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동네탐사

[탐사2]안양9동(1) 새마을 골목길 풍경(2013.02.09)

안양똑딱이 2017. 5. 16. 00:23

 

02차(2013.2.09) 안양9동(1) 새마을 골목길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몇년후에는 사라질 안양9동 새마을(병목안) 골목길 풍경으로 아직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입니다.
새마을은 안양역에서 삼덕공원을 지나 담배촌과 창박골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주민들이 농사를 지을 농경지로서 처음에는 신부골(新富谷)로 불리워 오다가 1969년에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로 개칭되었지요.
1977년 안양 대홍수때는 산자락이 무너져 내리고, 수암천변의 주택들이 물살에 쉽쓸려 내려가면서 이곳에서만 수십여명의 주민들이 숨지는 아픔도 있었지요.
새마을 안쪽으로 서쪽 끝자락에는 초등학교가 있는데 1988년에 설립한 양지초등학교입니다.
자료에 의하면 시흥군 안양읍 당시 이곳에 안양공설운동장 설치 계획을 세웠다가 협소하다 하여 신안양리 신촌(현 석수동 럭키아파트 자리)에 조성되었다가 다시 안양 비산동에 새로 조성되어 이전되었지요.
참고로 안양9동은 지형적으로 병목안을 기점으로 서쪽지역을 새마을, 서남쪽 지역을 창박골, 남쪽지역을 담배촌이라 칭합니다. (예전에 3동이었는데 분동이 되면서 쪼개졌지요. 그래서 9동이 1~8동 다음에 있는 줄 알고 8동의 성결대 인근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찾아가는 분도 가끔 있습니다- 장내동, 명학동, 냉천동, 교하동, 시대동.... 등 옛지명이 그립네요)
병목안은 안양3동 프라자아파트 끝인 새마을교에서 담배촌과 창박골로 갈라지는 삼거리의 슈퍼까지의 지역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後頭尾洞)라 칭했고,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동으로 불리웠습니다.
병목안은 말 그대로 병모가지 안쪽같다는 뜻에서 생긴 말로 정확히 말하면, 양지 초등학교 입구 새마을교부터 시작되어 통통한 병 모양으로 뻗어 오르다가 좌로는 채석장(병목안시민공원)에서 우로는 창박골 입구 삼거리수퍼까지로 마을에 들어서면 골(谷)이 깊고 넓다고 하여 불리워져 왔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삼거리슈퍼 앞 삼거리를 병목안 삼거리라고 하고, 보신탕 집이 쭈욱 있는 수리산 계곳을 병목안 골짜기라고 하지만 사실 담배촌계곡이라 해야 맞습니다.)
안양 토박이 임부성씨 기억에 의햐면 병 목에 해당하는 새마을 입구에는 사람과 우마차와 도라꾸가 다니던 나무 다리가 있다가 나중에 시멘트다리로 발전했는데 그 방향이 지금의 외환은행 간이점포 방향이었고, 또 다른 다리는 채석장행 철교(철길)로 그 위에 콘크리트 복개가 되면서 차와 사람이 다니고 있는 것이지요.
담배촌은 창박골과 갈라지는 시민체육공원앞 삼거리수퍼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약 100여미터 가면 수리산 한증막이 있고 다시 10여미터 쯤 가면 오른쪽으로 돌아 다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산에 '문둥바위"가 있던 이곳부터 최경환성인 성지와 공군부대 앞까지 이어지는 수리산 계곡을 말하지요.
안양 토박이 임부성씨는 예전에는 담배촌도 안골, 굴뚝골, 햇골, 송챙이골, 담배촌, 작은골, 큰골, 웃말 등으로 나뉘어 부를만큼 그 골이 아주 깊었다고 합니다.
담배촌이라 불리운 유래는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崔良業, 1821-1861)의 아버지 최경환(崔京煥 , 1805.10.15-1839.9.12)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조정의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1837년 7월 이곳에 정착 이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담배를 경작했다고 하여 칭합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한강 이남에서는 담배촌에서 재배한 담배를 일등품으로 칠만큼 품질이 우수했다고 하는데요. 예전에 담배촌 주민들은 담배 경작 외에 땔나무와 토종꿀을 채취해 이를 안산장(시흥시 수암동), 군포장(호계3동 구 군포), 안양장(안양1동 시 대동) 등에 팔아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6.25한국전젱 당시 담배촌에는 인민군의 본부가 주둔했을 만큼 수리산지역은 중공군, 북한군과 유엔군사이에서 엄청난 결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2010년 5월부터 육군 51보병사단은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전쟁사]한국전쟁 수리산전투(1951.2.1-2)
한국전쟁 당시 수리산 전투는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이 1951년 1월 25일부터 재반격 작전을 전개하여 한강 남안으로 진출하고 있을 때, 미 제25사단 제35연대와 터키여단이 수원 서북방의 수리산을 공격하여 중공 제50군 예하의 제149사단을 격퇴하고 수리산으로 진출한 공격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35연대와 터키여단은 미 제999포병대대와 미 제89전차대대의 지원하에 수리산을 양익 포위하여 중공 제149사단의 거점을 공격한 끝에 완강히 저항하는 증강된 연대규모의 적을 격퇴하고 목표를 탈취하였으며, 목표 탈취 직후 개시된 중공군의 역습도 물리쳤다.
이 전투의 결과로, 중공군은 수원 지역에서 물러나 안양 북방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유엔군은 한강선으로의 진격을 계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