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자료]수리산과 모락산의 역사

안양똑딱이 2017. 3. 27. 21:40

경기 수리산과 모락산의 역사(월간산 2001년 6월호)
수리산(修理山)-태을성 초제를 지내던 독수리 형상의 산

경기도 안성의 칠현산에서 맥이 북으로 뻗어가서 용인의 보개산, 수원의 광교산을 지나 서쪽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수리산의 山經이다. 경기도 안양시·군포시·안산시의 진산이며, 안양·군포·안산·시흥의 네 도시가 접경하는 해발 474.8m의 산이다. 비운의 임금 단종이 사냥을 했을 만큼 그 옛날엔 숲이 무성하고 산짐승이 많았던 산이다. <단종실록> 2년 10월 1일 기묘일조에, "임금이 보천리에 이르러 낮 수라를 들고 수리산(修理山)에서 말을 몰아 사냥하였다. 해질 무렵에 과천에 이르러 비을매리(飛乙每里: 지금의 안양 비산동 추정)에서 거가(車駕)를 멈추었다."고 이 때의 일을 기록하였다.
주변이 도심으로 바뀌고 아파트 단지가 밀집되면서 수리산은 도심의 귀중한 초록공간(숲)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산본·평촌·안양 등 수도권 남쪽의 도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코스가 되었다. 수리산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488m의 봉우리지만, <우산시고> <과천읍지> <조선지지자료> 등에서 보이듯 예로부터 수리산과 태을산(태을봉)을 구분해서 불렀던 분명한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에, 사실상 수리산의 최고봉은 현재 공군통신시설이 설치된 슬기봉(474.8m)이 합당할 것 같다. 1843년에 만들어진 <과천현읍지>에도 "수리산은 과천 고을 남쪽으로 25리에 있는데 일명 견불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태을봉은 과천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修理山在縣南二十五里一名見佛山, 太乙峰在縣南二十里)"고 기록하였다.
수리산은 또한 현재의 태을봉, 관모봉, 수암봉, 슬기봉을 모두 통칭하는 산이름으로도 인식되었는지, <광주부읍지도> <광주부고지도> <영조년간 광주고도> <팔도지도> <팔도군현지도 광주첩> <해동지도 안산첩> <대동여지도> <청구도> <동람도> <경기도 37관도> <조선전도> <경기고지도> <여지도> <대동지지>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지> <해좌승람> <1871년 동판수진일용방> <경기38관도> <팔도전도> <해동도> <천하여지도 경도첩> <광주목읍지> <동여도> <총독부 조선지형도> <조선지지자료-1918년> 등 조선조의 무수한 지리서와 사서, 고지도에 모두 수리산(修理山)만 대표명으로 기록하였다. 또 <동여비고> <대동여지지 안산조> <과천읍지> <산경표>에는 수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 견불산(見佛山)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윤형두씨가 소장한 <첩역지도>에는 유일하게 수리산의 기록이 없고 견불산의 기록만 보인다. <산경표>에는 "서북쪽에서 뻗어와 안산 관아(옛 치소)의 서쪽 1리에 있는 것이 수리산인데, 광주에서 서쪽으로 60리에 있고, 과천에서 남쪽으로 25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정남한지>에는 "수리산은 광주 북쪽에 있는데, 과천 안산의 경계이다. 일명 견불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주맥은 수원의 광교산으로부터 뻗어온 것이다.(修理山在州北果川安山界一名見佛山主脈水原之光敎山)"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의 옛 기록은 지리적 인식이 부족하여 오기(誤記)를 남겼다. <중정남한지>의 저자 홍경모는 수리산을 실제로 가보지 못했는지, 엉뚱하게도 수리산이 광주의 북쪽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 시기의 광주관아는 남한산성 내 산성리에 있었으므로 방위적으로 전혀 옳지 않은 설명이라고 하겠다.
수리산의 기록이 많은 지리서와 고지도에 전해지지만, 그 중 이중환의 <택리지(팔도총론 중 경기편)> 가 비교적 이 산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산행의 참조를 위해 옮겨 적는다. "수원의 광교산으로부터 서북쪽에는 관악산이 있고 바로 서쪽이 수이산(修李山: 수리산의 또 다른 옛이름)이 되는데 서해에서 끝난다. - 광주목의 서쪽이 수이산인데, 안산고을의 동쪽에 있다. - 수이산 중 서쪽으로 뻗어간 것이 가장 짧은 산맥이며 안산 바다에서 그쳤는데, 서울의 높은 벼슬아치 조상들의 선산이 많다. 또한 서울이 가깝고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일로 부유하여 대대로 사는 사대부가 많다."
 <택리지>에 기록된 수리산(修理山)의 또 다른 옛이름인 수이산(修李山)을 근거로하여 일부 문중의 기록(전주 이씨)과 <수리사사적기>등에는 李氏 王孫중 한 사람이 이곳 수리산에 와서 수행했었기 때문에, '이씨(李)가 수행한(修) 산(山)'이라는 의미로 산이름이 자연스럽게 수이산으로 바뀌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산이름의 유래를 모르고 구한말과 일제 때 유포된 불분명한 지명이니 삼가야 할 것이다.
 <대동지지 안산군조>에 "수리산은 안산 고을 동쪽 5리에 있는데, 달리 태을산이라고도 말하고 또 견불산이라고도 말한다. 깍아지른 듯 높이 솟은 독수리바위봉이 있는데, 이 고장 방언으로 독수리를 일컫기를 수리라고도 한다(修理山州東五里一云太乙山一云見佛山頗峻高有鷲巖峰方言謂鷲爲修理)"라는 기록이 있는데, 수리산의 지리적 정보와 지명 유래를 가장 완벽하게 밝힌 탁견이라고 하겠다. 東國에서 가장 정밀하고도 정확한 고지도로 평가받는 대동여지도, 청구도, 동여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지지>의 저자이니, 사료적 정확성과 풍부한 지리적 이해는 새삼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김정호가 정확히 밝힌 수리산 지명 생성의 유래와 시원을 미처 알지 못했는지, 1995년 조계종에서 편찬한 <전통사찰총서>에조차 안평대군의 후손이 왕위쟁탈의 참변을 피해 이 산자락에 은신했었기 때문에 수리산 기슭에 살던 동민들이 산이름을 '수이산'으로 불렀으며, 지금의 '수리사' 자리에서 안평의 후손들이 수행 중 부처님을 親見했다고 전해져서 또한 '견불산(見佛山)'이 되었다고 유래를 밝혔다.

수리산은 북쪽의 태을봉 정상과 관모봉, 남쪽의 슬기봉 정상, 그리고 서쪽의 수암봉으로 크게 구분한다. 그 중 '슬기봉'은 도처에 '응봉(鷹峰)' '매봉'이란 산이름이 산재하여서 서로 구분을 못하고 村民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염려하여, 韓末의 처사 정갑성이 '솔개봉'으로 命名한 것인데, 익산의 고가에 선생의 관련 기록들이 있다. 아마도 수리산의 형세가 마치 독수리나 솔개가 날개를 편 모습을 닮았다고 인식하여 솔개봉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산이름이 널리 유포되면서 음이 차츰 변해 슬기봉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갑성은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자 읽던 과시책(과거준비를 위한 책)을 모조리 불사르고, 향촌사람들과 양주 도정암에 은거하면서 척왜항병을 도모했던 剛氣의 처사였다. 그러나 거사가 발각되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팔도 산천을 주유하며 은거했는데, 이 시기에 수리산을 다녀가면서 솔개봉이란 지명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솔개봉은 수리산의 최정상(474.8m)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곳에 공군통신시설이 설치되어서 출입이 어렵게 되자, 바로 아래 위치한 429m의 봉우리를 대신하여 현재 슬기봉으로 부르고 있다.
일부 산악단체에서 태을봉 인근의 426.3m의 산을 '관모봉(冠帽峰)'이라고 주장하고 정상에 푯돌까지 세웠으나, 이는 옛 지리서나 고지도에 입증할만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갓을 쓴 형세로 산봉우리가 높이 솟은 모양을 본따서 근년에 이지역 산악인들이 명명한 산이름으로 추찰된다.
수리산의 북쪽에 있는 최정상 태을봉에도 산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있는데, 이봉우리의 유래를 안양천과 수리산의 형세가 마치 산태극 수태극(山太極 水太極)과 같아서 태을풍수의 명당처로 꼽히며 산이름이 자연 태을봉이 되었다고 지역에서 발간된 책자에 밝혔다. 또 다른 책에는 太乙仙人이 살만한 땅이어서 태을봉이 되었다고도 전하고, 심지어 태을주문을 외는 태을교도들이 한때 이 산기슭에 살았었기 때문에 태을산이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모두 산이름의 역사성과 유래를 혼란스럽게만 하는 허언일 뿐이다.
옛사람들은 천일(天一)·태을(太乙)은 부귀(富貴)의 본원이고, 천록(天祿)·천마(天馬)는 부귀의 임용(任用)이라 하였다. 태을(太乙)은 태일(太一)괘와 같은데, 우주의 본체로, 천지 창조의 혼돈스런 기운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사회의 경제적 근간은 농업이었기 때문에 적절한 기후와 강우량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조정에 관상감(천문과 역법서로 기후를 예측하고 그 정보를 알리던 관청, 요즈음의 기상청)을 두고, 음양가들이 말하는 하늘 북쪽에서 병란, 생사, 천재지변을 주관한다는 신령한 별; 태을성(太乙星)을 잘 살펴서 태을점(太乙占)과 태을수(太乙數)를 읽게 하였다. 실록에 나오는 태을과 관련된 기사는 이렇다.
 <태종실록> 15년 7월 8일 계묘일조에, 왕이 비를 근심하기를 심히 하여, 황자후로 하여금 태을 초제(太乙醮祭)를 행하게 하였더니, 과연 비를 얻었다. 왕이 태을편(太乙篇)을 강구하다가 병으로 끝내지 못하였다. <세조실록> 4년 5월 4일 경인일조에, "천운이 고르지 못하여 금년의 가뭄은 또한 전년보다 심하여 봄부터 비가 부족하고, 지금 5월에 이르렀는데도 논에는 모가 없으며, 타버린 땅이 천리나 되니, 만약 1, 2순(旬) 안에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옛날 송나라 인종이 친히 태을궁(太乙宮)에서 빌으니, 하늘 위로 구름 기운이 일어나 향연(香煙)과 같더니 번개와 비가 크게 왔다고 합니다." <성종실록> 7년 8월 29일 기해일조에,‘방위(方位)를 헤아려보니, 강화 마니산(摩尼山)은 태방(兌方)이고, 충청도의 태안이 진실로 곤방(坤方)이므로, 태일성(太一星)의 제사는 태안군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태을봉의 유래를 짐작 할 수 있듯, 태을봉은 기우제(祈雨祭)와 관련이 깊은 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라 안에 가뭄이 심해지면, 조정에서는 태을성을 잘 살펴서 하늘의 기운과 교접하는 방위의 땅을 찾아가 기우제를 지냈다. 아마도 수리산의 태을봉에서도 어느 시기엔가 조정이 주관하여 기우제(태을성 초제)를 지냈는데, 과연 이 때 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영험한 산으로 강렬하게 인식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이 입으로 전해지면서, '태을성 초제산'이 차츰 태을산으로 축약되어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에는 역법서가 광범위하게 유행하면서 태을성 점이 조정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까지 성행하게 된다. 따라서 태을법을 빙자하여 天命을 받았다고 변란의 명분을 내세우며 역모를 꾀하기도 하는데, <숙종실록>에 관련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 구한말에 일제히 태동하는 태을교, 태을선인교, 증산교 등 신흥종교 역시 사상적 뿌리를 바로 이 태을역법에 두고 있다. 태을성 초제는 마음과 몸을 정결하게 하여 길상한 땅에서 우주의 기운을 살피고 하늘의 감응을 간절히 축원하는 제사로, 무당들의 푸닥거리나 마을단위의 산신굿과는 그 격이 달랐다. 그래서 임금이 태을성 초제를 준비하는 시기에는 대간들과 문무백관이 국사를 아뢰는 일조차 조심하고 삼가 하였던 것이다.
 <세종실록> 1월 11일 24일 갑자일조에, '대간이 궁궐에 나아가서 청하기를,“종무는 죄의 우두머리인데, 벌이 가벼우니 국가 만대의 법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하니, 윤회가 오늘은 태을성(太乙星) 초례(醮禮)의 재계(齋戒) 날이므로, 감히 아뢰지 못한다고 말하여, 대간이 물러갔다. 그때 의정부와 육조에서도 아뢰어야 할 일이 있어 궁궐에 나왔다가 물러가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기록을 통해 고찰해본다면 태을봉은 결국 '태을성 초제'에서 지명이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수암봉은 '빼어난(秀) 기암절벽(岩)' 때문에 이름이 생성되었다고, 안산지역 자료에 기록되었는데, 이 보다는 필자가 이미 앞에서 인용한 김정호의 취암봉(鷲巖峰: 독수리 바위 봉우리)이 지명의 뿌리로 합당한 것 같다. <동여비고>에도 고산자 김정호와 필자의 견해를 입증해 주려는 듯 취암(鷲巖)이라는 기록이 있다. 취암을 뜻으로 풀어 수리바위라고 불렀는데, 이를 일제 때 쓰기 쉬운 한자로 개명하면서 편의대로 수암(秀岩)이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 고찰하지도 않고 일부 관공서에서 일제식 지명을 기준으로 유래를 밝히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다. 수암봉과 관련된 태종 때 실록의 기사가 전해지는데, <태종실록> 8년 12월 5일 무인일조에, "경기도 안산군의 수리산(修理山)에서 큰 바위가 무너졌는데, 길이가 30척이고 너비가 25척이었다."고 하였다. 이미 이 시기에도 수암봉을 상서로운 산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산의 동태와 변화를 일일이 관찰하고 기록하였을 것으로 추찰된다.
필자가 소장한 모든 고문서와 고지도를 총람하여 수리산 일대의 지명을 의욕적으로 밝혔으니, 부디 이 산을 출입하는 등산객들은 앞으로 지명의 역사와 유래를 정확히 인식하여 바르게 불러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수리산을 청정한 도시공원으로 가꾸려고 혼신의 열정을 쏟는 수리산의 환경가족 한명숙 김유정 김숙정 한모연 씨에게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뜻을 전한다.

 *수리산을 찾아 가는 길
 지하철 안산선을 이용해 산본역, 대야미역에 내리거나 1호선 국철을 이용해 명학역 내려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명학역에서 산으로 이어진 서쪽 길을 따라 서 20분을 가면 성문여중고교가 나타난다. 학교 앞에서 등산로를 따라 다시 25분을 오르면 해발 426.3m의 관모봉 정상이 되는데, 길은 매우 급경사여서 출발부터 힘이 버거울 정도다. 기념비가 서있는 관모봉 정상은 넓은 공터여서 전망이 아주 좋다. 관모봉에서 주능선을 따라 다시 25분을 더 가면 해발 488m의 태을봉이 된다. 이곳 역시 전망이 좋은 공터인데, 태을봉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태을봉에서 남쪽 주능선을 따라서 45분을 종주하면 산본아파트 단지 위에 우뚝하게 솟은 해발 429m의 슬기봉에 닿는다. 슬기봉까지의 능선길엔 바위들이 기묘하게 솟았다. 슬기봉에서 공군통신시설의 철책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임도로 연결되는 산길인데, 슬기봉에서 임도까지는 35분 거린다. 임도에서 넓은 산판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다시 40분 거슬러 오르면 <대동여지지> <광주목읍지> <대동지지> <중정남한지> <안산읍지> <대동여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수리사에 닿는다. 절에서는 연혁을 신라 진흥왕때 수리사가 창건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문헌조사와 지표조사를 한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다. 사찰 주변을 필자와 한백 역사문화연구회에서 살펴보니 고려말과 조선조의 도자와 와편이 대부분이었다. <태종실록> 13년 5월 25일 계묘일조에, "과주(果州: 과천의 옛이름) 수리산(修理山)이 무너져 중 3명과 비구니(여승) 1명이 압사(壓死)하였다."는 이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태종년간에는 법등이 이어졌던 것 같다. 수리사에는 샘이 있어서 식수 보충이 가능하다. 수리사에서 50분간 다시 산을 서북쪽으로끼고 돌면 우람한 바위산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수암봉이다. 수암봉 아래에는 안산의 옛관아터와 고려말 왜구의 침입을 막던 연성, 그리고 곽재우가 다녀갔다고 전해지는 수월암터가 있다. 수암봉에서 동쪽으로 하산하면 안양시 창박골인데, 골짜기를 산이 에워싸 마치 호리병 속에 들어온 것만 같다. 수암봉에서 창박골 버스정류소까지 하산 시간은 70분 정도 걸린다.
관모봉에서 슬기봉까지는 군포 안양시에서 이정표를 부착하여 산행이 편리하다. 태을봉 수암봉 정상에서는 맑은 날에 서울 여의도 북한산과 서해 바다의 낙조까지 감상 할 수 있다.

 *갈산(葛山)-도성과 수원·三南 통행로의 경계를 이루던 산
 경기도 의왕시와 안양시 사이에 솟은 갈산(해발 385.2m)은 수리산과 함께 수도권 남부의 도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코스인데, 현재 모락산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동여도, 청구도, 대동산경, 광주부고지도, 팔도군현지도, 해동지도에 모두 갈산으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모락산의 옛이름이 갈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락산이란 산이름의 의미는 '모자(帽)가 떨어진(落) 모양의 산(山)'에서 온 것인데, 산의 전체적인 모습이 마치 모자를 눌러 쓴 것 같다고 하여서 산이름이 생성된 것이다. 일부 고지도에는 이 때문에 갈산을 관산(冠山: 갓모양의 산)이라고도 기록했다.
또 달리 몰압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산 주변의 촌민들이 모락산의 동굴에 피신한 사실을 왜병들이 알고는 굴에 불을 질러서 죽였다는 얘기가 후대로 구전되면서 얻어진 이름 같다. 왜병이 촌민들을 '몰아 죽인 산'이 축약되어서 몰압산이 되었다는 주장인데, 입증할만한 史書나 古地理書의 기록을 찾을 수 없어서 확신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산의 남서쪽 바위절벽지대에서 큰 자연암굴이 발견되어 관련 사실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산은 비록 작지만 청계산과 수리산의 산경(山經)이 연결되는 중요한 위치여서 옛부터 산아래 역원이 설치되었었고 정상부에 축성을 하여 통행로를 관리했는데, 성터의 일부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갈산은 도성에서 三南지방과 수원으로 출입하는 통행로의 길목에 위치하였고, 청계산 자락과 수리산 자락을 가르는 경계여서 갈산이란 산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경계로 갈리는 산'이 축약되어 '갈산(葛山)'이 된 것인데, '칡이 무성했던 산'으로 일부에서 풀이하고 있다. 이는 지명의 정확한 유래를 모르고 음표기에 불과한 한자어를 억지로 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역사적 유래에 합당한 산이름은 갈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갈산은 임영대군 이래 그의 후손들이 세거했던 땅이며, 임영대군의 묘역을 산의 동편 청계동 능안골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산 아래에는 갈산주막이 있어서 통행자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선생도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곳 갈산을 지나갔는데, 그들의 문집과 시집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