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병렬]옛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안양 미래문화유산

안양똑딱이 2017. 2. 18. 16:39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중앙로변에 자리한 농림축산검역본부. 안양지역민들에게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란 명칭으로 더 친숙한 곳으로 2016년 4월이면 안양시민들의 공간이 되는데 시가 어떤 공간으로 활용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세워져 있던 축혼비부터 보아야 한다.(이곳에 있던 농림축산검역본부가 김천으로 이전하면서 가져갔다) 

“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한다.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워싸이는 화단은 어찌 보면 이 연구소 구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안양지역민들에게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란 명칭으로 더 친숙한 곳으로  1964년 건립된 안양가축위생연구소가 전신으로 국내.외 축산식품에 대한 위생관리와 검역 실시, 축산농민들을 위한 가축질병의 예방, 퇴치 및 해외 악성 가축 전염병의 유입방지 업무를 수행하는 농림수산부식품부 산하 기관이다.
역사를 보면 검역원은 1909년 부산에서 수출우검역소와 1911년 우역혈청제조소가 설립돼 가축위생시험소로 통폐합된후 1942년 안양으로 이전해 왔으며 1964년 안양가축연구소, 1998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 2011년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2013년 농림축산검역본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9년에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 100주년 기념식을 갖기도 했으나 2005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74년만에 안양을 떠나 경북 김천으로 이전하기 위해 이삿짐 꾸리기가 한창으로 일부 오래된 조형물들과 꽤나 멋진 조경용 나무들을 옮기기 위한 작업이 진행중이다.안양시민들은 오랫동안 이 공간이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이 되었으면 희망해 왔다.
특히 시도 부지가 일반에 매각될 경우 도심 난개발이 우려되어 매입을 추진했는데 단체장이 바뀌면서 정책이 번복되는등 난항을 겪다가 다행히 안양시가 어려운 재정 여건속에도 마래를 위해 1천293억원에 매입키로 결정했다.
안양시는 2018년 5월까지 매입 대금을 나누어 낸 뒤 소유권을 넘겨받을 예정이다. 검역원은 2016년 4월까지 이전할 예정으로 이후 소유권이 이전되기 전 2년 동안은 안양시가 부지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사용한다.
검역원은 만안구 원도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규모 공간으로 총면적 56,309㎡(약 1만7천평) 부지내에는 건물 27개동(2만8천612㎡)이 있으며 잔디밭, 수목원, 운동장 등이 있다. 안양에 검역원이 자리한 것은 일제강점기로 추정된다.
1961년 남부지방을 강타한 사라호 태풍으로 부산에 있던 가축위생시험소가 초토화되자 농업연구기관을 수원을 중심으로 집결시킨다는 정부(농사원)의 벙침에 따라 미국 USOM의 협조자금으로 지소였던 안양(본소이전 1962년)에 1963년 10월 대규모 현대적인 종합시설을 건립하였다. 당시 신축한 가축위생시험소(현재의 검역원 본관 등)는 서울대학교 공대 이강노 교수가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아 완성했다.
특히 본관 건물 전면부의 3층에는 여러 동물들의 형상이 양각으로 새겨진 부조물이 있는데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대표적 조각가인 김문기의 작품이다. 오른쪽 위 한 켠에 ‘LABORATORY’라고 씌어 있어 이 건물이 실험시설임을 알려 주고 있다.
먼저 건물을 설계한 이강노 교수는 1949년부터 1987년까지 ‘현역’ 시절 남산 어린이회관, 국회의사당, 서울대 캠퍼스, 삼성빌딩, 서울대학병원, 주한중국대사관, 아산재단 중앙병원 등 170여 점에 달하는 내노라하는 건축물들을 설계한 인물로 1955년 그의 아호를 딴 무애(無涯)건축연구소를 설립해 한국 현대건축을 이끈 한국 건축학계의 원로다.
1928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생한 이광노는 경복중학을 거쳐 1945년 4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대 전신)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이광노는 1949년 21세의 나이에 대구시청사 현상설계를 시작으로, 6·25전쟁 기간 동안 국군충혼탑, 유엔전우탑 등을 설계하는 등 청년건축가로서 촉망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교통부·서울시 연구원, 한미재단 주택건설 실무자로 6·25 직후 건축계의 부흥을 이끌었고, 1954년 도미(渡美)해 세계적 명성의 건축사무소 ‘아이엠페이(I.M.PEI)’에서 세계적 건축가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에게 세계 수준의 건축기법을 전수했다.
28세 때 서울공대 건축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30여 년 동안 교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건설부 건축위원,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시 도시계획위원·건축위원, 대한건축학회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미국 건축가협회(AIA) 명예특별회원을 역임했다.
이 교수는 88올림픽경기장과 선수촌, 법원청사, 코엑스몰,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등의 심사위원장, 국립중앙박물관 건립기획단 위원장, 1999 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60~1970년 대한국건축사의 새 장을 연 무애건축연구소와 서울대 건축과를 축(軸)으로 현대 건축가 양성의 '본산(本山)'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서울시문화상,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건축구조], 역서로는 [한(韓)의 건축문화](후지시마 가이지로 저) 등이 있다.현재도 활동이 왕성해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할동허고 있으며 2015년 11월 18일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명예이사협의회 초대 의장으로 추대받았다.
그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현역' 시절 남긴 작품은 170여 점에 달한다.  주요작품을 보면 안양가축위생시험소(1963), 삼성빌딩(1964), 국회의사당(1968),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1968), 서울 한국어린이회관(1969), 서울대부속병원(1970), 서울대 종합계획 및 기본설계(1972), 제주대(1976),영남대(1981), 아산재단 중앙병원 기본설계(1986), 오지호기념미술관(1997), S문화관(2002), 오페라극장(2008) 등이다. 특히 대한극장·크리스천아카데미 등은 근대건축을 충실하게 해석해 한국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중국대사관·서울대 규장각도서관은 전통미를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축의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연구 기능을 하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상 3층 건물로 T자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항생 항습실, 무균작업실 같은 특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립 당시 아직 미개발 상태였던 뒷산을 배경으로 자아내는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이다.
옆으로 긴 2층의 주 건축물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기둥을 벽면 밖으로 돌출시켰으며, 그 사이의 창들이 리듬감을 더해 주고 있다. 중앙 현관의 차양 지붕은 돌출되어 있는데 V자 모양으로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어 더욱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중앙 현관 주변을 외줄 기둥과 경쾌한 지붕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1950∼1960년대 한국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에 모더니즘 경향이 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의 바닥과 기둥의 마감은 인조석 테라죠물갈기로 하였으며, 그 바탕을 연분홍, 살구색 등 온화한 계통으로 배색하여 자칫 차가워보일 수 있는 실험실의 내부에 온기를 주고 있다. 또한 현관 내부 중앙 기둥에 1950년대 한미경제원조 조치에 의해 이 건물이 지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식 동판이 붙어 있다.
평면을 살펴보면, 북쪽에 복도를 배치한 평복도형으로 남쪽에 실험실과 사무실을 배치하였다. 서쪽에는 계단실을 두어 높아지는 대지에 맞추어 옥외로 통하는 출구를 두었다. 이 건물은 계단실의 창을 옆으로 길게 내고 열려 있는 공간도 세밀한 창살로 구획하여 르 코르뷔제에를 비롯한 근대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국제주의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전면은 콘크리트 마감으로 하였는데 측면과 배면 등 뒤편의 외벽만은 붉은 벽돌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이어지는 전쟁복구사업의 연장에서 본다면 풍족하지 못한 재료의 생산 및 수급,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당시 상황으로 인해 완벽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했던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전체의 형태는 국제주의 양식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구조 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재료는 이에 미치지 못하여 건물의 뒤편에서는 현장의 재료를 활용하여 겉모양을 맞추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콘크리트로 미끈한 형태를 빚는 요즘 추세에 비추어 볼 때 1960년대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농촌이었던 안양의 교외 현장에서는 재래 재료인 붉은 점토벽돌로 근사한 외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건물에서 또 하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건물 전면부의 3층에 새겨져 있는 부조물인데,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대표적 조각가인 김문기의 작품이다. 이 부조물에는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에 사용되는 동물들의 형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 위 한 켠에‘LABORATORY’라고 씌어 있어 이 건물이 실험시설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실험실 건물 뒤편(서쪽)에도 부속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신축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다.
검역원은 정부의 지방혁신도시 이전 정책에 따라 경북 김천으로 이전하기 위해 74년만에 이삿집 꾸리기에 들어갔는데 일부 오래된 조형물들과 괘나 멋진 조경용 나무들도 김천으로 가져간다고 이전 작업을 하는걸 보니 아쉽다. 
검역원 역사를 보면 1909년 부산에서 수출우검역소와 1911년 우역혈청제조소가 설립돼 가축위생시험소로 통폐합된후 1942년 안양으로 이전해 왔으며 1964년 안양가축연구소, 1998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 2011년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2013년 농림축산검역본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9년에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 100주년 기념식을 갖기도 했으나 2005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안양을 떠나는데 다행히도 안양시가 어려운 재정 여건속에도 마래를 위해 1천293억원에 매입키로 했다. 검역본부 부지는 만안구 원도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규모 공간으로 부지내에는 건물 27개동(2만8천612㎡)이 있으며 잔디밭, 수목원, 운동장 등이 자리하고 있지요. 최근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개미 집단서석지로 확인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편 안양시사(2010년)에 기록된 국립수의과학검역원 관련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건립 당시 아직 미개발 상태였던 뒷산을 배경으로 자아내는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이다. 옆으로 긴 2층의 주 건축물의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기둥을 벽면 밖으로 돌출시켰으며, 그 사이의 창들이 리듬감을 더해 주고 있다.중앙 현관의 차양 지붕은 돌출되어 있는데 V자 모양으로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어 더욱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중앙 현관 주변을 외줄 기둥과 경쾌한 지붕으로 디자인하는 것은 1950∼1960년대 한국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에 모더니즘 경향이 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의 바닥과 기둥의 마감은 인조석 테라죠 물갈기로 하였으며, 그 바탕을 연분홍, 살구색 등 온화한 계통으로 배색하여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실험실의 내부에 온기를 주고 있다. 또한 현관 내부 중앙 기둥에 1950년대 한미경제원조 조치에 의해 이 건물이 지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식 동판이 붙어 있다.평면을 살펴보면, 북쪽에 복도를 배치한 평복도형으로 남쪽에 실험실과 사무실을 배치하였다. 서쪽에는 계단실을 두어 높아지는 대지에 맞추어 옥외로 통하는 출구를 두었다. 이 건물은 계단실의 창을 옆으로 길게 내고 열려 있는 공간도 세밀한 창살로 구획하여 르 코르뷔제에를 비롯한 근대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국제주의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전면은 콘크리트 마감으로 하였는데 측면과 배면 등 뒤편의 외벽만은 붉은 벽돌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직후부터 이어지는 전쟁 복구사업의 연장에서 본다면 풍족하지 못한 재료의 생산 및 수급,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당시 상황으로 인해 완벽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했던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전체의 형태는 국제주의 양식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구조 기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재료는 이에 미치지 못하여 건물의 뒤편에서는 현장의 재료를 활용하여 겉모양을 맞추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콘크리트로 미끈한 형태를 빚는 요즘 추세에 비추어 볼 때 1960년대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한적한 농촌이었던 안양의 교외 현장에서는 재래 재료인 붉은 점토벽돌로 근사한 외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 건물에서 또 하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건물 전면부의 3층에 새겨져 있는 부조물인데,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대표적 조각가인 김문기의 작품이다. 이 부조물에는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에 사용되는 동물들의 형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 위 한 켠에‘LABORATORY’라고 씌어 있어 이 건물이 실험시설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실험실 건물 뒤편(서쪽)에도 둘뚝 등 소각시설을 갖춘 적색벽돌의 부속시설들이 1970년대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또 검역원 직원들의 사택이 있던 자리에는 안양세무서(현 만안세무서)가 들어서면서 모두 없어져 옛 모습은 사진기록으로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