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건축연구소 게시판]건축가/ 2006년
로지에의 <숲 속의 작은 집>과 안양 프로젝트
이윤하(건축가)
*들어가며
삼성산의 자연 속에서 누가 이미 엄청난 우주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생명들의 서식처를 보았는가? 누가 가만가만 그 숲 속에 깃들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의 숨결을 따듯이 엿들어 보았는가? 과연 누가 진실로 작품을 들여놓는 바로 그 장소에서 철거되는 작은 생물들의 그렁그렁 눈물을 보았는가? 예술적 인간의 이름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우리는 또 다른 원주민에게 약탈을 저질렀다. 공공의 이름으로 자연의 이름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숲 훼손을 경험하게 된다. 이 엄청난 사건을 목도하고도 우리는 다른 프로젝트와의 비교하면서 오늘 하루도 위안한다. 잘 있거라, 자연이여...하면서 나름의 정당성을 찾으려 글을 쓴다. 그래도 자연에 대한 최소한 양심은 건졌다고 위로하며, 자연이 자기를 지키려고 휴면에 들어 간 엄동설한에 인간들이 예술의 흔적을 남겨 두고 따뜻한 작업실로 총총히 사라진 날에 이 삼성산 기슭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용서하시라, 자연이여... 하면서 그래도 그 만큼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작업들을 흘겨보고 있다.
낙후된 일정구역을 예술적 행위로 정체성을 살리려는 일련의 작업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발의 형식논리에 의해서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공공기능을 접목시켜 예술의 영역을 시민들이 즐기고, 따라잡기를 한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처음 작품들을 보러가기 전에는 이른바 관주도형 한건주의와 계몽주의가 연상되었다. 이는 지금껏 관의 이름으로 진행된 유사한 이벤트성 사업들의 과정이 그러했고, 지속적인 유지관리 차원의 후속작업의 초라함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부디 나의 선입관이 기우이길 바랐다. 더욱이 예술과 자연의 만남이고 인간생태와 자연생태의 한바탕 어우러짐이라니 기대해봄직하였다. 생태에 관한 철학이나 사상은 심층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 환경관리주의, 기술중심주의 등의 여러 관점을 지니고 있고 다층위적인 접근 방식이 있다. 그래서 작가들의 생태에 관한 사상적 배경이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구사하는 표현방식과 형상어휘에 따라 서로의 색깔을 달리할 것이다. 이에 따라 작가와 작품을 분류하고 따라읽기를 하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자연과 구축의 딜레마 풀기
구축이란 주체의 의지가 개입된 물리적 공간구성의 형태이고, 자연은 생태계의 섭리에 의한 이루어진 종합적인 환경이다. 이에 삼성산 자연과 참여작가들에 의한 예술적 구축이 이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만나고 소통하는가하는 문제가 가장 흥미로운 감상 포인트이다. 건축이 공간의 구축을 목적으로 한 인위적 창조의 산물이며, 생태환경 속에 속해있는 인간의 구축행위는 동시에 이미 자연과의 단절을 전제로 진행된다.
그러나 건축의 시작점이 쉘터(Shelter)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내부 공간 만들기였다고 유추해 본다면 자연과의 소통체계는 열린 구조여야 한다는 확신이 설 것이다. 초기의 동굴과 같은 자연적인 쉘터에서 움집과 같은 인위적인 쉘터로 진행되어왔기에 내부와 외부의 관계성, 인위적으로 구축된 건축화 공간과 자연환경과는 끊임없이 상호 보완적 긴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태와 환경을 건축적 영역으로 끌어 들이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생태의 개념과 예술이 만날 때는 좀더 심층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생태계의 순환을 쫒아서 원형을 복원하고 상징화 하는 방식이여야 하며, 건축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개념은 주체가 개입하여 자연을 대상화하여 형상화하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범위가 한정적일 수 있다.
그리고 건축과 이웃장르의 예술적 결합에는 위험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제와 장소성에 대한 동질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 지향이 다른 분야이며, 시간의 대입에도 이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벤트적인 측면에서의 시간의 분절과 예술적 측면에서의 영속성이 다르며, 동선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을 일치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흐르는 강물에 시간을 대입하면 자연적 유속과 유량이 속도를 조절하며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행위가 결합되는 지점에서의 자연적 시간의 조절에 의한 연속성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현대의 물질문명과 인간의 행위들이 자연환경의 파괴에 주범으로 지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속도조절의 문제이다.
자연적 시간을 방해하는 아무리 장식적인 미사여구로 포장한 인간의 시간도 정당화 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자연을 깨닫게 해주는 좋은 일이고 환경운동의 긍정적인 어떠한 것이라도 결코 자연에게는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물들의 지점간의 거리가 적절하지 못하다. 장소적 한계가 있더라도 조금 더 긴 동선의 호흡으로 배치해야 한다. 한군데 여러 작품들을 배치해 놓으므로 인해 이벤트성 전시, 기존 미술관적 전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 관계하는 작품의 생명은 장소성이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다. 어디에 놓아도 좋을 듯한 작품이아니라 그 생태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그 무엇이여야 한다. 그러나 여러 작품들이 작가들의 의지가 지나치게 도드라지거나 선입견이 앞서서 작품들이 장소성에 부흥하지 못하고 있다.
장소성에 대한 해석은 주제의 적합성, 재료적 친화성, 스케일 등에서 비롯하겠지만 적절히 대지를 읽어내어 새로운 생명의 기운으로 세상에 내놓으려는 근원적 창조의지의 원천이여야 한다. 미시적 지역성과 생태계의 해석은 생태 철학적 관점을 견지해야하고 생태적 순환 체계에 대한 나름의 선험적 경험과 예술의지의 집적물이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설정의 부분에 의해서 같은 주제에서 시작했지만 성과물을 보면 서로 다른 만날 수 없는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자연 속에 노출되어 있는 예술품은 건축물과는 기능적 부분에서 다를 수 있지만 자연 환경과 패시브하게 관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미기후에 민감하고 빛과 비, 바람과 주변 식생과 조응한다. 또한 대부분 숲 속에 들어앉은 작품들이어서 숲과의 대화 여지가 있어야 한다. 지나친 인간중심의 사고로 자연을 편협하게 시야의 틀 속에서 프레임화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술작품이나 인간의 간섭 없이도 자연은 그 자리에서 이미 그러그러했고 나름의 질서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인간이 개입하여 인간의 예술적 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입장에서 지형과 생태를 읽어주려는 배려가 배제된 경우에는 자연 속에 던져진 인간 감정의 찌꺼기가 숲 속에 뒹구는 형국과 다를 바 없다. 자연을 대상화 하더라도, 주체와 객체가 역전된 상태에서도 상호 감정이입의 시나리오가 가능해야 한다.
*예술이 자연과 어떻게 조응할 것인가?
볼거리는 많은데 읽을거리가 없는 전시회를 한번쯤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참여 작가와 참가작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개별적 언급은 어렵고, 개별성 성향과 주제가 달라서 비교하거나 분류해서 작품을 읽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선 랜드아트(Land-Art)적인 맥락에서 자연과 대지의 관계맺기에 따라 유형별로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이는 생태적 순환이라는 큰 맥락을 기반으로 하여 나름대로의 관계성을 부여하였다.
첫째로는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생태성을 유지하면서 영역성을 부여한 경우이다. 그 미시적 생태계와 소통하면서 인위적 부분을 최소화하는 작업이다. 원시적 장소성을 생태적 감수성으로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고 감상자로 하여금 자연과 매개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묻어난다. 근본생태주의에 기초하여 심층주의적 경향성을 보이는 이 작품들은, 영역적인 부분을 최소한의 자연재료를 사용해서 자연적 요소를 상호 교통하면서 장소성만을 부여하고 있는 한국 건축가인 헬렌 박의 ‘장소성, 비장소성’과 숲 속에 인간의 들고남으로 생기는 답압을 방지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산책로와 길을 가다 만날 수 있는 휴식용 벤치를 지형과 동선에 어울리게 설치한 일본팀인 클립의 ‘전환점’과 ‘숲 속 길’과 ‘낮잠 데크’, 지형과 수목의 형국에 어우러지는 리드미컬한 목재 평상과 데크를 설치한 천대광의 ‘은하수’, 삼성산의 한 구역을 정하여 생태적 조경기법으로 조성한 백기영외 10인의 조경가와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프로젝트인 ‘예술가의 정원’, 안양유원지 일대의 공사장에서 나온 흙과 돌을 재활용하여 구조물과 바닥 패턴을 만든 김용익의 ‘우리들의 정원’과 ‘만수강산 유람할 제’, 그리고 새집을 달아서 생태계와의 매개를 시도하고 있는 이태리 작가 세자리오 카레나의 ‘새를 위한 기념탑’ 등이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자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생태성을 인정하면서 자연적인 재료로 둘러치거나 깔아서, 재료의 물성과 자연의 생태성을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인공적인 행위는 자연의 소통이 최대한 보장되는 범위에서 최소화 하고 자연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영역화하여 자연적 상태의 장소성을 극대화 하고 있다.
두 번째로 묶을 수 있는 집단은 원시상태의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복원의 본능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들이다. 복원의 부분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자연의 본능을 충실히 읽어내어 시간과 역사를 자연에 대입하여 회귀의 통로를 개설하고자 한다.
지표면에 유리를 설치해서 지상의 현실과 다른 세계와의 통로를 제시한 홍명선의 ‘열반의 문’과 현장답사중에 버려진 구조물을 모아서 구조물을 만들어 놓은 장-뤽 빌무트의 ‘발견’, 만화의 드로잉 형식으로 파라다이스를 표현한 네 개의 천막 설치물 인도네시아팀인 체메티 아트 하우스의 ‘천국의 상자’, 페이퍼 하니컴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뱀의 움직임을 심플하면서 역동적으로 표현한 쉼터인 일본작가 켄코 쿠마의 ‘종이뱀’, 음료수 박스를 쌓아서 공간화하고 바람과 빛을 관통하는 구조물을 설치 한 독일의 볼프강 빈테와 베르홀트 허벨트의 ‘빛의 집’, 안양유원지에서 만난 낡은 상점들을 미래의 시간으로 가져가려는 10여개의 조각을 하천에 따라 설치한 중국 미술가인 왕두의 ‘신기루 집’, 나무가 떨어뜨린 몇 마디의 말을 표현한 일본 작가인 유겐 테루야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용의 꼬리 형상의 꿈틀거림을 대지의 역동성에 부여한 한국 작가 이승택의 ‘용의 꼬리’도자기 제작기법으로 인간을 닮은 숲의 정령들을 배치해 놓은 작품인 이승하의 ‘숲의 정령’, 벤치의 모습을 바람과 빛에 의해 리듬감 있게 너울거리는 듯이 곡선으로 변형시켜서 만든 덴마크 에페 하인의 ‘노래하는 벤치’, 분수의 수직적 역동감을 목재로 형상화한 고승옥의 ‘각목 분수’ 그림의 내용을 병풍으로 둘러서 현실과 피안의 경계를 표현하고 있는 백윤영의 ‘그림자 호수’, 숲 속에 거울로 세워진 미로와 거울에 비추인 주변 풍광이 어우러져 새로운 착시현상을 유발하고 있는 덴마크의 예페 하인의 ‘거울 미로’ 인도네시아산 대나무를 이용하여 영역을 부여하고 그 내부공간의 신성한 공간으로 치환한 오브제를 만든 인도네시아 에코 프라워터의 ‘안양 사원’ 등이 있다.
자연 생태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영역화 한 첫 번째 분류집단과는 작품의 경향은 닮아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연의 스토리를 찾고 있음이 다르며, 내재되어 있는 정신적 요소를 최소한의 구축 행위로 표현하고 있다.
세 번째 작품군은 자연을 대상화하여 텍토닉(Tectonic)의 개념으로 모뉴멘탈한 오브제화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작품의 경향들은 매우 엑티브하게 자연을 다루고 있으며 환경관리주의적 입장에서 기술 중심, 인간중심적인 관점까지 폭넓게 다루어지고 있다. 공공 예술이나 환경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에서 가끔 보아왔던 프로세스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과 생태의 범주에서 작가적 예술의지가 강하게 묻어나오고 있다. 예술작품의 실용성과 오브제로서의 작품성의 복합적 경향을 띈다. 여기에는, 구조물 위에 잔디로 만든 데크로 놀이기구로 표현한 일본의 토쿄 피크닉 클럽의 ‘잔디는 휴가 중’, 유스호스텔 옥상의 저수조옆에 시간에 따라 부풀어 오르는 가짜 풍선 저수조인 시간저장조를 만들어 일상속의 자연적 시간을 표현한 홍영인의 ‘부풀어 오르는 저수조’, 숲 속의 풍경을 한정된 공간에서 창을 통해 조망 할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인 독일 헤만 마어 노이슈타트의 ‘리.볼.버’, 하천과 분수의 흐름과 솟구침의 역동성을 키치적으로 표현한 벨기에 호노레 도의 ‘물고기의 눈물이 호수에 떨어지다’, 모래시계의 모티브를 물의 시간적 흐름으로 시각화한 한국작가 전동화의 ‘도시도 아니고 아트도 아니고 시간은 흐른다’, 간판이라는 평면적 대상을 기능을 바꾸어 보는 기능으로 바꾸어 인식의 전환을 꾀하고 있는 네덜란드 작가 존 커멜링의 ‘빌보드 하우스’, 태양광을 이용해서 바퀴가 돌아가는 과학원리를 예술적 설치물로 표현한 주재환과 이필렬의 ‘태양 에너지 타워’, 석축의 물성과 화려한 인조꽃의 감성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최정화의 ‘돌꽃’, 음원을 이용한 사운드 설치물인 스웨덴 작가 칼 미셀 본 하우스볼프의 ‘세개의 음파가 하나의 소리를 말한다’ 숲 속에 설치된 긴 서가의 통로를 지나며 기억을 반추하는 김승영의 작품 ‘기억의 공간’, 공간의 경제성 사용과 공간의 실제감을 타워형으로 구축한 프랑스 파우스티노의 ‘1평 타워’ 삼성산의 등고선을 연장하여 생성초기의 지형을 복원하여 설치한 네덜란드 엠브이알디브이의 ‘전망대’ 등이 이 집단에 속할 수 있다.
이들은 비교적 주제가 선명히 나타나고 조형적 측면이 강하다. 다른 부류에 비해 건축적 텍토닉과 작품의 동기가 뚜렷하지만 키치적 경향이 보이고 생태계의 내면적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가면서
환경의 문제와 생태에 관한 제 문제는 크게 보면 생명사상에 닿아있다. 이 속에 존재하는 코스모스의 세계와 카오스모스의 세계의 본질과 관계성을 이해하고 찾아가는 작업이야말로 자연을 향한 인간의 원초적 예술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우주와 그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혼돈의 세계 속에서 생태계는 유지되고 수많은 종의 생물체들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이런 관계망과 시간의 흐름은 생태를 주제로 하는 예술세계에서는 자연스럽기와 인간의 창작의지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내포되어 있다. 생태적 창작행위에도 인간의 물리적 욕망의 제어가 필요하며, 내면적 사유의 확대가 절실히 요구된다. 생태의 순환원리와 심연의 고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생태예술의 본질이라 여겨진다.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선언은 창작을 하는 인간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갈까? 아니,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들에게는 루소의 말이 어떻게 해석 될까?하는 호기심이 이 글의 전부이다.
로지에의 <들녘의 작은 집>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 다른 연상작용을 할 것이며, 서로 다른 기호를 도면에 옮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말하는 것조차 의미 없음일 수 있다. 다만 내 앞에 놓여진 이 그림을 보면서 하염없이 념(念)하고 또 원(願)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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