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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진]1987년 6월의 안양은 민주화운동 열기로 뜨거웠다

안양똑딱이 2020. 6. 9. 19:16

 

6월 항쟁(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이와관련 안양군포의왕지역 현장에서는 민주화 열기가 보다 일찍  솟구쳤다. 이에 지난 200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 안양군포의왕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안양권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시점을 1987년 보다 2년 앞인 1985년 중반 이후로 정의했다. 사진은 1987년 6웧 어느날 안양 일번가(우측) 입구와  중앙시장 1문(좌축) 앞에서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1987년 6월의 안양은 뜨거웠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체제를 타도를 위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던 시기로 1980년 초반 안양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의 JOC(가톨릭노동청년회) 교육과 노동상담 및 교육, 공간대여를 통한 일부 합법적 공간이 마련되었으며, 1984년 말∼1985년 이후 사업장 중심 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단위 사업장에서 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1985년부터 노동상담소와 민중교회(한무리·돌샘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사업장에서 적발돼 해고당하기 시작한 활동가들은 대부분 보안유지를 위해 써클 형태로 또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운동에 나섰다.

 

안양지역에서의 87년 6월 항쟁

안양에서는 6월 항쟁 기간중 6월 19일, 6월 23일, 6월 26일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6월 19일과 6월 26일 집회는 안양권역의 노동운동 그룹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개최된 집회였고, 6월 23일 시위는 경기대와 한신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6월 항쟁 당시 초기 안양에서는 이렇다 할 집회와 시위가 없어 경찰 병력이 전부 서울로 차출되던 상황이었는데, 이는 집회 성공의 주요 요인이다. 시민의 호응이 좋아 집회는 활기가 있었는데 안양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달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분위기가 주도해 갔었다.

안양에서의 첫 대중 집회인 6월 19일 집회에 대해 시사월간지 <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시 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 집회가 시작됐다. … 약 2시간 가까이 집회가 계속된 후 시위 초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마침내 전경대에 달려들어 투구와 방패를 빼앗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 1987년 8월호

6월 23일 집회는 조직적이었다. 안양 중앙시장을 돌면서 동참자를 모으고 시위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중앙로에서 한신대 경기대 학생 2백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집회는 약 3시간가량 계속됐으며, 밤 10시경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됐다.

6월 26일 집회는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6·26 민주헌법 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 맞물려 무려 2만 명의 시민들이 안양 1번가에서 우체국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고, 만안구청을 지나 (구)안양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면서 모든 차량이 끊긴 일종의 '해방의 거리'로 만들었다.

26일 오후 안양CGV앞(당시 안양 삼원극장) 사거리에 하나 둘 자연스럽게 모여들기 시작한 2만여 시민들은 서안양우체국(안양우체국) 사거리를 지나 만안구청(안양시청)과 성결대앞 사거리(안양경찰서) 까지 행진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당시 전국적인 집회가 열리면서 안양 경찰 병력이 서울과 수원으로 출동하면서 안양에는 최소한의 경찰 병력만 남은 상태였다. 밤 9시경 현 삼원극장 앞 중앙로에 소수의 시위대가 들어서자 인도에 있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환영하며 집회가 본격화되기 시작됐다.

이날 시위에는 노동자, 학생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무등 태운 일반시민까지 시위에 참여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거리 시위로 확대되며 민정당 지구당사 화염병투척과 안양경찰서 담벼락을 무너트리고 경찰관사가 전소됐다.

밤 10시 30분경 시민들이 전투경찰을 무장해제시키자며 전경대열에 돌격을 감행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으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놀란 전경들은 도망을 쳤고, 성난 시위군중들은 "민정당사로 가자"고 외치면서 행진으로 바뀌었다.

투석과 화염병 세례에 안양시 안양4동 중앙로 옆에 자리했던 민정당 안양지구당사가 불타고 맞은편의 경찰 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미국계 은행인 한미은행에 돌이 날아갔으며, "시청으로 가자"는 함성과 함께 거대한 인파는 서안양우체국을 거쳐 안양8동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삽시간에 안양시청(현 만안구청)을 에워쌌다. 당시 시청 마당에는 공무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상태로 시위대 일부가 철문을 흔들고 돌멩이도 던졌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이 "여기는 시청이다. 안양경찰서 가자"는 외침과 함께 방향을 돌렸다.

안양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노동부 안양출장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져 불태워졌으며 밤 11시 20분경 시위대는 안양경찰서에 육박하면서 경찰과의 본격적인 대치와 충돌이 발생하면서 다수 부상자도 속출했다. 그러나 경찰서 벽돌담을 넘어뜨리고 경찰서 관내에 있던 관사가 불탔다.

당시 시간은 새벽 2시경으로 안양경찰서가 함락될 상황에 다급해진 경찰은 각지에서 지원병력을 급파하고 나섰다. 밤늦은 시각 수원에서 투입된 경찰병력은 시위대를 해산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았고 3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경찰의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시위대는 안양세무서 뒷길과 만안로를 우회하여 다시 안양역으로 재차 집결했다. 100여명의 시위대는 새벽 2시30분경 안양역 옆에 있는 역전파출소를 불태웠다. 당시 불길이 옆 상가로 번지려 하자 시위대는 소화기를 찾아 진화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26일 시위대의 공격에 불탄 곳은 파출소뿐만이 아니다. 안양 민주정의당 당사와 노동부 안양 출장소도 불길에 휩싸였다. 노동부 안양출장소가 불에 탄 원인은 그동안 출장소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회사 측 편들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새벽 2시를 넘기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귀가했으나 중앙로 도로변에 머물던 200∼300명의 시민은 중앙시장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새벽 4시까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 대투쟁과 다양한 공개 사회운동 확산

안양권에서의 87년 6월 항쟁은 곧바로 사업장에서의 노조설립과 근무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7·8·9 노동자대투쟁과 연계되어 한 묶음으로 진행되고, 다양한 문화운동을 꽃피우면서 안양지역의 사회운동이 만개하는 시기가 열리는 촉진제였다.

87년 7월 27일 한국제지를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분출되기 시작한 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은 만도기계, 태광산업, 삼덕제지, 대우중공업, 경원제지, 유신중전기, 금성전선, (주)농심, 안양전자, 다우전자 등 안양권역 거의 모든 사업장으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근로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흩어지면 노예되고 뭉치면 인간된다", "8시간 노동으로 생계비 보장받자" 등의 공통된 플래카드가 각 사업장마다 내걸리고 난생처음 해보는 파업은 훌륭한 민주주의의 학교로 자주적 인간으로 당당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이 노조설립 등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현장활동가들은 안양지역노동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출범하였고 안양노동자회가 결성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민민운동) 단체들이 조직, 결성되고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1987년 하반기부터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 등의 문화단체가 창립되어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면서 1988년에는 이들이 연대체로 결성하여 안양문화운동연합으로 발전하면서 안양권에서의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꽃피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교회권도 경서EYC 경서목정평을 중심의 활동이 대통령선거 시기에 민주쟁취 경서지역 기독교공대위를 통해 공정선거감시운동으로 발전하고, 박달교회, 살림교회, 우리교회 등 민중교회가 창립되면서 1988년에는 '안양지역민중교회협의회'라는 연대기구체로 발전하였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속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의 함성은 군사독재로부터 '6.29선언'이라는 항복문서를 받아내고 민주주의 꽃은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차원이 아닌 '사람의 세상'을 원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광장이, 모든 길이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꽃을 활짝 피우고 함께 민중이 함께 모일 때 '불가능'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싹틔튀운 계기를 만들어 준 세상을 바꾼 함성의 주인공, 그들은 바로 시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