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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 금천현(衿川縣)

이야기보따리/자료

【신증동국여지승람】제10권 / 경기도(京畿道)/ 금천현(衿川縣)

 

동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 안산군 경계까지 16리이며, 서쪽으로 부평부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 양천현 경계까지는 27리이며 노량까지는 23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건치연혁
 본디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곡양(穀壤)으로 고쳐 율진군(栗津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금주(衿州) -금을 금(黔)이라 한 곳도 있다. 로 고쳤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넊믐는데, 목종(穆宗)이 없앴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명종이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과천과 합쳐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만에 도로 돌리고, 또 양천과 합쳐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또다시 한 해만에 돌렸다. 16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감으로 만들었고 세조 때 과천과 병합했다가 얼마 못 가 다시 되돌렸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명이다.
군명
 잉벌노(仍伐奴)ㆍ곡양(穀壤)ㆍ금주(黔州)ㆍ시흥(始興)ㆍ금과(衿果)ㆍ금양(衿陽)
성씨
 본현 : 이ㆍ조(趙)ㆍ강(姜)ㆍ장(莊)ㆍ피(皮)ㆍ계(桂)ㆍ윤(尹)ㆍ추(秋).
풍속
 속동제완(俗同齊緩). -이규보(李奎報) 시에, "습속이 비록 제나라 땅같이 느리다." 하였다. 제영(題詠) 편에 보인다.
산천
 삼성산(三聖山) :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 진산이다.
호암산(虎巖山) :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범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되었다.
○ 윤자(尹慈)의 설(說)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사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거기에서 북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 하고, 또 북쪽 10리 떨어져 사자암(獅子菴)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내가 경오년 봄에 어사를 그만두고 이 고을 원이 되었는데, 고을 민속이 본디 어리석었으며 나 또한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모두 바위 탓에 그러하다며 예전부터 이를 억누르고자한 것도 어리석어지지 않으려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말하기를, '옛적에 광천(狂泉)ㆍ음천(淫泉)ㆍ탐천(貪泉)이 있었는데,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미치거나 음탕하거나 탐하게 된다 하여 이름 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이 바위 밑에 살면서 먹고 놀고 자고 일어나는 자가 어리석게 되지 않는 줄을 어찌 알겠나. 이치가 혹 그럴 듯하나 또한 알 수 없다. 옛적에 오은지(吳隱之)가 원이 되어 탐천 물을 마셨으나 탐하지 않고 청백한 지조를 더욱 힘썼다. 그리하여, 시험 삼아 이제(夷齊, 백이 숙제)에게 마시게 해도 본마음을 바꾸지는 않으리라는 시를 지었다. 하물며 사람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애초 태어날 때 품수한 것이니 산천이 어찌 바꾸게 하리오. 가령 이 고을에 사는 자로서 어쩌다 안자(顔子)의 어짊과 같이 어리석은 듯하면서 어리석지 않은 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민속과 나의 어리석음은 바위 때문이 아니며, 바위 때문이라 말하는 자가 진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아, 당나라 유자후(柳子厚)가 염계(冉溪) 풍경을 사랑하여 거기다 집 짓고 우계(愚溪)라고 고쳤다. 이는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이름 붙인 것인데, 대개 예전 우공곡(愚公谷)의 남긴 뜻이며 어리석지 않음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어리석음은 한마디 말과 한 번 움직임과 공사 간에 어디서나 어리석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도 유주(柳州, 유자후)의 우계라는 '우'의 뜻을 가만히 본떠 호암을 고쳐 우암이라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어리석은 데야 어찌하랴. 감히 이야기를 지어 어리석지 않은 군자를 기다린다." 하였다.
독산(禿山) :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 강희(姜曦)가 지은 설에, "어떤 사람이 내게 와 묻기를, '자네가 독산이라 호한 것은 사는 곳에 따라 호한 것인가, 또는 딴 뜻이 있어 그런가. 어찌 설명이 없는가.' 하였다. 내가 대꾸하기를, '내 집 지은 곳에 산이 하나 있는데 활딱 벗어져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아, 이 산의 토성(土性)이 본디부터 어찌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오. 한성 변두리에 자리한 탓에 도끼로 찍히고 소ㆍ염소 따위에게 먹이는 것이 나날이 심하였던 때문이다. 내가 이 산 밑에서 태어나서 자라 이런 일을 눈으로 보면서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람의 본성도 또한 이 산에 나무가 있을 때와 같다. 진실로 그 심성을 존양하지 못하면 뭇 사욕이 공격해 오니, 바로 이 산의 나무를 도끼와 소ㆍ염소 따위가 해치는 것과 같다. 물(物)과 내가 이미 대립하고 사심이 한계를 만들면 나의 본성이 어두워짐도 또한 이 산이 활딱 벗겨진 것과 같다. 사람으로서 이런 극도에 이르면 금수와 무엇이 다르랴. 아, 산에 본디 나무가 있었는데 활딱 벗겨졌고, 사람도 본성이 있었는데 어리석게 된 것이 어찌 본성 때문이리오. 진실로 존양하기만 한다면 비와 이슬에 젖어 싹과 움이 다시 날 것이며, 밤기운이 있어서 천성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이 되어 이 천성이 있는 자는 공경으로써 마음을 두어 사물에 흔들리고 빼앗기지 않게 하지 않으리오. 감히 이로써 표준 하여 스스로 나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니, 손이, '자네 말이 옳다. 삼가 가르침을 받았다.' 하였다." 했다.
양화도(楊花渡) : 현 북쪽 33리 지점에 있고, 도승(渡丞)이 있다. 한성부 조에도 적었다.
바위곶[巖串] :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 이색의 시에, "금주 북쪽 양천 동쪽인데, 한수가 북으로 꺾이면서 한없이 흘러간다. 바다에 조종(祖宗)하는 것은 우공편(禹貢篇, 서경)에 나타났고, 서울을 감싼 것은 어룡이 달리는 듯하다. 남방(南方)에서 조운선이 모두 모이는 곳이라 천 척 배의 노 소리가 공중을 흔든다. 내가 처음 한산촌(韓山村)에 오갈 때, 배 다락[拖樓]에 높이 누워 바람에 돛 올렸다. 순식간에 훌쩍 백여 리를 달리니, 등불이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술잔 거듭 들었었다." 하였다.
대택(大澤) :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날씨가 가물면 비를 빈다고 한다.
하택(下澤) : 현 북쪽 7리 지점에 있다.
대천(大川) : 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물이 과천현 관악(冠岳)ㆍ청계(淸溪) 등 여러 산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양천현 철곶포(鐵串浦)에 흘러든다.
토산
 붕어ㆍ게.
누정
 효사정(孝思亭) : 노량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우의정 노한(盧閈)의 별장이다.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기문에, "삼성산은 곧 금천 진산이다. 거기에서 한 가닥이 꿈틀거리면서 북으로 뻗다가 한수와 만나는 곳에 한 지역을 이루었는데, 곧 의정 노 공숙공(恭肅公)의 선영이 있다. 공숙이 어느 해에 그곳에다 어머니를 장사하고 시려(侍廬)하였는데, 효성이 극진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서러워하던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그 집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둔덕이 강에 임했다. 드디어 그 위에다가 정자를 짓고 때로 올라 구경하며 오래도록 사모하는 정을 품고 자손에게 유언하여 자기도 그곳에 묻혔다. 공숙의 맏아들 돈령공과 나의 선군 대민공(戴愍公)과는 동서 사이였다. 일찍이 정자에서 함께 놀다가 돈령공이 정자 이름과 기문을 지어 주도록 청하였다. 대민공이 정자 이름을 효사라 하였으나 기문은 짓지 못했다. 그리고 30여 년 뒤에 돈령공과 대민공이 모두 죽었다. 표종제(表從弟)되는 공숙의 손자 좌찬성 선성 노자반(盧子胖)이 내게 청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아버님께서 정자 이름 짓던 그때를 보았다. 산수를 둘러보며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여 요점을 짐작함이 있는 듯하더니, 마침내 효사로써 이름 하였으나 기문은 없다. 형이 잇달아 지어 달라' 하였다. 나는 글이 졸렬하다며 세 번이나 사절하였으나, 노자반은 오직 선인의 뜻을 저버린다며 책망하였다. 의리상 사절하지 못하겠기에 다시 노자반에게 청하기를, '무릇 한수를 끼고 지은 정자가 몇인지 모르지만, 경치가 온전하고 또 요긴한 지역은 실상 이 정자를 첫째로 친다. 그런데 선자께서 이름 지으면서 형승은 빼고 효사라 하였음은 뜻이 있음이다. 일찍이 하무시(下武詩)를 보니, 오래도록 효사하고 효사를 법한다 하였다. 이는 무왕(武王)이 길이 효사 하면서 잊지 못했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이러므로 그 효가 법 될 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효를 하면서 혹 잊는다거나 혹 법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모두 구차할 뿐이다. 효란 감싸두면 한마음의 덕이 되고 발하면 온갖 행실의 밑바탕이 된다. 천자로부터 서인까지 효 하는 바가 비록 크고 작고, 멀고 가까움이 같지는 않으나 그 효는 같다. 이러므로 왕후가 효 하지 못하면 천하와 나라를 보존할 수 없고, 경대부가 효 하지 못하면 종묘를 보존할 수 없으며, 사서(士庶)가 효 하지 못하면 제 몸도 보존할 수 없다. 그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면 생각하는 바가 없을 것인가. 천하의 모든 백성은 선왕한테서 받은 것이니 잃지 아니하고, 문정(門庭)과 가업은 선조한테 받았으니 감히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몸과 터럭 살갗은 어버이한테서 받았으니, 감히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을 생각함이 마땅하다. 정성어린 마음으로 한 번 숨 쉬는 동안이라도 잊지 않는 것은 천자와 공경ㆍ사서까지 동일한 효도다. 아, 세상에 자손을 위한 계책을 하는 자가 누구인들 대마다 아름다운 아들이 있어 무궁하게 전하고자 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천운과 명수로서 될 수 없어 호화 문벌과 세도하던 씨족도 한두 세대 전한 뒤에 쇠망하여 떨치지 못하는 자가 흔하다. 이때를 당하면 비록 선조가 물려준 전원과 제택이 있다 하더라도 다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의 자리가 되고 말 뿐이다. 그렇다면 자손으로서 효사하는 직분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 옛적 당나라 이위공(李衛公)이 평천 십리장(平泉十里莊)을 점유하고자 손을 경계하기를, "진실로 평천장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 하였다. 이공(李公)도 또한 당나라 유명한 재상이다. 어찌 자질구레한 꽃 하나, 돌 하나 따위를 위해 이처럼 경계하였으리오. 공숙공은 공명이 세상을 뒤덮을 만하였다. 젊은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구룡(丘隴)에 배회하면서 효성으로써 가법(家法)으로 하여 노자반까지 벌써 3대다. 자반이 공명 덕업이 조상의 뒤를 이어 세상 사람의 심복하는바 되고, 여러 아들도 또한 뛰어나게 두각을 드러내 경사가 다하지 않으니, 이는 그 효도하는 도리를 다했기 때문인가. 어찌 효자가 끊어지지 않는가. 뒷자손이 이 정자에 올라 송추(松楸, 무덤가에 심는 나무)의 가지가 서로 닿고 상재(桑梓, 무덤이 있는 마을에 심은 나무)가 그늘의 두터움을 보고 백세 도구를 남이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한 다음 그 유래를 궁구하면, 우리 선자께서 명명한 것이 속임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 것이다. 만약, 강정(江亭) 한 굽이는 우리 것이라 하여 잃지 않을 뿐이라면 근본을 안 것이 아니다. 자반은 어떠하다 하는가. 받아들일 만하다면 기문으로 하기를 청한다. 창룡(蒼龍) 계사 첫 겨울 하순에 쓴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목소리와 모습은 멀어져, 아득하게 더듬어 생각하기 어려워라. 한 생각 유유(悠悠)하여 다할 기약이 없다. 벼슬길에 사는 오랫동안 풍목탄(風木嘆)을 생각하였다. 책 읽는 방에서는 일찍 육아편(蓼莪篇) 읽기를 폐했다. 쓸쓸한 서리와 이슬에 마음 상하게 하는 날, 황홀하게 갱장(羹墻)에서 얼굴 보는 때여라. 지금 나라에서 효도로 다스림을 숭상하는데, 명성을 드러나게 함도, 응당 구천(九泉, 황천)에서 사렴하는 것을 위로하리라."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사정(思亭)이 큰 강 위에 높이 임했는데, 효성스런 아들 착한 손자 갖추어 아름답다. 세덕(世德)은 이미 산같이 무겁고, 한집안 명성은 길이 물과 함께 흐른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데, 개오동나무 늙었고, 가을날이 쌀쌀하니, 골짜기가 그윽하다. 굽어보고 쳐다보는 정회를 누가 알아주리. 때때로 북궐(北闕)을 보니, 서기 띤 연기가 떴네." 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산세가 큰 들머리에 꿈틀거리며, 영수(靈秀)한 기운을 잉태하여 어느 때나 아름답다. 세 봉우리는 하늘 밖에 솟아 화산(華山)이 푸르고, 한 줄기는 뜰 앞에 돌아 한수가 흐른다. 착함을 쌓아 선세부터 그침이 없었고, 효성은 대마다 전해 저승과 이승에 통했네. 잇따른 경사가 다하지 않으리. 아름다운 기운이 밤낮으로 떴구나." 하였다.
○ 정창손(鄭昌孫)의 시에, "강정(江亭)이 푸른 물 위에 오똑한 데, 올라 보면 어버이 생각 잠시도 쉬지 않는다. 북쪽으로 화산(華山) 서늘한 기운을 대했고, 동쪽으로 한수 맑은 흐름에 임했다. 고기잡이배 아득하여 외로운 돛 멀어지고, 자작나무 무성한데 한 마을 그윽하다. 어찌하면 인끈을 던지고(벼슬을 놓는다는 뜻) 넓디넓은 바다로 가, 갈매기 따라 함께 잠겼다 떴다 할까."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정자는 푸른 강 끝나려는 곳에 있네. 들 풍경 아득하며 더욱더욱 아름답고, 푸른 봄 구룡(丘隴)은 긴 길에 임했고, 붉은 대궐 안개와 놀은 상류에 닿았구나. 높은 나무는 반쯤 사당을 가려서, 어둡고 한가한 구름은 때로 골 어귀를 잠겨 그윽하다. 공사에 휴가 내느라 늦게 오면 술 내어 큰 잔으로 먹으리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효사정이 노량 나룻머리에 있다. 바람과 나무를 생각한 마음 어느 날에 그치랴. 무덤엔 송추가 합쳐져서 서리와 이슬에 느낌이 일고, 시골은 상재(桑梓)가 무성한데 세월이 흘렀다. 감호(鑑湖)에 주인 되어 사람이 길이 있고, 반곡(盤谷)을 전해 받아 지역이 그윽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여가가 많아서 난간에 기대니, 산과 물 푸름이 둥실 하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집터를 처음으로 이 강 머리에 잡으니, 좋은 지역이 벽세의 아름다움을 열었다. 위씨(韋氏)의 한 경서(經書)는 예전 학문을 남겼다. 사씨(謝氏) 집 여러 아들은 모두 영묘한 무리였다. 송추에 가린 정자는 그림 같고, 산수가 둘려져서 지경이 그윽하다. 눈에 가득한 풍경, 저절로 효를 생각하게 하는데, 겉과 속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이에서 알겠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반유역(盤乳驛) :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양화도원(楊花渡院) : 양화도 남쪽 언덕에 있다.
불우
 안양사(安養寺) : 삼성산(三聖山)에 있다. 절 남쪽에 고려 태조가 세운 7층 벽돌 탑이 있고,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비명은 글자가 결락되었다.
○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중신기(重新記)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는 한나라 축법란(竺法蘭)부터였다. 드디어 천하에 널리 퍼졌고 우리 동방에는 아도(阿道)가 시작하였는데, 실상 신라 때였다. 그 설법이 무척 크고 또 화복으로써 사람 마음을 움직이므로 천하가 다 붙좇는다. 비록 영명한 임금과 충의한 신하라도 가끔 절집을 건립하여 불교를 드날렸다. 대개 나라를 위해 복과 이익을 구하고자 한 것이니, 또한 군자의 마음 씀이 후한 것이다. 우리 태조가 개국한 초기에 불법 있는 자가 큰 도움이 있으리라고 말하는 자가 있어서 그들 말을 꽤 채용하여 탑묘를 많이 설치하였다. 지금 금주 안양사 탑도 그 가운데 하나다. 자은종사 양가 도승통 임공(慈恩宗師兩街都僧統林公)이 내게 말하기를, '안양사 탑은 성조께서 옛적에 세운 것이다. 벌써 무너졌으므로 문하시중 철원 부원군 최공(鐵原府院君 崔公)과 주지 대사 혜겸(惠謙)이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다. 혜겸은 나의 문도다. 나를 소개하여 선생에게 기문을 구하는바, 자세한 것은 겸이 말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겸이 왔는데, 그는 말하기를 '겸이 이 절에 머문 지가 몇 해째입니다. 절 역사를 상고하니, 옛적에 태조께서 조공하지 않는 자를 정벌할 참에 여기를 지나다가 산꼭대기에 다섯 가지 빛을 띄우는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습니다. 과연 늙은 중을 구름 밑에서 만났는데 이름은 능정(能正)이었습니다. 더불어 말해 보니 뜻에 맞았습니다. 이것이 이 절이 건립하게 된 연유입니다. 절 남쪽에 있는 탑은 벽돌로 7층을 쌓았고 기와로 덮었습니다. 가장 밑층은 행각이 빙 둘렸는데, 12칸입니다. 벽마다 부처와 보살과 사람과 하느님의 화상을 그렸습니다. 밖에는 난간을 세워 나듦을 막았는데, 그 거창하고 장려한 모습은 딴 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과 비바람에 거의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겸은 아침저녁으로 보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진실로 다시 새롭게 하고자 한 지 오래였으나 힘이 모자랐습니다. 신유년 가을 7월에 시중 최공을 뵙고 이 일을 아뢰었더니, 공이 젊었을 때 한 번 탑 밑에서 묵으면서 성조께서 처음으로 경영하심을 우러러 생각하고 맹세하기를, 신이 다른 날에 진실로 출세한다면 이 탑을 새롭게 하지 않고는 하늘에 성조의 영에 벌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벼슬이 뭇 관료 위에 있으니 출세하였다 할 만하다. 내 마땅히 그때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는 곧 양주, 광주 안찰사(按察使)에게 통첩을 보내 군조(軍租)를 털어 비용에 충당하고 장정을 불러 역사를 맡겼습니다. 겸도 자기 재산을 다 내고 단월(檀越, 단골 시주)의 희사를 받아 쌀ㆍ콩ㆍ돈ㆍ베 얼마를 얻었습니다. 또 노는 겸 같은 사람을 약간 청하였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기는 이 해 8월 모일이었고 일손 끊기는 9월 모일이며, 낙성은 10월 모일이었습니다. 이 날 전하께서 내시 박원계(朴元桂)를 보내 향을 내렸습니다. 승려 천 명을 모아 크게 불사를 올리고 사리 열둘과 불아(佛牙) 하나를 탑 속에 봉안하였는데, 사부 대중에게 널리 시주한 것이 무려 3천 명이었습니다. 그 단확(丹雘)은 임술년 봄 3월에 하였고, 그 화상(畫像)은 계해년 가을 8월에 하였습니다. 탑 안 네 벽 가운데 동쪽은 약사회(藥師會), 남쪽은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은 미타 극락회(彌陀極樂會), 북쪽은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 모습을 그렸습니다. 행각이 12칸인데 벽마다 한 칸씩 그린 것은 이른바 12행년불(十二行年佛)입니다. 무릇 역군이 4백 명이 넘었으며 쌀이 5백95섬, 콩이 2백 섬, 베가 1천1백55필이 쓰였습니다. 아, 이는 큰 비용이며 공역인데, 마침내 능히 완성한 것은 모두 우리 시중께서 발원하기를 맹세하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공은 오직 나라 복리만을 얻으려 하였지 어찌 자기 한 몸을 위했겠습니까. 만약 영구하기를 꾀하려면 글에 기대지 않으면 인연할 길이 없으니, 선생이 짓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내 불씨(佛氏)에 미쳐 입문하지 못한 자이다. 감히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오. 비록 그러나, 내가 태사씨(太史氏, 역사 기록관)가 되어 무릇 흥작(興作)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적는 것이 직분이다. 하물며 이 탑에서 성조와 현상(賢相)의 두터운 마음 씀을 볼 수 있음에랴. 이것을 적을 뿐이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붉은 다리를 지나 감색 불궁(佛宮)에 이르니, 조촐한 놀이가 다행히 부처 있는 곳과 함께 했다. 푸른 못에는 밝고 맑은 가을 달이 잠겼고, 붉은 잎사귀에는 쓸쓸하게 밤바람이 운다. 불사(佛社) 안에는 일찍이 찾아오는 손님을 용납하지 않았고, 시냇가에서 다행히 도옹(陶翁, 도연명)을 맞이한다. 서로 이끌어 웃음 띠며 돌아가기를 늦추는데, 지는 해가 서쪽에 넘어가니 재가 반쯤 붉다." ○ 또, "파리한 말 몰아 서울을 지향하다가, 우연히 안양사에 들어 유숙한다. 새벽닭이 처음으로 소리치는데, 데운 밥 먹고 그윽한 골에서 나온다. 조각달은 옥고리처럼 나지막하고, 성긴 별은 금 좁쌀을 흩은 듯하다. 깊은 골짝 길은 성난 뱀이 오듯 꾸불꾸불 3백 굽이어라. 시냇물 얼음 되니 새로 흰 것이 보태었고, 잿마루에 구름 끼니 본디 푸름이 없어졌다. 여윈 말은 고슴도치 털처럼 까칠하고, 파리한 아이는 거북이 등처럼 움츠린다. 내 본디 풍진 바깥 사람으로서, 평생에 얽매임이 적었다. 10년 동안 산림에 놀 제, 건구(巾屨)로서 사슴을 쫓았었네. 문득 조물(造物)의 속임을 만나 내 한가함을 오로지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예와 이익 속에서 천리 길 여행이 괴롭구나. 어느 때나 인패(印佩)를 던지고 완적(院籍)이 가난하고 어려워 울던 꼴 면하리." 하였다.
도안사(道安寺) : 삼성산에 있다.
○ 권제(權踶)가 젊었을 때 네 벗과 함께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그 뒤에 이들은 모두 과거에 올랐다. 벗으로 부친 시에, "고인(故人)은 아직도 예전대로 삼옷 입고서 용문(龍門) 약속 어김을 일찍 웃었다. 삼성산 신령이 마땅히 경사로 여기리. 네 가지 붉은 계수나무가 아침볕에 빛난다." 하였다.
안흥사(安興寺)ㆍ삼막사(三藐寺)ㆍ망일사(望日寺)ㆍ성주사(聖住寺) : 아울러 삼성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 궁교산(弓橋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1리 지점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노한묘(盧閈墓)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안경공묘(安景恭墓) : 현 북쪽 5리에 있다.
안순묘(安純墓) :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양녕대군묘(讓寧大君墓)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성봉조묘(成奉祖墓)ㆍ이변묘(李邊墓) : 모두 현 동쪽 20리에 있다.
노사신묘(盧思愼墓) : 현 북쪽 20리에 있다.
고적
 영랑성(永郞城) : 석축이며 삼성산에 있다. 둘레가 3천7백50척이고 성안에 못 하나가 있는데, 대정(大井)이라 부른다.
호암산성(虎巖山城) : 석축이며 둘레는 1천6백81척이다. 성안에 큰 못이 있는데 날씨가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인물
  고려
 강감찬(姜邯贊) : 현종 때 거란 군사를 물리쳤다.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에 들어오다가 인가에 떨어지는 큰 별을 보고 구실아치를 보내 알아오도록 하였다. 마침 그 집 며느리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신이 이상히 여겨 아이를 데려다 길렀는데, 이 사람이 강감찬이다. 뒤에 송나라 사신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두 번 절하면서,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지금 여기에 있다.' 하였다." 한다.
우거 고적
 서견(徐甄) : 여러 벼슬을 지나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물러나서 여기에 살았는데, 우리 태조가 한양에다 도읍을 정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천 년 동안 신도(神都)가 한강을 격했구나. 많은 충량한 신하가 영명한 임금을 도왔네. 3국을 통일하여 하나로 만든 공 어디 있나. 문득 전조 왕업이 깊지 않음을 한한다." 하였다. 대간(臺諫)이 벌을 내리라고 하니, 태종이 낯빛을 바꾸면서, "서견은 고려 신하였으므로 시를 지어 추모함이다. 이 사람은 백이ㆍ숙제와 같은 무리이니 상은 줄 만할지라도, 죄줄 수는 없다." 하였다.
제영
 문전교목투추풍(門前喬木鬪秋風) : 고려 백문보(白文寶) 시에, "들 바깥 여러 봉우리에 저문 비가 비겼고, 문앞 높은 나무는 가을바람과 싸움한다." 하였다.
고윤뢰택지(膏潤賴澤池) : 이규보의 시에, "금주(衿州) 좋을시고, 봄 경치가 어찌 그리 기이한다. 작약은 교태롭게 아름다움이 공교하고, 해당(海棠)은 잠이 많아 비스듬히 드리웠다. 술잔을 잡고서 꽃다운 시절을 아끼노라. 고양(皐壤)이 비옥한데, 기름지고 윤택한 것은 못물에 힘입는다. 습속이 비록 제나라 땅같이 느리나, 백성은 많이 노대(老臺)와 같이 명랑하다. 굶주리고 배부른 것으로 편하고 위태함을 점을 치리." 하였다.
수향남주채국풍(誰向南州採國風) : 고려 안극인(安克仁) 시에, "사람은 타고난 운명에 궁함과 통함이 있으니, 무엇하러 시기를 틈타 공을 자랑하리. 차마 잔약한 백성이 물 끓듯 하게 하리. 부끄럽게 경박한 풍속으로 함부로 뇌동함을 본받으랴. 북궐(北闕)에 나아가 당시 폐해를 아뢰려 하나, 누가 남방에 가서 나라의 풍요를 채집하랴. 마음대로 살피며 분명하여도 조금도 도움 없으니 머리를 돌려 위수가의 늙은이 강태공에게 부끄러워라." 하였다.

 [문헌비고]

연혁
 세조 때 과천에 합쳤다가 나누었다. 정종(正宗) 때 시흥(始興)이라 고쳤다.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 : 남양진 관병마절제도위총리협수파총(南陽鎭管兵馬節制都尉摠理協守把摠)을 겸한다. 한사람이다.
방면
 현내 : 끝이 15리.
서면(西面)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남면(南面)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동면(東面) : 처음은 11리, 끝은 15리.
상북(上北)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하북(下北) : 처음은 20리, 끝은 25리.
성지
 삼성산고성(三城山古城) : 영랑성(永郞城)이라고도 하는데, 둘레가 3천7백50척이고 중간에 큰 우물이 있다.
호암산고성(虎巖山古城) : 둘레가 1천6백81척이고 중간에 큰 우물이 있다.
진도
 양화진(楊花津) : 북쪽으로 25리에 있는데, 고려 때는 우리 읍과 바로 통하는 큰길이었다.
방학호진(放鶴湖津) : 서울 마포진(麻浦津)으로 통하는 조그마한 통로다.
교량
 만안교(萬安橋) : 남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안양천(安養川)에서 수원으로 이어진 큰길에 있다.
기탄교(岐灘橋) : 북쪽으로 15리에 있는데, 서울에서 인천ㆍ부평으로 통한다. 모두 돌로 만들어졌다.
궁실
 행궁(行宮) : 읍내에 있다.
행궁(行宮) : 만안교(萬安橋) 남쪽 안양(安養) 언덕에 있다.
묘소
 민회묘(愍懷墓) : 아왕봉(阿王峯) 아래에 있다. 소현세자의 민회빈 강씨(姜氏) 묘로 기일은 3월 15일이며, 숙종 44년에 부묘하였다. ○ 수위관(守衛官) 두 사람이 있다.
사원
 충현서원(忠賢書院) : 효종 무술년에 세웠고 숙종 병신년에 사액하였다.
강감찬(姜邯贊) : 마전에 보임.
서견(徐甄) : 고려 때 장령(掌令)을 지냈는데, 조선이 개국하자 물러나 우리 현에서 지냈다.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이원익(李元翼) : 경도 묘정(廟庭)에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