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9일 안양기억찾기 탐사대의 27차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안양 박달동 군용지(軍用地)와 박달초교 인근, 안양고 앞 박달2동 산자락에 있는 주택가 골목길입니다.
박달2동 삼봉천을 따라 수리산 골짜기 안쪽은 그야말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같은 곳으로 이곳을 군용지라 부르는데 산악 분지형에 보안 및 방호에 유리하고 시설 배치에 필요한 공간 확보는 물론 주둔지로 적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입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모두 12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차 안양분창' 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1941년 일본 육군성에 의해 군용지로 강제 수용 당하면서 모두 쫓겨납니다.
시흥현읍지(1899) 능묘조, 시흥군지, 영월엄씨세보(世譜) , 안양시지(安養市誌) 등의 기록을 보면 군용지는 묘자리로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조선 태종(太宗)의 일곱째 서자(어머니 덕숙옹주 이씨(德淑翁主 李氏)인 후령군 이간(厚寧君 李衦, 1404∼1455)의 묘가 이곳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군용지가 조성되면서 1941년 2월 22일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산 19번지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天曹郞에 임명돼 노왜적 수천병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구만의 묘와 숙종 34년(1708)에 族閭를 내려 세윤 비각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 10(1632)에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총관(副摠管)등을 역임한 엄황(嚴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이란 이가 이곳에 묻혔었는데 군용지가 개설되면서 화장되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1625년(인조 3) 사간(司諫)을 거쳐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했던 엄성 (嚴惺) 선조 8(1575)∼인조 6(1628)의 묘도 이곳에 있었다고 하네요.
마을을 통째로 옮경야 했으며, 선조들의 묘까지 이장토록 할 정도였으니 군용지는 그야말로 군사 요충지로 면적만도 23만677평에 달하는 방대한크기입니다.
안양 원로이신 '변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는 2차 대전 때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으며,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고 합니다.
안양에는 비행기 공장도 있었습니다. 1944년 조선직물(이후 금성방직-대농) 공장에서 비행기 조립응 시작해 시제품 2기를 생산하고, 현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도 시작하다가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해방되면서 중단되지요.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안양은 일제의 전투력을 뒷받침하는 전투기지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합니다.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미국 문건(인터넷에서 검색) 보면 1860년대 한국내 '핵탄두 저장소' 들이 있었고 그중 한곳이 '안양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박달동 군용지로 지금은 없어진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부대)에서 이곳을 관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그 부대에 전령으로 근무하던 '닐 미셜로프'가 찍은 사진(헬기 안)을 설명한 글을 보면 내 발 앞에 핵탄두가 있다고 써 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군용지와 미군에 얽힌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만안초교) 다니던 무렵 안양여고에서 박달리로 가던 길이 흙길이었는데 하교실에 가끔 미군들이 대형 트레일러에 미사일(나이키, 허쿨리스)을 싣고 가던 모습을 목격했었지요. 차량에 타고 있던 미군들은 간혹 사탕과 쵸코렛을 던져 주기도 했는데... 어쩌다 처음보는 것을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노란색에 검정글씨(기억이 안나요)가 찍혀있는 과일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보여드렸더니 "이건 귀한 미깡(귤)"인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미깡은 당시 우리네 시장에서는 볼 수도 없던 것이었지요.
미군이 주둔하던 군용지는 1970년 후반부터는 우리 군 부대시설들이 줄줄이 자리합니다. 이 일대는 평지만 면적이 9만3천여㎡(8만2천평)에 달하는데 기존 군 시설외에 육군의 군 부대시설과 서울시민들을 위한 예비군 훈련장이 현재까지 자리하고 있지요.
안양시는 한때 이곳 군용지를 공업지역 조성을 추진합니다. 지난 1994년 박달동 군부지의 대체공업부지를 전제로 호계 1.2동과 안양 7동 일원을 공업 및 준공업지역에서 주거용지로 변경한 '2011년 도시기본계획'을 수립 승인받았으며 '2016년 도시기본계획'에서 호계2동 16만4천여평을 주거용지로 용도변경했으나 2001년 국방부와의 협의에서 부대 이전계획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지요.
오히려 군용지에는 새로운 군 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국방부는 2008년 12월 정보사의 안양이전 결정을 발표한 것이지요. 이에 박달동주민들은 "지난 60여 년간 군부대로 인해 보행권(어린이, 노약자, 학생), 환경권(사격장 총성, 군차량 통행 소음 및 매연), 재산권 침해(군사보호시설 구역의 행위제한), 지역개발의 낙후성(건축물 행위제한 등) 등의 피해를 보며 살아왔다고 2010년까지 이전 반대운동을 벌였었지요.
히지만 안양시, 정보사, 지역주민들이 민·관·군 협의체를 구성하여 '주민지원사업 협약' 을 체결하고 현안 문제를 타결토록 하면서 정보사 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지요.
현재 정보사령부 건설 공사가 한창이지만 최근에는 정보사 진입도로 확장에 따른 각종 이해 관계로로 삼봉마을 주민들이 반발하는 등 진통은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박달’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현재 채록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박달’은 ‘밝다’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즉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2) 박달은 ‘박치기’에서 알수있듯이 ‘머리’에서 파생되었다. 예를들면 머리산,높은산 등이다
3) ‘달풀 이 있는 바깥 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은 가장 최근에 조사된 견해다.
4) ‘박달’의 의미는 안과 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전엔 이곳이 달동네였는데 안양의 중심부에서 볼때 밖이라고 하여 ‘밖 달동네’라고 불렀고, 그후 ‘박달동’이 되었다.
그러나 ‘박달’이란 명칭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도 여러 차례 변천하여 그 유래가 깊다.
‘박달리(博達里)’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조선 정조대이다. 그후 1963년 1월1일에 시흥군 안양읍 박달리가 만들어지고 그이듬해 박달1,2리로 분리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안양시로 승격하면서 ‘박달동’이 되었고, 1994년 7월 1일에 ‘박달1동’ , ‘박달2동’으로 나뉘어졌다.
박달동의 유래에 대한 주민들의 구술 내용은 이러한 행정구획 변천 외 역사와 부합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조선시대부터 ‘박달’이란 명칭을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모른채, 안양 중심가에서 벗어나 있는 현재의 지리적 위치에 따른 해석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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