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신 이용구 선생은 1926년생으로 제일교회가 창립된 1930년도에는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이였지만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생활과 안양의 당시 모습들은 눈썰미 있게 보아 두었다가 그의 책 '양지마을의 까치소리' 등을 통해 안양지역 사회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다. -편집자 주-
내가 나가는 안양제일교회 80년사(1930년~2010년)가 발간 되었습니다 여기에 투고한 글이 등재 되었기에 전기 하오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1030.5.17 창립)
1930년 당시 안양은 서울역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안양역을 중심으로 밀집된 곳에만 겨우 전깃불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밤이면 희미한 석유 등잔불만이 가물거리는 고장… 하루에 기차가 수회 지나며(단선운행) 서울~수원간 경수(京水)버스가 몇 대 지나던 촌락이었다.
행정 명칭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였다. 안양역 건물은 까만 기와지붕에 몇평 안 되는 성냥곽 만한 역사(驛舍)에 대합실과 개찰구와 집찰구뿐이었다.
역 앞 국도 건너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고, 그 주위에 수백 년 된 노향목(老香木 ) 두 그루가 안양의 내력(來歷)을 다 아는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 및에 두 개의 목로주점이 있었고, 역광장 구석에는 일본인 담배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철길과 평행하여 자갈길 비포장 국도가 남북으로 나 있었다.
역 앞 도로변에는 경찰관 주재소, 화물운송부(전 대한통운자리), 경수버스 정류장, 서이면사무소, 안양우체국이 인접해 있었고 좀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안양공립보통학교(현 안양초등학교), 북쪽으로 좀 떨어져서 안양철교 옆 *경성기독보육원(구 해관보육원→현 좋은집)과 그 반대편 안양천변에 일본인 오끼이(沖井) 농장과 야스에(安江) 농장이 있었다.
그리고 국도(國道)를 따라 좌우로 연이은 여러 상점과 몇몇 제법 큰 상점도 있었으나 그 외에는 평범한 초가와 그 사이 사이에 포도밭이 많았다. 5일과 10일에 서는 장날에는 촌사람 들이 모여들어 사고 파느라 들끓어 시끄럽고 매우 혼잡했다. 잡화와 우시장이 기찻길 건너~비산동으로 가는 안양천 다리 사이에 있었다.
또한 서이면사무소는 구조선 기와지붕을 가진 옛 *안양옥 자리이며 향나무와 버찌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조한구(趙漢九) 면장이 호계동 자택에서 출퇴근시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가 늘 벚나무에 매여 있는 것도 눈에 선하다.
늦은 봄에는 학교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 오다가 이곳에 들러 입이 검도록 버찌(벚나무 열매)를 따 먹느라 아이들이 모여 들었었다.
또한 춘추로 시행되는 우두(牛痘)를 맞느라 부모님을 따라간 일과 그때 겁에 질린 어린 아기들의 울음 소리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그 앞에 윤경섭(尹慶燮)씨가 운영하는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나려면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기고 코에 확 들어 오곤 했다. 그 옆 대흥관(大興館)에서는 장고 소리와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주민들은 대체로 유·불교 사상이 농후하고 미신을 섬겼다. 즉, 병이 나거나 복(福)을 빌 때에는 으레 무당굿, 푸닥거리, 무꾸리 등 미신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리가 먼 안양 땅에 천주교는 이조 말 대원군의 쇄국 정치와 천주교도 박해로 수리산 산속 깊숙이(현 안양9동 : 속칭 담배촌) 피신하여 집단 은거하며 화전을 일구고 담배 재배와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안양에는 아직 천주교당이 없어 인근 영등포와 수원지구 교당에서 년 2회 심방 전도로써 촌가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들었다.
안양의 최초 성당인 안양4동 625-75에 있는 중앙성당은 1954년에 설립되었다. 흔히들 천주교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말하길 ‘천작쟁이’니 ‘예수쟁이’라 부르며 마치 유교와 불교가 으뜸 가는 종교인양 비웃음과 천시(賤視)등 배타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이야기와 교회(당시 예배당) 종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니까 내 나이 5~6세 때였다. 우리집 마당에서 놀다 보면 어느 노파가 구름같이 나타나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발에다 흰옷을 입고 얼굴은 환하며 번듯하고 걸음걸이가 아주 느리고 점잖게 말도 없이 하늘만 쳐다 보며 걸어가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꼭 하나님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후 좀 커서 알고 보니 안양교회에 나가는 건너마을 정씨 댁 할머니 였으며 가끔씩 우리 집 앞을 지나 작은 아들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하여간 그때 나는 하나님을 자세히 몰랐지만 스스로 생각 하길 점잖고 정직하고 위엄이 있으며, 본능적으로 성인(聖人)으로 알고 섬기며 악행을 하지 않고 선행을 하면 죽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여 천당과 지옥으로 구별하여 보낸다고 들었기에, 기왕이면 천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어려서의 공통적인 우리 세대들의 순박한 마음이었다.
또한 내가 7~8세 때였다. 멀리서 ‘땡그랑 땡’ ‘땡그랑 땡’하고 예배당 종소리가 일요일과 수요일은 물론 매일 새벽 4시경과 저녁에 들려왔다. 예배당은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국도변(國道邊)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 남부시장 내에 있던 예배당은 학교 교실의 절반 만한 일자형(一字型) 집에 양철 지붕 이라고 기억된다.
예배당 옆에는 목재 종탑(鐘塔)이 있었고 가로수가 나지막하게 있었는데 도로변이라 항상 뿌연 흙먼지에 덮여 있었다. 이 예배당이 지금부터 80년 전에 세워진 안양리교회이고 현 안양제일교회의 모체이다.
그리고 내가 다섯 살 때 교회는 안양에 하나뿐 이고 안양보통학교가 4년제 여서 5~6학년 과정의 학생들은 이 교회를 강습소(講習所)란 이름으로 2~3년 사용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은바 있다.
*안양공립보통학교
1929.12.20 개교(4년제)/
1938.4.1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명칭 변경
1934.3 - 현 안양제일교회 이경수 원로장로 졸업(1회). 2010년도 93세
1940.3.2 - 6년제로 승격
*경성기독보육원
1919. 선교사요 의사인 오긍선 박사(1878~1963 / 충남 공주 태생) 설립
1949. 이승만 대통령 시설 3개동 기증/ 1950.6.25사변으로 가덕도로 피난
1952. 미8군단 45공병단 지원복구/ 1998. 해관보육원으로 개칭
2007. 좋은집으로 개칭(원장: 정어진 장로-덕장교회,평강교회 개척에 기여)
*안양옥
안양리 674-271번지, 현 경기도 문화재 제100호 기념물-안양시 소유,
1917.7.6~1949.8.14 면사무소로 사용
*조한구
일제 초부터 해방 전까지 서이면장, 안양면장 직을 밭아 안양 발전에 공이 컸음,
1952년 민선읍장 선거에도 당선
우리 동네 양지마을(현 안양3동)은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가와 품팔이를 하는 비농가였다. 그중 기독교 신자는 徐씨와 李씨 두 집안 사람 들이었다. 당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통속적인 개념 이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부유층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핍박받던 민족의 서러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래 보려는 사람들 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앞집에 사는 서병두(1933. 5 세례, 세례자 명부 등재)씨네 여섯 식구는 수리산(修理山) 에서 나무 장사와 철로 보수용 자갈 캐기, 혹은 품팔이 등의 생업으로 그날 그날을 가난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으나 늘 희망과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 웃음으로 꽃피우며 단란하게 사는 것을 엿볼 수가 있었다. 또한 그 집은 밤낮으로 찬송가 소리가 그칠 날이 없이 울려 나왔고 남보다 더욱 근면해 보였다. 어느해 늦은 가을 그 집 장남이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따라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생후 처음 보는 교회 예식 이었다. 한복 차림의 신랑신부가 가슴에 만든 꽃을 달고 풍금 소리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고 주례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있었다. 종전에 많이 보던 재래식 혼인잔치 초례(初禮)상에 기러기 안고 올리는 혼례식 보다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또한 그 집에서 우리 집 까지는 좀 거리가 있으나 들려 오는 찬송가 중에서 똑똑히 들리는 구절이 “예수권세 많도다.”와 “날 사랑하심”이었다. 지금 찬송가를 찾아 보니 563장 찬송이 그 가정의 주제가 였다고 보아진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듣거나 부를 때면 75년 전 내가 성장하던 아득한 옛 어린 시절에 뛰어 놀던 마을의 산과 들이 생생 하게 떠 오르고 이웃들과 정다웠던 옛 추억이 그립다. 또한 서씨댁 누님 서정희「60년사」.p 89. (1938년 11월 세례. 세례자 명부 등재)씨는 나의 두 누님과 연배 인지라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며 은연중 하나님 이야기와 찬송으로 완고한 우리 집에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유·불교 신봉자인 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누님들은 점점 감화(感化) 되어 아버지 몰래 찬송가를 같이 불렀다. 나도 어깨 너머 공부로 누님 따라 뜻도 모른채 불렀다.
어느 해 여름밤 이었다. 두 누님이 서씨 누님을 따라 북을 치며 동네에 들어온 밤 부흥 집회에 간 것이다. 눈치를 채신 아버지는 그날 따라 누님들을 찾으셨다. 그날 밤 늦게 귀가 하다가 그만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호된 꾸지람 으로 다시는 부흥회에 가지 못했으며 찬송가도 부르지 못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으나 당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봉건적 사상으로 혹시나 남녀간 불미(不美) 스러운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였다. 그 일로 그후 서씨 누님은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고 그후 서씨 누님은 가정 형편상 식구 모두 이사를 가게 되어 서운한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동네 기독교 신자인 이흠팽 씨댁 장례식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장지인 우리 마을 뒷산까지 따라 가서 장사 지내는 절차를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발인 때와 하관 할 때 목사님의 간곡한 기도와 위로의 말과 교인들의 적극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보았다. 상여로 운구 하였으며 상제들은 굴건제복을 하였다.
이것 또한 생후 처음 보는 기독교식 장례식 이었으며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 하였던가…… 지금도 생생하다. 종전에 보던 것에 비해 다른 것은 찬송가와 목사님의 기도가 특색이었다. 그때 통합 찬송가 291장 “날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의 곡조와 뜻이 어찌나 애절하고 슬픈지 마음에 파고드는 듯 느꼈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감격의 8.15광복을 맞이 하였고 공산당의 남침인 6.25사변을 겪었다. 처참한 골육상잔의 쓰라림을 몸소 겪음 우리 대소가(大小家)와 동네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만세 전에 택 하심으로 우리 형제자매 중 4명이 교회에 나가 주님을 믿게 되었으니 아마도 서정희 누님이 뿌린 씨앗으로 싹이 아닌가 생각 되며 그저 감사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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