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8년 여름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안양똑딱이 2016. 7. 27. 14:24

 

1968년 여름 안양유원지로 피서온 사람들 #안양 #기록 #안양유원지 #여름 #피서 #닐미샬로프/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 나서지요. 피서 풍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지만 일상을 떠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는 의미는 변함이 없답니다.

근래에는 해외여행이나 시설 좋은 물놀이 공원에서의 피서가 흔한 풍경이 되었지만, 삶이 궁핍했던 1950~1960년대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달려가 더위를 식혔다. 당시 서울에멀리는 대천·송도로 피서를 떠나기도 했지만 가까운 시냇가, 계곡, 한강, 뚝섬 등에서 물놀이를 했으며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는 인파가 몰리는 피서지중 한곳이었지요.

안양유원지 계곡에는 물이 참 많았답니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말에는 관료들의 피서지였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는 계곡을 돌로 막아 안양풀이라 명명하고 유원지입구 철길에는 임시역이 만들어지고 열차가 정차할 정도로 역사도 참 오래되었으며, 1970년대 초에는 한해 여름 100만 인파가 안양유원지로 피서올 정도로 수도권의 대표적인 피서지였지요. 

사진속 1968년 무렵 안양유원지 계곡 초입에는 제1풀, 제2풀 공짜풀장이 현 주차장에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있었고, 그 위쪽으로 유료풀장이 대영풀장이 있었지요. 가족들이 피서를 오면 풀장에 가지 않다라도 너럭바위가 좌악 깔린 계곡옆 천막을 빌려 바리바리 싸온 음식과 수박에 칠성사이다를 마시고 아이들은 물가에서 물장구 치기도 했지요.

공짜풀장의 제1풀은 수심이 꽤 깊어 어른들이 이용했는데 매년 1-2명의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지요. 풀장 좌우측 스탠드는 엉덩이를 드러 낸채 수영복을 갈아입거나, 옷을 보관하기도 하고, 차디찬 계곡물에 몸이 추우면 햇빛에 달구어진 돌 계단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했던 곳이었지요.
돌계단을 올라가면 뒤족으로 상점들이 쭈욱 있었는데 수영복과 자동차 타이어에 바람을 넣은 고무 쥬브를 빌려주기도 했고 사이다를 파는 가게에 활쏘기, 총쏘기 게임과 도깨비굴도 있었지요. 

 

 

 

 

 

 

 

 

안양풀-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 
안양유원지 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숲으로 1920년대 부터 여름철 피서지였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3년 철도수입 증대와 안양리 개발을 위해 사진속의 공짜 안양풀을 개장한 이후에는 서울 시민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았답니다. 1960년대 유료수영장이 서너개 생기고는 1970년대 한 해 평균 100만 명이 몰릴 정도였지요. 
실제로 관보를 보면 1966년 여름피서철인 8월 6일-28일까지 토요일.공휴일에 경부선 안양 풀 임시승강장(시흥~안양역, 안양풀입구)이 운영됐으며, 1967년에는 7월 14일부터 8월 20일까지 여객을 받는 등 안양 풀 임시승강장은 1969년에도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지여.
또 1967년 7월29일자 <매일경제>에 안양유원지에는 하루 평균 4만여명(일요일 10만)의 피서객이 몰리고 서울에서 당일코스로 40원이면 왕복할 수 있고, 기차도 매시간마다 입구에 정차했다고 기록돼 있고요.
1963년 7월17자 <동아일보>에는 국립도서관이 피서객을 위해 안양유원지 풀장에 7월26일부터 8월14일까지 임간문고를 설치해 운영했으며, 196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에는 체신부가 6월10일부터 8월30일까지 안양우체국 임시출징소를 운영한 기록도 있습니다.
1976년 3월25일자 <경향신문>에는 안양유원지에 해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자 입장료를 받기로 했다는 기록도 있네요.
안양유원지는 1969년 1월 21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입구에 아치모양의 철구조물로 '안양유원지'라는 간판이 나붙고 '안양 풀' 대신 '안양유원지'라는 명칭을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경기도관광협회 안양유원지지부가 결성되어 입장 수입으로 유원지를 관리하게 됩니다.
또 유원지 계곡에는 대형풀장, 맘모스풀장, 만안각 풀장 등 인공풀장과 안양관광호텔(현 블루몬테 리조트)이 들어서고 안양 최초의 캬바레가지 들어설 정도로 호황을 누리지요.
그러나 1971년 7월 30일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으로, 1973년에는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건축 및 재건축이 억제되는 특별관리하에 들어가면서 발길이 끊기는 계기도 시작되지요.
더욱이 1977년 사상 유례없는 안양 대홍수는 기존 안양유원지 계곡의 경관을 참혹하게 파괴하고 지나갔다. 이로인해 안양 풀은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와 자갈, 대형 바위돌로 메꾸어지고 휩쓸리며 완전히 자취를 감춰서 결국 잊혀져 버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지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잃어버린 안양유원지는 이후 계곡을 넘칠 정도로 풍부하던 수량도 줄어들면서 인적이 끊긴 유원지로 전락하자 결국 교통부는 1984년 11월 28일 국민관광지 지정을 취소했으며, 안양유원지의 번창과 영화는 지난 추억의 이야기가 됐고요.
안양시는 1994년 유원지의 명성을 되찾고, 지역경제활성화 및 지역개발 차원에서 다시금 바라보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 지방자치의 실시로 민선시장체제가 출범하면서 유원지 정비 및 개발계획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안양시는 2005년 APAP(공공예술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안양유원지를 단순 휴식공간 차원을 넘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거기에 예술까지 결합된 국제적 명소로의 완전 탈바꿈을 시도했으며, 명칭공모를 통해 2006년 '안양예술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합니다.
사진속 안양 풀은 1977년 안양 대홍수로 토사와 바위로 뒤덮여 용도가 폐기됐지요. 그 원형은 남아 있었으나 2000년 안양유원지 정비사업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려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름도 바뀌었지요. 안양풀장에서안양유원지로 그리고 현재의 안양예술공원으로.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졌어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기에 그 당시를 추억해 볼 수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