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원]안양에는 예쁜 동네 이름 있었다
(안양 지명은)
안양은 어디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글을 다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그간 무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양산의 통도사에서 안양암이란 암자를 본 적이 있다. 安養이란 한자가 똑 같아 혹여 불교에서 유래된 지명은 아닐까 싶었다. 요즘은 동네 인터넷에 접속하면 사는 동네에 대한 현황이 조근 조근 잘 설명되어 있다. 곳에서 발췌한 사항이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 (만안구 석수1동 산 27,28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즉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되었다고 소개 하고 있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를 의미한다.
과거 우리 동네는 고유 명칭이 있었다. 남부동 시대동 중앙동 석수동 양지동 장내동 교하동 냉천동 소골안 주접동 덕천마을 골안 명학동 능골 병목안 창박골 담배촌 구룡마을 삼막골 벌터 신촌 범고개 붓골 박달리 ... 나는 그 시절 불렀던 동네이름이 아주 친숙하다. 동네 이름을 떠올리면 그 시절이 오물오물 되살아난다.
동네 이름은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멋없이 숫자로 일렬을 세워 획일화 시켜버렸다. 그 상실로 안양1동 2동 하면 어디쯤인지 상상도 아니 된다. 물론 일정시대 때 지어진 이름이 대부분이라 그 의미가 적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고유의 이름은 필요하다. 고유는 특별한 것이고 독특한 특색대로 풍기는 맛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옛 지명은 나름의 뜻을 갖는 경우가 많다.
유래를 살펴보면 비록 허접한 동네라 할지라도 예사로 보이지도 않는다. 석수동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 쌓여있어 석공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石手洞이라 하였고 효성의 다리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안교와 교비도 이 마을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 옆으로 9.28 수복 후 당시 시흥군 에서 난민들을 정착 이주시킨 후부터 취락이 이루어진 구룡마을이 있는데 그 지명은 자리가 풍수로 보아 좌청룡이 완연한 명당지지라 하여 구룡목이라 칭한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바위색이 유독 푸른 심청색이라 하여 창박골이라 불렀고 관악역서쪽으로, 만안교 노변 옆에 있는 마을은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신촌(新村) 이라 칭했으며 충훈부 동북쪽에 꽃챙이란 마을은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꽃챙이 (花倉洞)라 칭하였으며 소년원과 구룡마을 사이에 위치 한 삼막골은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의 세 성인이 삼성산에서 수도하며 각자 1막씩을 짓고 살았다 하여 삼막골(三幕洞)로 칭했다고 한다.
내 동네 이름은 주접동이라 했다. 이름이 어딘지 궁색하여 늘 감추어 두었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럴 곳이 아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부왕(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묘한 후, 처음에는 서울-과 천-인덕원-사근(현의왕시)을 잇는 노정을 택했다가, 1795년에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부터 서울-시흥을 잇는 시흥노정으로 변경하고 아울러 안양 1동에 안양행궁을 짓고, 지금의 명학역부근에 정각을 세워 능행과 환궁 때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그 후부터 佳接洞 이라 불렀다고 한다.
먼 옛 것들이 아니더라도 삼막골에는 진주 하씨의 집성촌 이라 하여 보통 하씨촌(河氏村) 으로 불리는데 구한말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한국의 주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박탈되어 가자 분연히 일어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하영홍이 태어난 곳으로 해마다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성재이에 있는 느티나무와 웃말에 있는 향나무에서 나무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의미 있는 서증이다. 하 씨 성을 가진 친구가 왜 삼막골 출신이고 그 아이 집 정원에 향나무가 많았던 연유를 알 것도 같다.
이 기록 또한 재미가 솔솔 하다. 안양에 시장이 개시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한 1년 후의 년 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 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 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 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 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 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市垈洞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으로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이기도 하다. 일명 구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내동은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 이라 부른다.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오늘날에는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되었다.
과거를 더듬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시절을 섬기듯 다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섬긴다는 의식의 가치는 단지 의례와 도덕적으로서만이 아닌 원래의 우리 자리를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뿌리만한 강한 힘은 없다. 전통과 정통성은 근원의식과 정체성으로 부터다. 섬김은 생의 모든 고단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여기 이 자리에 왜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필연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그 바탕이다. 본향을 기억해내는 마음자리의 여행, 명절이 그러하듯 곧 내 안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이글은 만안초등학교 제7회 동창회 카페에 올려진 글로,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씨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입니다. 그는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블랙죠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다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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