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28]군산의 근대문화역사를 보다(2013.10.26)

안양똑딱이 2017. 5. 19. 04:43

 

2013년 10월 26일 늘푸른안양21 마을자치위원회와 함께 떠난 군산 근대문화유산 및 골목길 탐방. 오전 8시15분 안양을 출발해 오후 9시45분 안양에 도착한 빡빡한 하루일정으로 돌아 본 군산 그 곳에는 수탈의 현장, 새롭게 변신한 개항기의 건물, 사라지는 주거지.. 등 마치 정지된 듯한 빛바랜 색깔의 풍경이 듬뿍 담겨 있었다.
군산은 도시 자체가 박물관 같아서 골목골목이 흥미롭다. 거리마다 태연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는 낡은 건물들을 찾아다니는 것,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지도 한 장 손에 들고 과거를 찾아다니는 여행. 흔히들 말하는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이런 것 아닐까.

탐방코스 : 안양 - 채만식문학관 - 경암동 철길마을 - 중식 - 군산근대역사박물관(해설사) - 미즈카페(1930년대 구 무역회사) - 군산근대미술관(구 18은행 군산지점) - 군산근대건축관(구 군산은행 군산지점) - 군산세관 - 진포해양태마공원 - 군산내항 부잔교(뜬다리) - 해망굴 - 해망2동(산비탈 동네) - 동국사(일본식 사찰) - 신흥동 일본식 가옥 및 동네 적산가옥 골목길 - 개항기 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 초원사진관(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 한일옥(명품 무우국) - 고우당 게스트하우스 - 석식(민선초가) -안양

 

[군산1]채만식문학관과 경암동 철길마을

 

◩ 장편소설 탁류의 작가 채만식 문학관
• 소재지 : 군산시 내흥동 285

일제 강점기의 세태를 풍자한 '탁류'의 작가 백릉 채만식 선생(1902-1950)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군산 금강 하구둑의 금강체육공원과 진포대첩기념탑이 있는 금강시민공원 사이에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군산에시내 접어들기 전에 있다.
채만식 선생은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출신으로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한 전북이 낳은 대표적인 소설가 로서 소설 87편, 희곡 28편, 산문 평론 수필 등 345편에 이른다. 그는 소설 뿐 아니라 희곡분야에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대표 장편소설로 '탁류' '태평천하', '금의 정열' 등을 들 수 있고 단편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 '소망', '치숙' 등을 꼽을 수 있다.
채만식문학관은 1층엔 전시실과 자료실이 있으며 2층엔 로비와 영상세미나실이 있다. 선생의 연보,호적등본,와세다대학교 재학확인서 임피초등학교 졸업증명서와 고등학교 졸업장 생전모습사진과 선생의 작품들, 선생의 삶과 작품세계를 볼수있는 영상관 등이 있다.
채만식 문학관에서는 채만식 선생과 안양과의 인연도 발견할 수 있다. 1940년 안양 양지마을에서 살았던 것이다. 또 '안양복거기' , '안양점거기' 등 수필을 비롯 중편, 단편 등을 발표했다는 사실.


◩ 경암동 철길마을
• 소재지 : 군산시 경암동 철길 건너편 뒷골목

철길마을. 끝없이 황량한 철길이 늘어서 있을 것만 같던 상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30분 남짓이면 왕복할 수 있을만큼 짧다. 열차가 지나가면 아슬아슬하게 맞닿을 것 같은 철길옆 낡은 판잣집들은 소박하여 정겹지만 치열하여 서글픈 삶의 때가, 잔뜩 눌어붙어 개보수 없이 버려진 채 이제는 주민 대부분이 떠나 썰렁한 분위기다. 이 철길은 군산역에서 페이퍼코리아 회사까지 원자재 및 제품을 실어나르기 위해 다소 강압적으로 놓인 것으로, 정식 명칭은 '페이퍼코리아선'. 약 2.5km의 길이다. 1944년 개통 이래 21세기로 접어든 2008년까지도 기차가 다녔다고 한다. 당시엔 매일 기차 시간에 맞춰 철길에 걸쳐놓은 가재도구를 부지런히 옮기는 주민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이제는 기차도 떠나고 주민도 떠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곳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된 듯한 모습 덕분에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굉음과 함께 기차가 선로를 가로지르던 그 때의 풍경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햇살 내리쬐는 철길마을을 선로따라 타박타박 걸어본다. 이곳에서 고달픈 삶을 살았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상상해본다. 선로 위에서 잡초처럼 자랐을 아이들의 모습도. 지금은 쓸쓸한 풍경이지만 당장에라도 창문 너머로 와글와글 이야기가 쏟아져나올 것 같다.

 

 

[군산2]군산, 근대역사를 보다

 

◩ 수탈의 아픔 한 눈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 소재지 : 군산시 해망로 240 (장미동 1-67)

전북 군산은 일제 강점기 당시 가장 번화한 항구도시 중에 하나였다.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나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으며 그만큼 당시의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군산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당시의 근대건축물이 많다. 군산 도심에서 2.5㎞ 인근에 흩어져 있는 근대시설은 170개에 달한다. 군산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아픈 과거사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근대역사문화밸트화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일제 잔재를 보존하는 사업에 적지않은 시민들이 반대하고, 비난의 목소리를 냈으나 군산시장은 이를 강행했다. 아프고 슬픈 과거도 엄연한 역사이기에 일제의 침탈을 그대로 보여주고, 후세에게 잊지 말자는 뜻에서 누군가 해야할 일이라면서.

1단계 근대역사문화벨트화 사업은 종료됐다. 이 사업을 통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지난 2011년 11월 문을 열었다. 국비를 지원한 중앙정부는 당초 박물관 부지로 철새조망대 인근에 세울 것을 요청했으나 군산시는 근대건축물과 연계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며 일제 강점기 건물들이 있는 군산 내항의 현 위치에 지었다고 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맨 먼저 현관 옆에 2층 높이의 등대가 관람객을 반긴다. 국내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어청도 등대를 축소해 놓아 관람객들은 등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박물관 기행을 시작한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8,347㎡의 대지 위에 전체면적 4,248㎡ 크기의 3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있다. 1층은 해양물류역사관과 어린이박물관, 수장고가 있다. 2층에는 근대자료실, 3층에는 근대생활관과 기획전시실, 세미나실이 자리 잡고 있다.

해양역사박물관에는 군산과 고군산열도에서 발굴한 고려청자 등 도자기가 전시돼 있다. 전시관 가운데 자리 잡은 목선은 조선시대 군산에서 물자를 싣고 한양을 오가던 배를 축소한 모형이다.

그 옆에는 이 지역 출신으로 충청수군절도사를 지냈던 최호장군이 남긴 삼인보검(三寅寶劍)이 눈길을 끈다. 길이 94cm가량의 이 보검은 1596년에 선조가 하사한 것이다. 최호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사했다.

그 옆에 자리한 유물은 요즘은 보기 힘든 영여(靈與)다. 영여란 영혼이 타는 수레를 의미한다. 혼백과 신주, 곧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고 돌아올 때 쓰는 가마를 말한다.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의 잉여는 제주고씨문중에서 기증한 것이라 한다.

박물관 3층으로 자리를 옮기면 근대생활관과 기획전시실이 나온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성업했던 군산이 명동 상가를 옮겨놨다. 잡화점에서는 요즘 보기 힘든 물건들이 자리하고 있다.

인력거방에는 재력가들이 이용했을 법한 인력거가 놓여있다. 당시 사용하던 인력거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옆에는 일본으로 쌀을 보내던 미곡시행소가 자리하고 있다. 칠판에는 쌀의 시세차익이 적혀있어, 흡사 요즘의 증권거래시설을 연상케 한다.

또 검정고무신과 술도매상. 군산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경성고무가 기증한 ‘만월표경성고무 신발’이 놓여있다. 벼를 선적할 때 쓰던 부장교 축소모형과 저장고도 재현했다. 조선인 빈민가를 보여주는 토막집, 다다미가 깔린 군산극장도 있다.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 일제에 저항한 선조의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옥구농민항쟁. 군산 만세운동, 전북지역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와 관련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1892년 개항된 군산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도 보인다.

이곳에서 만나는 근대 유물들은 대부분 지역주민과 학교 등에서 기증한 것이라 한다.

 

 

[군산3]군산내항 주변 근대건축물


수탈의 역사 고스란히 보여주는 군산항 주변과 근대건축물

1899년 개항 이후 군산항 지역은 당시 양 구릉지 사이의 저 평지에 도시계획 도로가 만들어지며 이른바 일본식 도로 명칭인 본정통을 중심으로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통의 주 간선도로와 본정통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부터 1조통에서 9조통까지 보조간선도로로 둘러싸여진 격자형의 계획적인 가로망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근대문화유산 탐방안내도에서도 보여지듯 일본 명치시대의 도시적인 특성을 나티낸 도로형태를 볼 수 있다. (명치통 - 현재의 중앙로1가 / 본정통 - 현재의 해망로)

군산의 근대건축물은 장미동과 월명동 일대에 밀집해 있다. 장미동은 꽃같은 이름과 달리 속뜻은 '장미(藏米)' 즉 쌀을 저장한다는 뜻으로 과거 쌀 곳간이 많았던 것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라 한다. 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곳간들은 이제 개조되어 박물관과 미술관 등 문화예술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 1930년대 무역회사(현 미즈카페)
• 소재지 : 군산시 장미동 32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 받은 군산항 개항기인 1930년대 근대식 건물을 만나게 된다. 첫번째 만나는 깔끔한 건물이 현재 카페테리아와 문학소통공간으로 운영되는 미즈카페다. 이 건물은 1930년대 무역회사가 있던 건물로 근대역사박물관 건너편에 있던 것을 2012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 십팔은행 (十八銀行) 군산지점(현 근대미술관)
• 소재지 : 군산시 장미동 32
• 등록문화재 제372호(2008.07.03)

1930년초 군산에는 특수은행으로서 중앙은행인 조선은행과 부동산 및 각종 산업금융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일은행,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일본계 십팔은행 (十八銀行) 다섯 개 지점이 있었다. 이 들 다섯 개 지점은행은 1936년 당시 대출 총액 2만 3천원, 예금총액 약 7천원5백원에 달하였다.
개항이래 군산에 진충한 일본계 지점은행은 두 개이었다. 그 하나는 1902년 11월에 전북최초로 개설된 제일은행 군산출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에 개설된 십팔은행 군산지점이었다.
제일은행 군산출장소의 경우, 1909년 일제의 중앙은행화정책에 따라 조선은행에 흡수되었으며 십팔은행 군산지점은 1936년 식산은행에 업무를 넘겨주었다.
십팔은행은 본래 1870년 일본 나가사키에 있었던 유력일본상인층이 기반이 되어 유사사립은행으로 출발한 은행이었다. 무역학으로서 나가사키(長崎)항이 쇠퇴함에 따라 이 은행은 1878년 국립 십팔은행으로 설립되어 1890년 인천지점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무역사업에 대한 금융이익을 얻기 위해 조선에 진출하였다. 군산지점은 조선 안에서 일곱 번째로 개설되었다.
십팔은행 군산지점은 주로 무역대부를 담당하였다. 이것은 주로 당좌대월, 화물어음, 어음대부로 행해졌다. 대부의 대상은 상공업자, 지주였으며 일본인 무역상인이 가장 많았다. 대부금은 미곡수출이 많은 11월부터 다음해 5, 6월에 집중되었다. 판매시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식민지적 금융시장이었다.
이 건물은 당대 유명한 건축가로 잘 알려진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1923년 설계한 벽돌건물로 2008년 이후 보수 복원을 통해 현재는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근대건축관)
• 소재지 : 군산시 장미동 23, 12번지 코리아나 볼링장 옆
• 등록문화재 제374호(2008.07.03)

일제강점기 한국과 대륙의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대표적인 금융시설로 1923년에 조선은행의 군산지점으로 건립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인질로 잡혀있던 독일인들에 의하여 설계되었고 중국인에 의하여 시공되었다.
외관은 2층이지만 본래 높이는 4층 건물 높이다. 정면에 돌출 현관을 중심으로 평아치를 5개 세우고 양쪽에 각각 1개씩 반원형 아치를 두었다. 당시의 건축 상황에서 이와 같이 웅장한 건물이 경성 이외에는 없었다.
일제 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등장하기도 한 이 건물은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로 1909년 대한제국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조선총독부의 직속금융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건물이다. 일설에는 구)조선은행 지하에 바다로 통하는 비상통로가 있어 구명정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다는 말이 전한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은행으로 바뀌어 전주로 지점이 이전되어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었다가 2008년 보수 복원 과정을 거쳐 근대 건축 및 은행관련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본래는 붉은 벽돌이었으나 후일 타일을 부분적으로 붙인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부분의 급한 물매가 특이한데 지붕은 함석판 잇기를 하여 마무리 하였고 현재 공사를 하여 변형이 심하다.


◩ 군산내항
• 소재지 : 군산시 장미동 내항

개항 초기의 내항은 일제의 한국 침략 교두보임과 동시에 우리 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가는 중요한 항구로 일인들이 수집한 농산물이자 이들이 만들어온 공산품이 산적하면서 항만은 일본 기선들로 가득 차 있었고 대기하기 일쑤였다. 이에 일본 통감부는 한국 정부에 축항의 필요성을 강조 항만건설비를 요청했다.
1905년 구한국 정부는 군산항 축항 공사비 8만 6천원을 투입했는데 당시 한국 정부의 재정 사정상 무리한 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이 군산항을 근대화으로 축조하는 첫 공사였다. 예의 집행은 일본인들이 하였다. 이때의 사업내용은 세관용지로 강변을 매축하는 공사와 고정잔교 1기 설치 그리고 육상 설비를 하였다. 그후 1909년~1915년까지 총공사액 32,900원의 공사비로 고정잔교 3기를 조성했고 철로로 항만까지 연결했다.
축항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1926년~1933년까지 7년간이었는데 총공사비 2백 85만원을 투입, 부잔교 2기를 설치하여 3천톤급 기선 3척이 접안 할 수 있었다. 이는 인천 다음에 이루어진대공사였다. 이밖에 육상에는 상옥 창고 3동을 건설하여 쌀 25만 가마를 일시에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배면에는 철도선을 증설하여 하루 1백 50량의 화차가 가동될 수 있었다. 이 공사에 들어간 토사와 석재는 수덕산을 잘라 확보했다. 조선조 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와 1925년 군산부가 만든 군산시가 지도를 보면 수덕산은 본래 강 연안 안쪽까지 깊이 뻗쳐 있으며 이 산에는 돌도 많았다고 전한다. 이 후 1936년에서 1938년까지의 공사에서 이제까지 설치한 부잔교 아래에 대형 부잔교 1기를 설치하고 그 사이를 속이 텅빈 콘크리트로 연결 3천톤급 기선 6척이 동시 접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은 것이 현재 내항만 시설의 모습이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은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의 물자 보급항으로 철저하게 활용했다. 반면에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은 전부 한국인으로 수탈의 아품이 담긴 시설물이다.


◩ 군산내항 부잔교 뜬다리(浮棧橋)
• 소재지 : 군산시 장미동 내항

옛 군산항의 내항 풍경은 상처로 각인된 아픔의 역사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식된다. 개항 10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1930년대의 시대적 풍경이 남아 있다. 뜬다리는 부두에서 폰툰(pontoon : 물에 뜨도록 만든 상자형의 부체)을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철근 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깔아 여객의 승하선 화물의 적양에 편하도록 만든 구조물로 푼툰을 해저에 고정시키고 그 위에 설치한 간이 부두로 조석간만의 차가 큰 곳에서 많이 이용된다. 일제는 물때에 관계없이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에 반출하가 위해 1899년 군산항 개항이후 3천 톤급 배 4척을 동시에 접안하여 자유로이 아래위로 움직이는 4기의 다리를 만들었으며 현재 세 곳의 뜬다리 부두 시설이 남아 있다. 황해안은 수심이 얕고 간만의 차가 커서 갯벌이 발달하였는데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었다.


◩ 구 군산세관본관(현 호남관세전시관)
• 소재지 : 군산시 장미동 49-38
• 시도기념물 제87호(1994.08.10)

또 하나의 근대 건축물인 군산세관이 자리하고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을 나와 오른쪽에 있다. 군산세관 구청사는 1908년(순종 2년) 6월에 대한제국 예산으로 지어진 단층건물로 면적은 228.10㎡(약69평)이다. 이 건물은 독일인에 의해 설계되고 벨기에서 적벽돌 등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유럽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45년 해방까지 군산지역을 일본인의 조차지로 정하고, 전쟁물자를 수탈하는 전진기지로 활용 당한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본관건물만이 남아 있으며,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외부는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내부는 목조이고 지붕은 연와조 동판금으로 되어있다. 지붕 위엔 3개의 뾰족한 침이 솟아있다. 창문틀은 본래 목재였으나 지금은 외부에 알루미늄 창을 달아서 이중창의 형태를 취하고 화려한 내부조명, 벽난로 등을 설치한 흔적들로 미루어 연회 등 화려한 행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1993년 11월 26일 신 청사를 지은 후 건물상태가 낡아 철거하려 했으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전라북도 문화재 전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1994년 8월 지방기념물 87호로 지정되었다. 국내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1) 구)군산세관 본관 2) 한국은행 본점 3) 서울역사 등 3곳

 

 

[군산4]일본식사찰 동국사와 해망굴 지역

 

◩ 해망굴(海望堀)
• 소재지 : 군산시 해신동
• 등록문화재 제184호(2005.6.18)

일제강점기 군산항의 제3차 항구 구축 공사 기간이었던 1926년, 명치통(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현재 해신동으로 통합)을 연결하고자 만든 높이 4.5m, 길이 131m 반원형 터널이다. 당시 이 지역은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인근에는 군산신사와 신사광장(지금의 서초등학교), 공회당, 도립군산의료원, 은행 사택, 안국사(지금의 흥천사) 등이 있었다. 6·25전쟁 중에는 인민군 부대 지휘소가 터널 안에 자리하여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해망굴을 통과하면 해망동 마을이다. 해망동은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마을'이란 뜻으로 월명공원과 바닷가 선창사이 산비탈에 들어선 마을로 마치 다랭이논처럼 집들 을 층층이 쌓아놓은 것 같은 동네(1길~3길)와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길이 이어진다.
이곳에는 해방 후 피난민들이 하나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수산업과 합판산업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활기를 띄었다고 하는데 자연재해 위험지구로 지정돼 지금은 철거를 앞두고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다.
방문 당시 산비탈 자락의 집들은 창문이 뜯겨져 나가고, 천정이 뻥 뚫려있는 등 철거되기 일보직전으로 개발 문제로 고민하는 군산의 또다른 모습을 볼수가 있다.
한때 이곳은 공공미술 사업으로 벽화가 유명하였으나 관리 소홀로 마을을 더욱 올씨년스럽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속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에게 있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저 한낱 바람 같은 존재일 뿐이며 희망이란 말도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 동국사(東國寺)
• 소재지 : 전북 군산시 금광동 135-1
• 등록문화재 제64호(2003.07.15)

동국사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일단 위치부터가 독특하다. 보통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깊은 산 속 암자처럼 위치해 있는데 이 동국사는 군산시내 한 가운데에 버젓이 존재한다. 동국사는 1913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 대사(內田佛師)에 의해 금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모든 건축자재를 들여와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주요 건물은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다.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을 많이 달았고, 우리나라의 처마와 달리 처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특징을 하고 있다. 금강사는 해방 후에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사찰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특히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동국사의 입구에는 누렇게 때가 낀 대리석 대문기둥이 서있는데, 기둥양편에는 금강사(錦江寺)라는 옛 사찰의 명칭과 소화 9년(1934년)이라는 음각기록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 시멘트로 글씨를 지우려는 흔적이 있어 일본식 사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정서적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고까운 눈을 치켜뜨고 사찰 내로 들어가면 비석 하나가 눈에 띈다. 제목이 '참사문'이다.
우리 조동종은 명치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해외포교라는 미명 하에 당시의 정치권력이 자행한 아시아 지배 야옥에 가담하거나 영합하여 수많은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다. (…중략)이 참사문 비석은 패망 후 처음으로 일본인 스스로 한국에 세운 사죄의 뜻이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 땅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색채의 이 사찰이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이곳 군산에 남아있는 것이다. 동국사 역시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동국사로 들어서면 대웅전 건물이 보인다. 오른편으로 있는 건물이 요사채, 왼편에는 종각이 있다. 대웅전은 일본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인데 팔작지붕, 홑처마에 창문이 많고 처마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과 요사채는 복도로 이어져 있는데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려면 요사채를 지나야 한다. 내부에는 불상과 함께 동국사가 소유하고 있는 근대사 유물들도 만나볼 수 있다. 요사채 앞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요사채와 잘 어우러져 일본식 정원 특유의 느낌이 든다.한가지 더. 이 동국사는 시인 고은 선생이 출가한 절이기도 하다. 동국사로 가는 길목에 고은 시인의 작품들도 같이 만나볼 수 있으니 찬찬히 머물며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군산5]히로쓰가옥과 일본식주택들

 

◩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가옥)
• 소재지 : 전북 군산시 신흥동(군산시 구영1길 17)
•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2005.6.18)

달이 빛난다는 뜻의 월명(月明)동을 비롯 신흥동, 금동, 영화동, 명산동 등은 과거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당시의 가옥들이 많이 남아있어 100여년 쯤 전으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신흥동에는 커다란 일본인 주택이 있다. 일명 '히로쓰 가옥'이라 불리우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으로 일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당시에도 큰 규모였던 '저택'으로 현재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내부까지 돌아볼 수 있다. 삐걱이는 낡은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2층 창문으로 아담한 정원을 내려다보니 마치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 기묘한 느낌마저 든다.
이 주택은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의 유명한 포목상으로 부를 쌓은 일본인 히로쓰가 건축한 2층의 전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가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진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놓여 있다. 1층에는 온돌방, 부엌, 식당,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일식 다다미방 2칸이 있다.
이 주택은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의 촬영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3호 ‘군산 신흥동 구히로쓰 가옥’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8월 21일 현재는 군산 '신흥동 일본식가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사택
• 소재지 : 전북 군산시 금동 82
• 군산시향토문화유산 제17호

1935년 당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지점장 사택으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형태는 건물 40평과 대지 95평의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으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쪽에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고 일본건축양식인 겹처마를 이루며 쓰기 목재의 현관과 복도를 따라 6개의 방과 욕실, 창고,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특색 있는 점은 건물 내부에 우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그 물은 근처 백화소주공장에서 나오는 물과 한 줄기를 타고 내려와 물이 차고 깨끗하다 한다.
이 건물은 소유주가 거주하기에 보존상태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 있어 ‘아홉살 인생’ 등 많은 영화촬영이 있었으며 근대건축물과 근대문화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 여러 잡지사에서 다녀간다고 한다.
군산시 유형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이지만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 보기가 쉽지 않다.

 

 

[군산6]군산의 이모저모 정보 보따리

 

◩ 군산의 근대역사체험공간 고우당(古友堂)
• 소재지 : 군산시 월명동 16-1(구영5길 20) 063-443-1042

군산 근대역사체험지구인 월명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곳이며, 아직도 동네 인근에는 일본 매점과 대포형 정종 주점 등 일제 시대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군산시는 근대문화역사도시 조성사업의 하나로 2012년 늦가을, 월명동에 근대역사체험공간 ‘고우당(古友堂)’을 열었다. 고우당은 ‘곱다’라는 뜻의 전라도 방언인 ‘고우당께’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오랜 친구의 집’이라는 아름다운 뜻을 가진 곳이다. 또한 이 곳은 일제시대, 나라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고자 만든 공간이기도 하다. 2013년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우수 숙박업소 ‘굿스테이’로 지정됐다.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초원사진관
• 소재지 : 군산시 신창동 1-5번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수많은 영화 팬에 의해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힌다. 극의 배경은 서울 강북의 어느 허름한 동네를 상정했지만 정작 이 작품의 80% 가량이 군산시 월명동 일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그중에 한곳이 초원사진관. 사실 내막은 촬영을 위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커피한잔 마시며 쉬자고 앉았던 커피숍 창문으로 낡은 차고가 보였고 주인에게 사정설명 후 사진관으로 개조해서 촬영했는데 영화촬영이 끝난뒤에 폐쇄되었다가, 근대역사관광지 조성을 하면서 영화관으로 다시 부활시켜 군산시청에서 관리(할아버지 한분 상주)하고 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
• 소재지 : 군산시 중앙로1가 12-2 (중앙로 177) 063-445-2772

이성당은 1945년부터 영업해 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해오던 양과자점을 현재의 주인 시백부씨가 인수하여 해방직후인 1945년부터 60년이 넘게 분점도 없이 운영되는데 군산에서는 마치 성지와 같은 빵집이다. 이성당 빵중에서 가장 인기인 빵은 부드러운 팥 앙금을 넣은 쌀단팥빵인데 65년 전통의 맛을 고수하고 있어 줄을 서 기다려야 맛을 볼 정도다. 그것도 1인당 3개로 제한돼 있다. 이는 야체빵도 마찬가지. 또 이성당에서는 사시사철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팥빙수도 인기 메뉴다.


◩ 군산 토박이들이 가는 밥집

주말에는 1시간을 줄 서 기다려야 짬뽕 한그릇을 맛볼 수 있는 복성루 등등 누리꾼들이 올린 '군산 맛집' 소개 글을 보고 외지 여행길들은 군산을 대표하는 음식점으로 알고 몰려오지만 실상 군산 토박이들은 잘 가지 않는단다. 누가 줄 서 기다려 먹느냐고.
군산 토박이들이 가는 식당은 그저 평범한 식당이다. 실제 점심을 한주옥에서 꽃게장백반(12,000원)을 먹기 위해 갔더니 단체 손님으로 꽉차 자리가 없다. 군산 토박이가 소개해준 식당을 찾았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길 건너편 주차장 앞에 있는 만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