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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원태우지사 의거지에 새 조형물 세워졌다. "그러나!"

안양똑딱이 2019. 3. 4. 18:34

 

2019.03.01/ #원태우 #안양 #석수동 #안양육교 #항일운동 #애국지사 #짱돌 #돌팔매질 #의거지/
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히는 의거로 민간 항일 운동의 포문을 연 안양 출신 원태우 지사가 짱돌을 던진 이른바 돌팔매질을 한 의거지에 새 조형물이 설치됐다.( 안양시의회 최병일 의원이 확인한 결과 이 조형물은 석수2동에서 주민참여예산으로 세웠다고 함) 
하지만 그동안 안양시 관내 원태우 지사의 조형물을 보면 의거 당시 20대 청년을 5-60대 장년으로 잘못 그린 일본인 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인용해 표현하고 있어 일본인의 관점에서 평가한 내용을 인정한 형국을 범하고 있다.
사건 당시 원태우는 23살의 청년으로 농부이자 석공이었다.
그러나 자유공원의 동상, 안양역 계단 벽면의 부조에 이어 의거지에 새로 설치한 조형물의 흉상과 얼굴 이미지를 보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선비 모습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5-60대의 장년의 얼굴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대부분 일본박물관이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 실려 있는 그림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청년 원태우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팔매질을 한 사건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 언론에 보도된 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 그린 기록화로 갓을 쓰고 칼을 차고 흰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뒷 모습을 담고 있는데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과 함께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더욱이 당시 23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 원태우를 노인으로, 농부이자 석공인 민초를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칼을 찬 양반의 모습으로 엉뚱하게 표현했음에도 안양 관내에 세워진 조형물이나 기록에 역사적 오류를 남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안양시가 지난 2018년 후반기 안양시 석수동 원태우 지사 돌팔매질 현장에 새롭게 세운 조형물에는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일본박물관이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 실려 있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의 그림을 그대로 복제하여 부착함으로 일본인의 관점에서 평가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는 나아가 원태우 지사에 대한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그동안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원태우 지사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와 역사적 진실의 무관심 등으로 지금까지 잘못 그린 일본인 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조선 말 특권 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의 젊은이가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는 항일항쟁 증거 중 하나이기에 때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면밀한 고증과 연구를 통해 하루속히 신분을 정확히 묘사하고 조형물 이미지도 수정할 필요성이 크다.

원태우지사 조형물로는 1992년 11월 22일에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원태우지사 얼굴의 부조상,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의거지 자리(관악역에서 서울 방향 300미터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 버스정류장)에는 안양시가 설치한 자그마한 돌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가 2018년 후반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에 의해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표지판, 안양시 석수2동 주민자치원회에서 새 조형물을 각가 설치했다. 또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원 지사가 태어나 자랐던 안양1동(안양1동 현 농협 안양역지점)에도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원태우 집터 표지석을 신규 설치했다.

한편 안양시, 인터넷 자료 등에 쓰여진 표기는 물론 관내 설치된 기념 표지석을 보면 의사(義士), 지사(志士)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어 혼란을 주고 있기에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국가보훈처에서는 일제강점기 열사(烈士) ・ 의사(義士) ・ 지사(志士)를 구분하지 않고 ‘독립유공자’로 통칭하지만 민간 학계에서는 의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성패에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적인 행동으로 항거하며 죽은 사람에게, 지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품은 사람이란 뜻으로 대부분 광복 후에 돌아가신 분에게 호칭되고 있다.


[중부일보]24세 청년 원태우 던진 돌, '민중의 함성'으로 돌아오다
신창희
최종수정 2018.10.29 20:52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7852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에 의해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유적' 조형물이 새로 설치됐다. 하지만 이 조형물은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 그린 기록화로 일본박물관이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 실려 있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의 그림이다. 갓을 쓰고 칼을 차고 흰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뒷 모습을 담고 있는데 당시 24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 원태우를 노인으로, 농부이자 석공인 민초를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칼을 찬 양반의 모습으로 엉뚱하게 표현 한 것임에도 이후 안양 관내에 세워진 조형물이나 기록에 역사적 오류를 남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조형물에는 제작년도와 작가명을 표기해야 하는데 그 마져 없다.


 

 

윤승운화백 작/ 만화로 보는 <원태우 지사> 의거 http://blog.daum.net/21c-bom/5428835?srchid=BR1http://blog.daum.net/21c-bom/5428835 어린이 역사 만화 『맹꽁이서당 10권(웅진닷컴출판사)』132~133쪽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원태우지사 얼굴의 부조상. 당시 24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 원태우를 노인으로, 농부이자 석공인 민초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양반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1905년 거사 직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 그린 기록화로 일본박물관이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 실려 있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의 그림을 인용한 것이다. 조형물에는 제작년도와 작가명을 표기해야 하는데 그 마져 없다.

 

 

 

 

 

 

1992년 11월 22일에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운 원태우 지사 조형물. 조형물에는 작가명을 표기해야 하는데 없다. 확인한 결과 이재옥 작가(전 안양미협지부장. 현 안양예총 회장)가 제작했다 한다.

 

 

 

평촌 자유공원에 설치된 원테우지사 조형물. 당시 24살의 혈기 왕성한 청년 원태우를 노인으로, 농부이자 석공인 민초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양반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1905년 거사 직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한국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 그린 기록화로 일본박물관이 발행한 《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 실려 있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의 그림을 인용한 것이다. 조형물에는 제작년도와 작가명을 표기해야 하는데 그 마져 없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독립의 밑거름인 항일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도내 64개소에 항일유적 안내판 및 바닥 표지판 설치에 나선 가운데 안양에는 2018년 11월 원태우지사 집터(안양1동 농협 안양역점)에는 표지석, 의거지에는 조형물과 표지석을 각각 설치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원태우 지사 관련 조사 자료]

 

이토 특파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한국인의 항거 장면

By 민족문제연구소 - https://www.minjok.or.kr/archives/102767
2019년 2월 22일
 

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4명의 범인이 포박되어 그 중에 2명이 자백했다는 급보가 날아들게 된다.
일본 박문사에서 펴낸 <일로전쟁 사진화보(日露戰爭 寫眞畫報)> 제39권 (1905년 12월 8일 발행)에는 이날의 상황을 묘사한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의 삽화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민소(憫笑, 가엽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그림의 설명문에도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農民)으로, 대사(大使)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고 이른다”고 하여 항거의 의미를 축소하는 어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잡지의 본문에 게재된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라는 짧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조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한제(韓帝, 한국황제)는 이 사변에 대해 매우 심통(心痛)하여 23일 오전 2시 예식원경(禮式院卿) 이근택(李根澤, ‘이근상’의 오류)을 대사의 여관 대관정(大觀亭)에 보내 정중한 위문(慰問)을 겸해 사의(謝意)를 표하도록 했으나, 대사는 어제 저녁의 일은 본디 아희(兒戲, 어린아이 장난)와 같은 것이었고 또한 부상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일도 아니었기에 결코 깊이 존려(尊慮)를 기울여 주실 일은 아니라고 답주(答奏)하였다. 이 폭한은 그날 밤에 포박 되었는데, 과연 취한(醉漢)의 악희(惡戲, 고약한 장난)로 추호(秋毫)도 고의(故意)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이토 대사가 매우 대범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인물인 듯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예식원경 이근상의 사죄 방문에 이어 그날 아침이 되자 궁내부대신 이재극(宮內府大臣 李載克)이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사죄와 위문을 뜻을 전하는 등 야단법석을 떠는 상황이 이어졌는데, 한껏 쇠잔해진 국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참으로 서글픈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처리 결과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에 수록된 「이토대사 탑승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 제하의 문건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선고서(宣告書)
경기도 과천군 안양시장(安養市場) 22통 호 불상(不詳)
원태근(元泰根) 당 22년

피고는 명치 38년(1905년) 11월 22일 동 시장의 이만여(李萬汝) 외 2명과 함께 일가(日稼,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마신 결과 약간 술에 취하여 동일 오후 6시 17분 경 경부철도 안양역 서북방 약 8백 미터 안양 부근에서 북행열차가 진행하여 오는 것을 보고 마침 가지고 있던 작은 돌멩이를 선로 위에 놓아두는 것을 동행자인 이만여가 이를 제지하여 스스로 이를 치워버리자 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주먹 만한 크기의 화강석(花崗石)을 주워 객차를 향해 던졌기 때문에 차창이 파괴되어 당시 차 안에 있던 승객 한 명에게 미상(微傷)을 입히게 하였다.(중략)
이상 피고의 행위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 제4조 제9항에 해당하는 범죄로서 정상작량(情狀酌量)하는 것으로 함에 따라 군율위범심판규정(軍律違犯審判規定) 제6조에 의거하여 감금(監禁) 2개월, 태(笞) 1백에 처한다.

명치 38년(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헌병대장 오야마 미츠키(韓國駐箚憲兵隊長 小山三己)

 

<각사등록 근대편 자료>에 수록된 「조회(照會) 제25호(외부대신 발신, 의정부 참정대신 수신, 1905년 7월 10일)」에는 ‘한국주차군 군율(韓國駐箚軍 軍律)’의 세부사항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확인해보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한’ 제4조 제9항은 “아군(我軍)의 징발(徵發)에 응(應)함을 거(拒)하고 우(又) 방해(妨害)한 자(者)”로 표시되어 있다. 달리는 열차에 돌멩이를 던진 사안과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으므로, 요컨대 선고서를 작성할 때 군율의 해당 항목을 잘못 인용 기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돌을 던진 한국인의 이름이 ‘원태근’으로 적혀 있지만 호적자료에는 그의 정체가 원태우(元泰祐, 1882~1950)로 기재된 것으로 확인된다. 원태우 지사는 이때 혹독한 구타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면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한국전쟁 발발 시기에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오래도록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행적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1990년에 이르러 겨우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그 결과 뒤늦게 ‘원태근’이라는 이름 아래 건국훈장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