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히는 의거로 민간 항일 운동의 포문을 연 안양 출신 원태우 지사가 생전에 살았던 집터에 표지판이 설치됐다.
안내판이 설치된 장소는 현 안양 일번가 한복판에 자리한 농협 안양일번가지점(안양시 만안구 만안로 217) 건물앞으로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독립의 밑거름인 항일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지난 2018년 연말에 설치한 것이다.
안양사람 원태우 지사는 누구인가?
원태우(元泰祐)/ 1882년(고종19년) 출생 - 1950년 사망
항일애국지사. 본관은 원주(原州). 원태성과 이호순 사이에서 2남으로 1882년 3월 4일 안양시 만안구 안양 1동 642(당시 행정지번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 현 농협중앙회 안양시지부 부근)에서 태어났다.
문헌에 따라 원태근, 김시근, .김태근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원태우로 되어 있다. 그의 형이 원영우인 것으로 보아 「우(祐)」가 항열로 보여진다. 그는 본래 농촌 출신으로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에 의기가 높고 바른 일에 앞장을 서는 정신과 기백이 있었다.
그가 23세 되던 해(1905)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맺기 위하여 광무8년(1904) 노일전쟁의 승리로 이끈 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 우월한 지위와 권익을 얻게 되자 침략의 첫 사업으로 먼저 외교권을 박탈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광무9년(1905) 10월에는 포츠머스 회담의 일본측 대표인 고무라를 비롯하여, 주한공사 하야시, 총리대신 가찌라등이 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동년 11월 9일에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 히로부미를 황제위문의 특파대사라는 구실로 한국에 파견, 한일협상안을 정부에 제출토록하고,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그 다음날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일본 천황의 친서를 봉정(奉呈)하고, 15일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보였는데, 그것이 중대한 내용이어서 조정의 반대가 심하였다. 16일에는 정동에 있는 손택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여덟대신을 위협하여 헙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우리 정부의 전각료를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 일 협약의 승인을 괴했으나 오후 3시까지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그 길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기로 하였다. 이날 궁성의 주위 및 시내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고 다른 부대는 쉴사이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궁중에는 거리낌없이 드나들면서 시위하였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정부대신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한편 어전회의는 고종황제가 병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채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모지 못하자 일본공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 히로부미는 즉시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협약에 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병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반대하였을 따름이고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다.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역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위협적으로 조인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이 탈취당하였다는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동 조약체결 다음 날인 11월 18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들은 통곡과 격분속에서 한때나마 방향감각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 종로상인들은 철시한 채 통곡하는가 하면, 각급 학교는 폐문하고 스승과 제자가 손을 맞잡고 개탄과 비분에 빠졌다. 3일 후에는 사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선생이 자신이 사장겸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480여 자(字)의 논설을 실어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해서 풀어준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2천만 한국민을 항쟁의 대열로 끌어들이기에 족할 만큼 격동적이었다.
5일 후인 11월 22일에는 조약체결의 장본인이자 우리민족의 불공대천지원수인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의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이날 오전 9시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하차,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 등 경치를 구경하고 수원에서 안양까지 사냥을 하며 안양에 도착,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행 열차를 탔다.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지방을 구경한다는 소식을 접한 청년 원태우는 동료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안양 서리재고개(현재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 안양육교) 아래 철로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이만려가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원태우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졌다. 이때 유리창이 박살나며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군데에 박혔다.
여기서 잠깐. 그럼 원태우는 어떻게 달리는 기차 그것도 열차안에 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정확하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으며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더욱 천천히 지나가야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로 서행을 하지 않을수 없었던 곳이다. 또 고개를 깍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아시 장사라 불리우던 원 지사의 돌팔매질 실력과 천운을 더해서.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2일 후인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해서였고, 일본에서는 사건 발생 다음날부터 신문에 보도되었다.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한매일신문> 11월23일자에는 원태근이란 이름으로 안양시장 「22통1호」라는 주소와 함께 보도했고, 도쿄에서 발행하는 <동경매일신문> 11월29일자에는 「이토 히로부미 조난전말」의 기사로 사건상황을 설명했으며, 일본 박물관 발행의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와 함께 보도했다.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것으로 명기된 이 그림은, 갓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이토에 대한 피격 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증시가 한때 일시 폭락하고 일본의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열도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사건 발생 이틀후에는 국내에도 알려지자 고종은 사좌서신을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면하고 경기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사건 직후 원태우는 자리를 피하였으나 사이토 일본 헌병대장이 수명의 헌병과 경찰들을 이끌고 현장에 내려와 안양역의 철도노무자 였던 다니노와 야마사키의 도움으로 원테우를 포함한 4명을 체포하였다. 그중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태우는 철도방해죄로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영등포감옥에 석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민중 봉기 등으로 확대될까 하여 자신을 공격한 원태우의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했기에 처벌의 수위가 아주 약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태우는 왜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에 흉칙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더욱이 생계를 꾸렸으나 여의치 못해 원 의사 형(영우)의 삼남인 계복(1910-?)씨가 원태우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타계해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709∼16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뤘는데, 그후 1982년 이곳에 화영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화장되었다고 전해지나 그 처리 과정은 기록으로 명확하게 남아 있지않다.
원태우 지사의 유품으로는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고, 또 한 개와 맷돌 1개는 원 지사 양자가 소장하고 있다가 안양시에 기증되어 안양시청 민원실 1층 홀에 전시되어 있다가 2018년에 안양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정부는 원태우 지사 의거 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1990년 8월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92년 11월 22일에는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형물,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의거지 자리(관악역에서 서울 방향 300미터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 버스정류장)에는 안양시에 세운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가 2018년 11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에 의해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조형물이 새로 설치됐다. 또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원 지사가 태어나 자랐던 안양1동(현 농협 안양역지점)에도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원태우 집터 표지석을 신규 설치했다.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맞선 최초의 공개적 저항 활동으로 역사적으로 대단히 값지고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과거 시흥군 당시에도 안양1동에서 태어난 안양이 낳은 인물임에도 안양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원태우 지사의 조형물을 보면 의거 당시 20대 청년을 5-60대 장년으로 잘못 그린 일본인 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인용해 표현하고 있어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건 당시 원태우는 24살의 청년으로 농부이자 석공이었다.
그러나 자유공원의 동상, 안양역 계단 벽면의 부조에 이어 의거지에 새로 설치한 조형물 의 흉상과 얼굴 이미지를 보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선비 모습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5-60대의 장년의 얼굴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건 이후 일본에서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의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작가: 기무라 고타로/일본인)에 그려진 한복 도포에 갓을 쓴 선비 모습과 이를 밑그림 삼아 그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으나 원태우 지사의 사진이 찾지 못했다는 이유와 무관심 등으로 지금까지 일본인 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조선 말 특권 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의 젊은이가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는 항일항쟁 증거 중 하나이기에 때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면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하루속히 신분을 정확히 묘사하고 조형물 이미지도 수정할 필요성이 크다.
또 안양시, 인터넷 자료 등에 쓰여진 표기는 물론 관내 설치된 기념 표지석을 보면 의사(義士), 지사(志士)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어 혼란을 주고 있기에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국가보훈처에서는 일제강점기 열사(烈士) ・ 의사(義士) ・ 지사(志士)를 구분하지 않고 ‘독립유공자’로 통칭하지만 민간 학계에서는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성패에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적인 행동으로 항거하며 죽은 사람에게, 지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품은 사람이란 뜻으로 대부분 광복 후에 돌아가신 분에게 호칭되고 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속음청사》,《대한계년사》,《독립운동사》,《안양문헌》,《시흥군지》,《경기인물지》,《일로전쟁화보》,《대한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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