)에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왕이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다. 안자묘에서는 종친회 주관으로 음력 9월 12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전국에서 약 500 ∼ 600명이 참석한다고 한다. 시에서는 비지정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 위 치: 의왕시 월암동425
* 연락처: 안재찬(T.461-6306)

교통편 1호선 부곡역에서 도보로 15분(부곡중학교 옆)

2003-05-31 15:13:15

정조가 쉬어가던 의왕 고천동의 사근행궁터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정조가 쉬어가던 의왕 고천동의 사근행궁터


의왕 고천동의 사근 행궁터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고천동사무소내에 자리잡고 있는 사근행궁터는 조선조 효도대왕으로 일컬어질 만큼 효성이 지극했던 22대 정조가 부왕(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일시 쉬어가던 곳이다.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이곳에서 쉬어간 일이 있었는데 효심이 지극한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서 부왕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의 화성으로 이장하던 1789년 10월 6일 상여가 이곳에 이르자 마중한 이곳 노인들에게 경기감사로 하여금 쌀을 나누어 주게하고 행궁을 지으니 이름을 사근행궁(肆覲行宮)이라 하였다.

정조는 그 후에도 수차에 걸쳐 이곳에 들렀는데 특히 1795년 2월 10일과 15일에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함께 들러 수라(식사)를 들기도 했다. 효행을 몸소 실천한 정조의 거룩한 효행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백운회에서 기념비를 세웠으며 시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10월 6일을 시민의 날로 제정하였다.

교통편
4호선 인덕원역에서 고천방향 버스를 타고 고천에서 내려 도보로 5분거리

2003-05-31 15:12:34

의왕 천주교공원묘지의 정인섭 노래비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의왕 천주교공원묘지의 정인섭 노래비


의왕 천주교공원묘지의 정인섭 노래비

의왕시 학의동 천주교 공원묘지 위쪽에 있는 정인섭 노래비는 1983년 11월 20일 색동회 에서 세운것으로 묘비 앞면에는 「눈솔 동래 정공요셉 인섭박사의 묘」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의 유명한 작품인 「산들바람」이 새겨져 있다.

시인이며 학자인 눈솔 정인섭은 1932년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1956년 펜클럽 한국본부위원장을 지냈고 1958년 중앙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색동회 회장등을 지냈으며 국민훈장모란장과 팬클럽번역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문단논고, 세계문학산고, 종합변증법세계문학론, 국어음성학연구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산넘고 물건너>, <별같이 구름같이>가 있고 수필집에는 <버릴수 없는 꽃다발>, <생각은 파도처럼>, <일요방담>등 다수가 있다.

* 위 치: 의왕시 청계동 산11 천주교 공원묘지내(묘지 위쪽 마리아상 아래쪽 소나무 밑에 위치)
* 연락처: 학의동 27-2/ 박상복(T.58-3452)

교통편
4호선 인덕원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백운호수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30분거리

2003-05-31 15:11:36

의왕 포일동 이희승박사 생가

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볼기행]의왕 포일동 이희승박사 생가


의왕 포일동 이희승박사 생가

일석 이희승 박사는 1896년 출생하였으며 의왕시 포일동 78-13 양지편마을에 생가가 있다. 이희승 박사의 본관은 전의이다.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였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장 으로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서울시 교육 위원회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에는 건국 공로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1988년에는 한국어문교육연구소장, 학술원원로회장, 사단법인현정회 이사장,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주요학술저서로는 역대 조선문학정화, 국어학논고,국문학연구초, 국어학개설이 있고, 시집으로는 박꽃, 심장의 파편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벙어리 냉가슴, 딸깍발이 등 다수가 있다.

또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요약자서전이 있다. 1948년에 역대국문학전집, 1981년에 국어대사전을 편저했다. 이희승 박사는 1989년 작고하였다.



* 위 치: 의왕시 포일동 78-13(청계동 7통, 양지편마을)
* 현거주자: 윤영섭(T.425-8809)
* 연락처: 이교진(T.425-3947,이희승선생 5촌당질)

교통편
4호선 인덕원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청계동사무소에서 하차,
도보로 15분거리

2003-05-31 15:0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