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탐사74]안양교도소/포도원/가구단지(2015.07.18)

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74]안양교도소/포도원/가구단지
2015.07.18/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74차 #호계3동 #안양교도소 #포도원 #가구단지/ 74차 탐사는 안양교도소에서 안양(호계3동)과 의왕(오전동)의 경계인 포도원과 가구단지 일대로 1960년대 포도나무들이 재배했다가 70년말 단독주택들과 가구공장들이 있었던 야산자락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대규모 고층아파트단지들이 우뚝 서 있다. 그래도 과거의 옛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63년에 세워져 국내 교정시설중 가장 오래된 안양교도소는 최근 의왕 교정타운과 함께 이전 여부를 놓고 논쟁이 치열하다.
1960-70년대 포도나무가 즐비해 포도원이라 불렀던 곳은 과거 성나자로마을과 주변에 단독주택들과 가구공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또는 나홀로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속에도 과거의 건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1977년 지어진 남강주택단지는 시행,시공사를 찾지 못해 재건죽을 하지 못하고 있는 표류 상태로 60가구 대다수 집들은 언제 무너질까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태롭기까지 한 상태로 6가구 정도는 이미 빈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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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군포(舊軍浦) <호계3동>
안양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덕고개, 북쪽은 샛터말, 서쪽은 군포시 당정동 벌세전리 및 금정동 점말, 남쪽은 의왕시 오전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구군포사거리와 맑은내(淸川) 사이에 장(군포장)이 설치되면서, 시장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10일에 섰던 군포장은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인근에서는 안양, 군포, 의왕, 과천등과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 때는 시 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룬다고 한다. 번창하던 군포장이 자취를 감추기는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 내가 범람하자 안양지역은 안양1동 소재 구시장(진흥아파트 앞)으로 옮기면서 그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개칭되었고, 서남부 지역은 남면 군포역 앞(현 군포시 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명칭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이 후부터 이곳 일대를 구군포(舊軍浦) 또는 구 장터라 부르고 있다. 군포(軍浦)의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포란 지명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200년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부왕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묘할 때, 능행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도록 하여 편찬된원행정례(1789) 도로교량조道路橋梁條에 군포<軍浦>라 기재되어 있는데, 군포(軍浦)는 양역(良役)이라 하여 양인(평민)이 부역하던 국역을 말하기도 하고, 정병을 돕는 조정에게 역(役)을 면해주는 댓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을 말하는데, 군포가 군포(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청.일전쟁 때(1894),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경유 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군포라 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관개수로가 잘 된 지금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군함이 왕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조선 선조 때(1592)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지역에 머물때 동리 주민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한다. 그 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곳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라 하였으나 시대변천으로 군포로 되었으며, 군포(軍飽)가 군포(軍浦)로 바뀌어진 시기와 사유는 알 수 없다.
구 군포는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래 수성 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한촌이었다. 이 마을은 만안로와 맑은내 사이의 서쪽지역은 아랫말, 만안로와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동쪽 지역은 웃말이라 각각 불렀으며, 오늘날처럼 번창되기는 1963년 호계3동 458에 안양교도소가 들어서고, 이어 금성전선, 금성통신 등의 공장과 경수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는 안양교도소, 안양시민방위교육장, 호계3동사무소, 호계파출소, 한성병원등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호계파출소 북쪽 약 100m 지점에 있는 군웅산(軍雄山)에서 군웅제(軍雄祭)를 지냈으며, 1960년대 말에 이곳에 민가가 신축되자 파출소 북쪽 50m 지점으로 옮겨 제를 지내다가, 이곳 역시 박모씨로 소유주가 바뀌자 198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포도원

호계삼거리와 구군포사거리 동쪽으로 의왕시 오전동 성나자로 마을과 경계에 있다. 포도원이 변하여 마을이 되었다. 1950년대에 옛 경향포도협동조합 창업자인 황인웅(黃仁雄)이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하면서 이 일대가 포도단지로 조성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성자나로마을 입구 쪽으로 가구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후 1980년대 택지로 탈바꿈하기 전까지 안양의 포도밭은 약 27만평에 달하는 규모를 보였고, 가장 당도 높고 맛있는 포도를 생산하였으며, 포도주 산업을 주도하였다. 포도가 익는 8월이 되면, 서울을 비롯하여 인근 각지에서 안양의 맛있는 포도를 맛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왔는데, 이는 안양의 독특한 풍속도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도시화 물결에 밀려 포도밭이 택지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이후 도시회 개발사업으로 현재는 대단지 아파트가 속속 세워지고 있다.

 

■안양교도소

안양교도소는 1963년 호계3동 38만9천여㎡ 부지에 건립된 건축물(개소 1963년 9월3일)로 지어진지 50년이 넘어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정시설이다.
특히 교도소 정문에서 교정아파트에 이르는 200m의 교정로에는 1963년 교도소 신축 당시 심은 왕벚꽃나무 50여그루의 고목나무들이 봄이 되면 탐스럽고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분홍빛 벚꽃터널을 만드는 명소다.
안양교도소의 역사를 보면 1912년 9월 경성감옥이 1946년 4월 마포형무소와 1961년 12월 마포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3년 9월3일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 신군포사거리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안양교도소는 주거지역 1만2700평, 자연녹지 5만9243평, 개발제한구역 4만8614평 등 12만584평 부지에 연면적 9815평의 2층 교도소와 1개동의 교정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안양교도소 이전 요구와 논의는 1990년대 말부터 제기되어 왔다.
안양시와 시민들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안양권 외곽에 위치했던 교도소 인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호계 신사거리가 생기면서 인근지역주민들의 민원 대상 1호로 제기되면서 1999년에는 6000여명의 안양시민들이 이전 민원을 내는 등 안양교도소 관외 이전을 법무부 등 정부당국에 꾸준히 요구해 왔다.
또한 법무부가 1995년과 1999년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전체 89동 가운데 44동에서 중대 결점이 나타나 안전에 문제가 있고 시설의 노후화에 따른 문제점도 컸다.
이에 법무부가 지난 1999년 안양교도소를 인근 지역으로 이전을 추진한 바 있으나 시흥시, 안산시, 의왕시, 군포시 등 인근 지자체의 해당 주민들은 물론 해당 시와 시의회까지 나서 반발하는 등 집단행동이 거세지자 이전계획 자체가 전면 백지화됐다.
당시 법무부는 서울 영등포 구치소 및 교도소와 안양교도소의 이전을 위해 반경 20㎞이내 17개 후보지를 선정, 검토해온 가운데 모 건설업체가 제시한 시흥시 물왕리저수지 인근인 조남동 일대 7만여평의 지역에 대해 가계약한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반발을 샀다.
또 2000년 8월에는 법무부가 안양교도소 이전장소로 안양시 석수동 석산부지(현 경인교대 캠퍼스)를 검토하고 일부 도의원이 이에 가세해 찬성 홍보전까지 펼쳤으나 이번에는 해당지역 주민둘의 반대로 2001년 9월 법무부는 이전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이같은 안양교도소 이전 계획은 교도소 시설이 노후화되고 지역주민들의 이전 요구로 지난 1999년부터 양여 사업자 공모 등 이전이 추진된 바 있으나 이전후보지 자치단체의 반대와 안양시의 저밀도 지구단위계획수립 후 용도지역 변경으로 이전이 무산됐다.
2003년 11월에는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을 비롯 안양시, 도교육청, 안양교육청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호계3동 지역 및 안양교도소 학교부지 활용을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법무부 소유 임야의 학교.공원 활용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일부 참석자들은 "학교와 공원 등의 기반시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안양교도소 부지 활용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며 "교도소의 현대화를 통해 토지이용을 높이고 남은 부지는 안양시가 양여받아 기반시설 부지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전 후보지 주민들의 반대로 이전 자체가 어렵자 이전계획을 접고 2006년부터 재건축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지역국회의원인 심재철의원의 역할도 한몫 한다.
결국 안양시는 지난 2009년 법무부와의 협의를 통해 기존 건물을 헐고 사업비 1,259억원을 투입해 지하 1층, 지상 3층의 22개동을 건축(건축면적 2만5383㎡, 연면적 6만212㎡)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27억5천만원을 집행해 실시설계를 완료했다. 주목할 점은 교도소 전체 부지중에서 7만2983㎡(30.8%)를 주민편의시설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2010년 7월 새로 취임한 현 최대호 안양시장이 주민들의 반발을 이유로 재건축 반대와 안양교도소 이전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교도소를 재건축하겠다며 2010년 2012년까지 안양시에 재건축 협의를 3차례 신청하지만 안양시는 잇따라 반려하자 2012년 7월 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해 1·2심에서 안양시가 모두 패소하자 시는 지난해 7월 대법원 상고했으나 또 패소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반전하는 사건이 생기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법무부, 국방부가 의왕시에 교정타운을 지어 안양교도소, 서울구치소, 서울소년원 등을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이 찬반으로 양분돼 대립과 불신으로 치닫으며 반대 주민들은 자녀들의 등교거부, 1인시위 등에 나서면서 교정타운(법무타운) 유치 반대 목소리를 외치고 있는 반면 의왕시는 주민의견수렴, 시의회 의견 청취 등으로 교정타운 유치를 위한 행보를 계속하는등 양측의 갈등은 정점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의왕가구단지가 있기까지 배경

안양과 의왕 경계에 있는 의왕가구단지가 있기 까지는 지난 역사를 보면 천주교 성나라자로마을과 떼어 놓을수 없다.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의 성나자로마을은 무의탁 한센병(나) 환우 등의 치료와 치유된 환자들의 사회복귀 및 자활을 마련하고자 1950년 6월에 설립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求癩事業)기관이다.
미국메리올리 소속 죠지케롤 안주교에 의해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광명시 신 기슭에 창설하였으나 1951년 7월 현 장소인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소재한 땅을 매입하여 이전하였으며 현재의 마을로 성장하기 까지 고 이경재 신부님의 노력이 컸다.
1962년 3월 성라자로마을에서 치료 중이던 환자 중 음성으로 판명된 45세대 82명이 인근 국유지와 라자로 원장인 윤을수 신부가 임야 약 33,000㎡를 구입 희사함으로써 자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축사를 지어 양계 양돈을 하며 어려움을 딛고 모든 사람들이 자립해야 된다는 생각릏 심어줘 땀 흘려온 동안. 당국의 보조와, 함께 자체 적립금으로 농장사무실, 경로당 등을 신축하며 보람도 맛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시화추세와 축산업계의 불황 등으로 축사는 차츰 비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은 축산업 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축사는 텅 비고 말았다.
이와 함께 사람들은 서울근교에서 이전해온 가구제조 회사와 서로 협력하여 오늘날 주된 생활로 이르게 되었다한다.
이렇게 시작한 가구제작업자들은 서울 근교 변두리 지역에서 도시 근대화 물결로 이전 및 새 사업장을 찾던 중 축산업 불황으로 생계유지가 막막했던 이 지역의 축사를 개조하여 여기서 가구 제작 및 목공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및 맞춤가구를 만들며 원목장, 티크가구, 자개, 나전칠기 등 우리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생활가구를 제작하며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가구공장단지에서 가구전문 백화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