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천주교회 두 번째 사제로 안양 수리산에 가족들이 살았던 가경자 최양업 신부(토마스, 1821~1861)에 대해 교황청 시성부 의학자문위원회가 가경자의 전구(轉求, intercession)로 이뤄진 치유를 기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시복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
주교회의는 3월 30일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로마 교황청 시성부에서 3월 26일 열린 의학자문위원회 심사에서 7명의 의학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장시간 논의 끝에 제출된 치유 사례가 최양업 신부의 전구로 이뤄진 기적적 치유임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아직 복자 선포까지 남은 절차들이 있지만 이번 의학자문위원회 심사 통과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96년 청주교구 배티성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청원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 꼭 30년, 2016년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시성부 교령을 승인하면서 가경자로 선포한 지 꼭 10년 만에 이뤄진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시복시성 역사에서 교황청의 기적 심사를 통과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결과이기도 하다. 2014년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모두 순교자들로 기적 심사를 면제받았다. 이처럼 순교자의 경우 성덕 심사를 통과하면 복자로 선포되지만, 최양업 신부처럼 증거자인 경우에는 성덕 심사 이후 기적 심사를 거쳐야 한다.
주교회의에 따르면, 향후 남은 시성부의 기적 심사 절차는 두 단계다. 먼저 제출된 치유 사례에 대한 신학위원회 심사다. 신학자들은 이 치유 사례가 신학적으로도 아무런 흠결이 없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한다. 이어 신학위원회 심사를 통과하면 마지막으로 시성부 의원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회의와 토의를 거치게 된다. 회의 결과가 긍정적이면 교황에게 보고되고, 교황의 최종 승인으로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복자로 선포된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종강(시몬) 주교는 “의학자문위원회의 긍정적 결과는 그동안 많은 교우가 정성을 다해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을 위해 기도해 주신 덕분”이라며 “다만 시성부의 기적 심사 절차 가운데 첫 단계를 통과한 것일 뿐이기에 앞으로 최양업 신부님이 복자로 선포될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로 함께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양업 신부 시복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 차기진(루카) 박사는 “시복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절차라고 할 수 있는 의학자문위원회 심사 통과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하느님의 큰 선물을 받은 한국교회가 약해진 신앙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1970년대 말부터 최양업 신부 현양 운동을 전개해 온 한국교회는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시복 추진을 결정했다. 2001년에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시복 안건 심사에 착수했고, 15년 만인 2016년 최양업 신부가 가경자로 선포되는 결실을 얻었다. 아울러 2024년부터 최양업 신부의 선종 기념일인 6월 15일을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을 위한 전구 기도의 날’로 정하고, ‘길 위의 목자’이자 ‘땀의 순교자’였던 최양업 신부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 기도해 왔다.
최양업신부는 어린 시절을 조 선시대에 과천지방에 속해 있던 안양 수리산(뒷뜸이.담배촌)에서 부친인 최경환(성인), 모친인 이성례(복자),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최경한 성인 가족이 살았던 수리산 뒷뜸이는 현 안양9등 담배촌으로 병의 목처럼 입구는 좁지만, 마을에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하여 붙여진 자연지명인 병목안 안쪽 깊숙한 마을이다.
산수가 화려하고 아늑한 이곳에서 천주교신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옹기종기 모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담배농사를 재배하여 소위‘담뱃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생겨서 ‘병목골’이라 불리던 수리산에서 박해시대 옛천주교인들이 외계와 단절된 피난생활을 했다.
최경환 성인은 조선조 헌종 3년인 1837년 7월 그의 일가족(아내 이성례마리아와 신학생 유학간 최양업을 제외한 어린아들 5명)과 함께 유교전통의 천주교신앙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정부의 천주교박해를 피해 수리산 골짜기에 정착,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을 모아 (순교전 3년여 간)교우촌 신앙공동체 터전을 형성하며 천주교신앙 선교활동을 펼친다.
최경환 성인은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선교사로 한국에 최초 입국했던 모방신부(1803~1939)에게 신학생을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최경환은 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상태였고 그러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사건이 터진다.
하지만 그를 쫓던 발길은 깊은 산속에도 미쳐, 1839년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하던 기해박해 당시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1839년 7월 31일 일곱 식구 모두 압송되면서, 파란만장한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그의 집을 급습해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 한명씩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공소회장인데다 아들(최양업)을 유학 보내 신학을 공부시키는 신학생의 아버지란 이유로 죄목을 추가하여 부인 이성례, 자식4명(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젓먹이(스테파노)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옥에 가두는 등 남달리 혹독한 고통의 형벌이 가한다.
배교하라는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났던 1839년 9월 12일 최경환성인은 그의 나이 34세 꽃다운 나이에 볼기매(곤장) 110대를 맞은 후휴증으로 그렇게 옥에서 장렬히 순교한다.
그리고 이듬해 1840년 1월 31일 그의 부인 이성례마리아는 용산 당고개에서 그녀의 나이 39세 때 참수된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자식들을 돌보지 않았다.
당시 망나니가 천주교인을 참수할 때는 녹슨 칼, 무딘 칼로 여러 차례 목을 베어 고통을 주면서 죽인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4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들고 망나니를 찾아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고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눈물겨운 부탁을 하니,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청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4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는 가슴 찡한 일화가 심금을 울린다.
최경환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에 살면서도 양반으로서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낮추어 가난하고 소외된 평민을 돌보며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균분이 실현된 참된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천주교 신자였다.
순교자 최성인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졌으며, 담배촌 성역지는 2000년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가묘와 함께 예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최성인의 유해(손가락뼈)를 모신 고택성당 맞은편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성인의 일부 유해(팔뼈를 모심)와 진토가 포함된 무덤인 가묘가 있다.
최경환성지는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앙적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 되어 전국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리산성지를 찾아 안양에 남긴 성인의 얼과 발자취 되돌아보고, 최경환 성인 가족의 순교정신을 되새기면 좋을듯 싶다.
한편 안양시는 2019년 1월 9일 수리산 도립공원 구역 일부가 해제된 만안구 안양9동 1151-6번지 일대 1만6475㎡ 수리산성지를 역사공원으로 지정ㆍ고시했다. 이에 따라 문화유산 계승 발전시키는 안양의 또 하나 명소가 될 것이 기대된다.
수리산성지는 1830년대 전후 천주교 박해시기에 교인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1939년 7월 최경환 성인이 옥에서 순교후 매장된 지역이다. 안양시는 이같은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03년 안양8경의 제5경에 지정했다.
이곳에는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시스코, 1803~1839)성인의 묘가 모셔져 있다. 또 최경환 성인을 기리는 고택성당과 야외미사터, 묘소(동굴성모상과 가묘)가 있고 순례자들이 묵상하며 예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동산이 있다.
그동안 수리산성지는 성인묘역, 고택, 마리아상 등이 개발제한구역 및 도립공원 부지로 묶여, 우리나라 종교 역사의 문화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부지활용의 어려움이 있었다.
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천수교 수원교구에 이곳을 역사공원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해 지난 2016년 10월 수원교구로부터 이에 따른 신청서를 접수했다. 같은해 11월부터 경기도와 도립공원 해제를 위한 실무협의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2017년 3월 6일 수원교구가 인접사유지(군포시)을 매입해 역사공원 조성에 필요한 도유지와 상호 교환하는 방식으로 진전을 보게 됐고, 경기도는 2018년 12월 31일 역사공원 예정부지에 대한 도립공원 구역을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최양업 신부 약전]
최양업 토마스
출생지: 충청도 청양
신분: 신부
출생연도: 1821. 3. 1.
연령: 40
순교일: 1861. 6. 15.
순교형태: 과로 및 병사
순교지: 경상도 문경 또는 충청도 진천
순교자 성지: 다락골 성지 수리산 성지 배론 성지 언양 죽림굴(대재공소) 배티 성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 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조선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곧바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학생 최 토마스는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에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éol)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é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에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 해안에 도착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상해 장가루(또는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는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토마스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는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 또는 진천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신심과 열심, 그리고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é)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최 토마스 신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최 신부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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