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jet blue]수원~의왕~안양~과천~사당까지 길 이야기

안양똑딱이 2026. 2. 11. 10:22

 

[글 출처: 네이버블로그-기억을 따라서 떠난 여행

https://blog.naver.com/jandb9731/223721020421

 

수원에서 사당까지 Part1 (1986~2025) 수원시에서 의왕으로

프로파일

jet blue 2025. 1. 10. 5:45

 

이번에는 정말 여행기라고 할 수도 없지만 약 40년 가까이 계속 다녀온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그 사이에 대통령은 1986년부터 시작해서 9명씩이나 바뀌었고 세계인구는 49.3억에서 81.8억으로 늘어난 세월이었네요.

수원에서는 북쪽, 동쪽과 남쪽 등으로 집들을 옮겨 다녔었고 그리고 서울시내에서도 사무실이 서울역, 명동, 여의도와 마곡 등으로 옮겨 다녔었는데요.

그러나 아침과 저녁으로 서울을 오가던 길은 늘 수원의 북문과 사당역 사이를 규칙적으로 지나다녔었습니다.

이번 여행길에서는 40년 가까이 되는 동안 매일 오가던 그 길들의 풍경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려고 하지요.

어떤 면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정해진 그 길을 왔다 갔다 하는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수원에서는 북쪽, 동쪽과 남쪽 등으로 집들을 옮겨 다녔었고 그리고 서울시내에서도 사무실이 서울역, 명동, 여의도와 마곡 등으로 옮겨 다녔었는데요.

그러나 아침과 저녁으로 서울을 오가던 길은 늘 수원의 북문과 사당역 사이를 규칙적으로 지나다녔었습니다.

이번 여행길에서는 40년 가까이 되는 동안 매일 오가던 그 길들의 풍경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보려고 하지요.

어떤 면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정해진 그 길을 왔다 갔다 하는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국도 1호선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길

 

이 길을 처음 오가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서울에 있던 대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습니다.

국도 1호선은 전남목포 신항교차로에서 경기도 파주 자유 IC에 이르는 총 길이 484.5km의 정말 엄청나게 긴 길인데요.

제가 서울을 오가던 길 중에서는 북문운동장에서, 송죽동, 파장동, 고천동, 오전동과 안양교도소 인근인 호계3동까지가 국도 1호선 구간이었네요.

이건 1953년에 촬영된 국도1호선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어느 구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멀리 군용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맹렬히 달려오고 있네요.

사실 수원에서 북문은 국도 1호선에서 살짝 비켜서 위치를 하고 있는데 80년대 중반과 후반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었습니다.

1986년 서울로 학교를 가던 길은 북문에 있던 시외버스 정류장 앞에서 시작되었네요.

옛날 집에서 사당역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오산에서 서울역까지 운행되던 10번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이 장안문이던 북문 주변에는 번쩍거리던 네온싸인들과 지금에는 거북시장이라고 불리는 옛날 유흥가를 이루던 골목에 별별 가게들이 많았었던 기억이 있지요.

그러나 199712월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 전 사진에 보이는 장안문(북문), 화성행궁과 행궁동 주변은 어느 정도 정비가 되는 상황이었네요.

지금은 북문 주변이 말끔히 정비되어 관광객들이 야행(夜行) 행사를 즐기는 명소가 되었지만 말이죠.

80년대 동안에는 수원시 최고의 환락가를 꼽으면 그게 바로 수원의 북문 근방이었습니다.

하여간 운전기사와는 별도로 차표를 수거하고 정류장 안내를 담당하는 남자 차장이 동승하던 10번 시외버스는 북문을 떠나서 1번 국도와 만나는 운동장 방향으로 향했었는데요.

제가 수원으로 이사를 해왔던 1981년에는 수원종합운동장만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요.

1971년에 완공되었던 수원 종합운동장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지원을 위하여 대대적인 증축이 진행되었다고 하네요.

수원 실내체육관은 198410월에 개장을 했었는데 1988년 올림픽 핸드볼 경기장으로 사용되게 됩니다.

저의 고등학교 친구가 올림픽 도우미로 실내체육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었지요.

지금은 한국 야구의 10번째 구단인 KT 위즈의 홈 경기장이지만 예전에는 그냥 북문야구장으로 불리던 경기장은 198942일에나 개장을 했었습니다.

예전에 서울로 등하교를 하던 때에 야구경기장은 그 자리에 없었고 운동장 주변이 상당히 썰렁한 분위기였었지요.

그런데 경기장 맞은편 옛날에는 한일합섬이라는 공장이 있었는데 1986만 하더라도 한일합섬은 잘나가던 기업으로 많은 여자직공들이 이 북문운동장 근처에서 근무를 했었습니다.

1964년에 설립된 한일합섬은 수원에 커다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섬유산업의 수익성 악화로 1996년에 문을 닫게 되었고요.

이후 공장부지는 90년대 수원에서 최고 큰 아파트단지인 한일타운으로 조성되고 19998월부터 입주를 시작합니다.

한일타운에 있는 아파트들은 총 58동에 5,282세대라고 하고 층고가 16~24층으로 만들어져서 북문 운동장 주변에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지요.

이건 수원시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일합섬에서 만들던 섬유제품들인데요. 이제 공장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만 남은 셈이 되었네요.

하여간 10번 시외버스는 한일합섬을 지나고 1번 국도를 따라서 파장동 근방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동네에는 수원이 한때 경인산업단지의 명맥을 이어왔듯이 말이죠.

선경화학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1969년에 현재의 SK 케미칼은 선경합섬으로 수원 정자동에 공장을 설립합니다.

그러나 2010년에는 울산으로 공장들을 모두 이전하게 되는데 옛날 90년대에는 이 선경합섬에서 원인을 모를 폭발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지요.

지금은 수원 SK스카이뷰 아파트 단지가 되었는데 예전에 수원 북쪽지역은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제 이 아파트 단지가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구성하고 있지요.

국도 1호선에서 살짝 비켜있지만 수원의 노송지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에서 수원 SK스카이뷰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서 송죽동 만석거(萬石渠) 주변까지 이어지는데요.

만석거는 만석공안 안에 있는 인공저수지로 그 인근에 저의 옛날 단독주택이 있었습니다.

하여간 노송지대는 경기도 기념물 19호로 지지대고개로부터 5Km 정도의 거리에 만들어진 정조대왕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정조대왕은 내탕금을(왕실의 비자금) 1,000(1량이 약 1백만 원임으로 10억 정도) 하사해서 이 노송지대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했었습니다.

현재에는 정조대왕 시절에 심었던 나무들이 많이 고사해서 약 38주 정도만이 남아 있는데요.

예전 만석공원 근처에 있던 우리 집 앞에도 범상치 않은 풍모의 소나무가 아래 사진처럼 버티고 서있기도 했었습니다.

이게 바로 옛날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노송(老松)으로 나무 줄기가 기나긴 세월로 한쪽으로 눕는 바람에 지지대로 나무를 떠받치고 있지만 노송의 풍채가 범상치 않아 보이지요?

 

지지대(遲遲臺) 고개

 

이제 노송지대를 지나면 수원과 의왕시의 경계인 지지대 고개에 들어서게 되는데요. 이 고개 이름의 유래는 화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융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정조의 발걸음이 고갯마루부터 늦추어지고(지체함) 늦추어진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합니다.

정조대왕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인데 하여간 개인적으로는 이 지지대 고개가 마()의 장벽이 되는 경험들을 했었습니다.

1991년 겨울 신입사원시절에는 집사람의 고등학교 불교동아리 친구들 4명이 함께 카풀(Car-full) 방식으로 사당역까지 같이 출근을 했었는데요.

지지대 고개에 블랙아이스가 (도로 위 살얼음) 만들어지는 바람에 여러 대의 차들이 추돌하는 상황에서 급정거로 사고를 간신히 모면했었던 기억도 있고요.

2010년 새해 첫 출근 날에는 눈이 엄청나게 오는 바람에 이 지지대 고개를 버스로 넘지 못하고 다시 수원역으로 가서 열차로 간신히 서울에 도착했었던 경험도 있었습니다.

하여간 지지대 고개 정상부근에는 사진과 같이 지지대(遲遲臺)의 유래를 알리는 비각(碑閣)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건 1807(순조 7)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네요.

19014월 일제가 경부철도 부설을 위해서 철로가 지지대 고개를 통과해서 팔달산을 가로 지르도록 계획을 했었다고 하는데요.

이에 수원군민들이 반대 시위를 해서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은 현재와 같이 부곡-화서-수원-병점-오산 방향으로 꺾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일제가 계획했던 바와 같이 경부선이 놓였더라면 지지대고개, 노송지대 그리고 화성이 아마도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을 상황이었네요.

지지대 고개의 정상부분을 먼저 소개했지만 바로 아래에는 지지대 쉼터 휴게소가 있고 프랑스군참전기념비, 효행공원 등이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프랑스군참전기념비는 1974년에 건립이 되어서 2001년에 다시 보수를 하고 2012년에 새로 정비공사를 마치고 다시 일반에 개방되었는데요.

6.25 동란에 참전한 프랑스군의 희생을 추모하고 그들이 전투에 참여하면서 첫 번째 숙영지가 바로 이 지지대 부근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기념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치면서

 

아직 사당을 가려면 1번 국도를 한참 더 올라가야 하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겨우 지지대 고개를 넘어오는 정도에서 마무리가 되었네요. 사실 이번 이야기를 여행기라고 하기에도 조금 난센스 같은 면이 없질 않지만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이라기 보다는 말이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매일 쳐다본 도로변과 특정 지역들의 풍경이 어떻게 변해왔었는지를 한번 따라가보자는 시간여행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간 지지대 고개를 올라서기 전에 있는 지지대 쉼터 휴게소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찾기가 어려운데요. 그러나 어느 날부터 1번 국도 도로변에 처음 보는 휴게소가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수원을 벗어나서 1번 국도를 타고 좀 더 올라가보는 여정은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하기로 하지요.

 

 

수원에서 사당까지 Part2 (1986~2025) 의왕시를 지나면서

프로파일

jet blue 2025. 1. 10. 5:26

 

이제 80년대에 타고 다니던 10번 시외버스는 이미 없어졌고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들이 대신 운행을 하고 있는 중인데요. 지지대 고개를 넘어오면 의왕시에 진입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발전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긴 하지요? 그런데 지지대 고개 바로 아래에는 골사그네라는 아주 재미난 이름의 동네가 하나 있습니다.

이건 골사그네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인데 개인적으로는 이 앞길에서 1991년 블랙아이스로 트럭, 버스, 자가용 여러 대가 추돌하는 아찔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었지요.

당시 고등학교 불교동아리 여자회원들과 결혼한 4명의 남편들이 카풀로 (Car-full) 동승을 하고 있었는데 자칫하면 과부 4명이 동시에 만들어질 뻔 했었습니다.

그 사고 후에는 각자 알아서 서울로 통근을 하기로 하고 카풀은 더 이상 하지 않았네요.

 

 

골사그네

 

이 골사그네 마을 앞에는 예전에 야쿠르트를 만들던 공장이 있었는데 80년대에는 보였지만 언젠가부터 더 이상 야쿠르트라는 간판이 보이질 않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동네 이름이 자못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데 원래 이 동네에는 곡사천 (谷沙川)이라고 모래톱이 있고 구불구불 흐르는 하천이 있었던 모양이네요.

이 도로 구간이 바로 블랙아이스로 저 세상을 구경할 뻔 한 곳이었는데 좌측에는 골사그네가 있고 우측으로는 나중에 언급할 통미마을이 있습니다.

이 곡사천을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골사그네가 된 것 같은데 마을 주변 지형의 모양이 삼태기와 같이 생긴 오목한 곳에 인가들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옛날에는 산세가 험하다 보니 맹수들로부터 피해가 많아서 사람들이 살기를 꺼리던 곳이었다고 하네요.

1970년대에는 박정희대통령이 육림의 날이라고 나무 심기 행사를 이곳에서 벌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동네 성황당이 마을 어귀에 있었던 모양인데 국도1호선 확장 공사로 인하여 그 성황당이 없어진 모양이고요.

하여간 예전부터 주기적으로 성황당에서 당제를 지내던 그런 마을이었다고 하네요.

 

통미마을과 새로 생긴 과천-의왕고속도로

 

골사그네의 반대편에는 광교산 자락에 통미마을이 있는데 이곳의 지명도 또한 재미나지요?

옛날에 나무로 통을 만드는 것을 통을 민다라고 말들을 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통을 미는(만드는)” 동네를 통미마을이라고 불렀었다고 합니다.

골사그네나 통미마을의 의미를 모를 때에 이 부근을 지나가면 옛날 70년대에 집에 있던 오래된 라디오에서 늑대의 울음소리와 함께 방송되던 전설 따라 삼천리가 생각났었습니다.

80년대에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봤지만 70년대에는 괴기스러운 음향들로 가득한 라디오 방송으로 그 프로를 듣고 있었는데요.

하여간 그런 옛날 이야기들에서는 이름도 생소하지만 뜻 모를 동네이름들이 자주 나왔었지요.

어찌되었던 버스가 통미마을 근처에 오면 사당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요.

하나는 1번 국도를 계속 따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19921120일에 개통된 과천의왕고속도로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004년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7000번 버스를 타고 과천의왕고속도로를 통해서 사당으로 갔었는데요.

7000번 버스는 2000년부터 운행하기 시작했었고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경희대 국제캠퍼스)에서 사당역 4번 출구까지 운행하는 광역버스이지요.

하여간 이 이야기는 옛날 길을 따라가는 여행이니 계속 1번 국도를 직진하기로 합니다.

1991년 서울로 통학할 때에 10번 시외버스는 통미마을 지나서 옛날 고려합섬자리를 지나갔었습니다.

지금은 섬유를 만들던 공장은 없어지고 안양과 서울을 오가는 버스들의 차고지만 남았는데요.

고려합섬은 북한 출신의 사업가가 경제개발 2차년 계획이 진행되던 1966년 자본금 1천만 원으로 기업을 설립하게 된다고 하는데요.

이후 해외에서 차관 180만 달러를 유치해서 위 사진에 보이는 차고지 옆에 안양공장을 만들게 된다고 합니다.

고려합섬은 폴리프로필렌 단섬유로 제작된 이불 솜을 196812월부터 생산하고 1974년에는 대기업도 어렵다고 했었던 나일론중합공정 구축에 성공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1981년에는 은탑산업훈장을 수여 받고 이후 북한과 경제교류에도 참여할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고려합섬의 모기업은 가장 먼저 워크아웃 대상이 되었고 2001년에는 고려합섬그룹이 완전히 공중 분해되기에 이른다고 하네요.

2004년의 지역신문을 보니 의왕시 고천동에 자리한 고려합섬 의왕공장의 46천 평 부지가 이미 매각되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동네들을 지도에 표시해본 것인데 이제 수원 경계를 넘어와서 안양 이전에 의왕시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지요.

하여간 이제까지 이야기들 중에서도 북문에 있었던 한일합섬, 파장동에 있었던 선경합섬 그리고 의왕시에 있었던 고려합섬 등 3개의 섬유공장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봤네요.

 

성나자로원과 포도원

 

지금은 의왕시 오전동이지만 이곳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62일에 외국인인 카톨릭 주교가 설립한 나병환자들을 위한 치료시설이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이 병의 구휼을 위하여 만들어진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옛날에는 환자들을 위한 정착촌과 함께 병동, 진료소, 수녀원 등의 시설들이 위치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익사업으로 닭을 길러서 계란을 유통하는 사업을 하기도 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지요.

가톨릭 재단이라고 해서 그런지 이 부근에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포도밭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거장 명칭으로 포도원으로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모를 했는데 오전동성당과 가톨릭교육재단은 아직도 거기에 유지가 되고 있는 것 같네요.

이제 10번 시외버스는 1번 국도에서 47번 국도로 갈아타려고 하는 안양교도소 부근까지 다 와가는데요.

안양교도소에 접근하기 전 여기에 거대한 제약회사의 공장이 위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한양행이 있었던 자리

 

성 나라자로원을 지나면 유한양행과 유한킴벌리 티슈를 만드는 공장이 나오는데요.

과거에는 미국의 사이나미드라는 제약회사와 합작으로 운영되는 듯이 보였던 항생제를 생산하던 공장은 이제 폐쇄가 된지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옛날에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한국 사이나미드 혹은 다른 이름의 간판을 달고 공장이 한창 운영중인 듯한 모습으로 보였었는데 말이죠.

하여간 1985년의 신문을 보면 유한사이나미드라는 회사가 약을 본격생산 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네요.

1번 국도변에서 공장부지가 위 사진처럼 직접 보이는데 총 27800평의 부지를 유한양행이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6년 대기업들의 지방이전 방침으로 공장은 충북 청원군 오창과학단지로 이전을 해갔고요.

공장부지 활용을 두고 당국과 개발업자간의 조율이 원활치 못해서 아직도 재개발 계획이 계속 추진 중인 모양이네요.

 

안양교도소

 

이제 시외버스는 1번 국도를 빠져 나와서 47번 국도로 들어서게 되는데 커브를 도는 구간에 바로 안양교도소가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하기로 80년대 신군부의 수괴로 광주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주인공과 관련이 있는 시설이기도 한데요.

199512월에 당시 신군부의 수뇌로 권좌에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안양교도소에 군형법상 반란 수괴 협의로 수감되게 됩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서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두 전직대통령들이 죗값을 치르는 상황이었지요.

이제는 혐오시설이라고 해서 이 부근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교도소가 이전 압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은데요.

47번 국도가 뻗어 나간 길 끝에 감시 타워를 제외하면 무성한 나무들 뒤에 교도소가 숨어 있어서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초반 제소관리시스템이라는 전산장비들을 유지 보수하느라고 이 교도소 안을 직접 들어가 보기도 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번 이야기에서는 교도소를 언급하면서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일반인으로써 그 안을 들어가본다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지요?

사실 일 때문에 들어갔었지만 안양교도소는 도심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확장이나 보수가 용이한 곳이 아니라서 다른 곳들 보다 시설들이 조금은 낙후된 모습을 하고 있었네요.

하여간 이제 10번 시외버스는 안양시를 관통하는 1번 국도를 빠져 나와서 47번 국도를 달리게 되는데요.

 

수원에서 사당까지 Part3 (1986~2025) 안양, 인덕원, 과천을 지나면서

프로파일

jet blue 2025. 1. 10. 5:05

 

47번 국도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에서 시작되어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 이르는 역시 아주 긴 일반국도였었네요.

서울시내로 진입해서는 양재대로와 영동대교를 지나가는데 특히 1번 국도와 교차하는 군포부터 과천구간은 자동차 통행량이 많은 병목구간을 이룬다고 하네요.

안양교도소에서 47번 국도로 진입한 시외버스는 예비군교육장이란 곳에서 정차를 했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를 가기 이전 도로에서 언덕 위에 있는 예비군 막사가 보이는 곳이 있었네요.

위 사진 속 거리는 예비군훈련장을 한참 못 미친 곳에 있던 덕고개 사거리인데요.

80년대에는 이 주변이 완전히 허허벌판처럼 보이는 나대지였었지만 이제는 이 주변이 이렇게 모두 아파트로 가득 찬 주거지역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안양지역의 예비군들은 박달동에 있는 교장에 가지 않으면 이 근방에 있었던 예비군교장에서 훈련을 받았던 것 같았는데요.

19896월에는 10번 시외버스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면서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고요.

군대가 강경진압을 하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라디오로 들었었지요.

새로 생긴 농수산물 시장

예비군교장 다음 정차역이 계원예고였었는데 지금은 대학교로 바뀐 모양이지만 옛날 기억으로는 예술고등학교였었고요.

아침시간 좌석에 앉아서 올 때면 왕왕 여학생들의 가방을 받아주곤 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원예고 앞으로는 거대한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지요.

이 외곽순환도의 왼쪽 편에는 안양 농수산물도매시장이 새로 생겼었는데 이 시장은 1997년에 청과물시장부터 문을 연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없었던 시설들이 길가를 하나씩 메우고 있는 느낌인데 사실 이 서울외곽순환도로의 위용이 더욱 주변의 모습을 이질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 같지요?

서울외곽순환도로는 17년 동안이나 공사를 해서 2007년에 개통을 했었다고 하는데 이 구간은 복층인 것으로 보면 공사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우측의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이제는 계원예술대학이 있고 거기서도 더 올라가면 백운호수가 위치를 하고 있지요.

 

 

민배기

 

사실 수원과 비교하면 평촌의 발전상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는데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었던 양반들은 서둘러 수원에서 집을 빼서 평촌으로 이사를 하느라고 난리법석을 떨기도 했었네요.

그렇게 개발 열풍이 몰아치던 곳에 또 희한한 이름을 가진 동네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민배기라고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동네였는데 어딘지 이름이 좀 촌스러운 동네처럼 들렸었네요.

이건 민배기 사거리의 모습으로 처음에는 이곳 지명이 누군가의 이름으로부터 유래가 되었나 하는 생각을 했었네요.

이곳의 땅 모양도 앞서서 말씀 드린 골사그네처럼 삼태기 모양으로 생긴 곳이었지만 차이점은 평지에 있었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짐승들이 들끓은 것이 아니고 서울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던 길손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이곳은 좀 후미진 위치라서 지체가 높은 분들 보다는 평민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민박 서비스를 제공하던 집들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원래 이름이 민배기(民伯洞, 민박동)처럼 민박을 많이 하는 동네라는 뜻으로 불렸었다고 합니다.

민박동이 결국 민백이에서 민배기로 바뀌게 된 것이었네요.

 

오뚜기식품 공장

 

민배기를 막 지나면 눈뿐만이 아니라 코도 즐거워지는 그런 곳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카레를 만들던 오뚜기식품 공장이었는데요.

늘 그 근처에 가면 카레냄새가 진동을 했었고 옛날에는 아침 일찍 서울로 가느라고 식사를 거르고 버스를 타기가 일쑤였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카레의 냄새가 정말 배를 더 고프게 만들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침뿐만이 아니라 저녁식사를 못하고 집으로 가던 때에도 여길 지나가기가 고역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공장은 1969년에 들어섰었는데 주변에서 그 카레 냄새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들이 많아지고 있는 모양이네요.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가끔 맡는 것이니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오랜 동안 이 카레향과 맞서야 했었던 사람들은 정말 힘이 드는 모양이기도 합니다.

하여간 이곳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가끔 점심식사를 카레로 정하기도 하고 그랬었네요.

 

동일방직 공장

 

우리나라에서는 60~70년대 가장 발전한 산업분야가 섬유와 봉제였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오뚜기식품 공장 바로 위에 인덕원을 못 가서 학의천이 흐르던 곳에 동일방직이 있었네요.

이 동일방직도 오뚜기공장과 비슷한 시점인 1969년에 이곳에 들어섰었던 모양입니다.

이젠 공장부지에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라서 예전 공장의 흔적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고요.

동일방직은 한동안 존속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데 1990년대부터 매각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다가 말이죠.

결국 2006년에 공장용지 6천여 평을 아파트 건축업체인 대림산업과 고려개발에 매각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울로 가던 길가에서 볼 수 있었던 수원의 한일합섬, 선경합섬 및 의왕에 있었던 고려합섬 그리고 이곳 평촌에 있었던 동일방직 등이 모두 사라진 것이지요.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에 안양과 수원이 경인산업단지에 속했었던 이유를 이들 공장들의 존재가 대신 설명을 해주는 듯 하지만 이젠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평촌지역을 넘어서면 사당까지의 여행도 후반부로 접어들게 되는데요.

노태우 정부시절 1기 신도시로 개발된 평촌부근의 발전을 80년대부터 꾸준히 봐온 셈인데 1992년 입주가 시작되면서는 도심의 발전이 수원을 능가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인덕원(仁德院)

 

이곳 지명의 유래도 재미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환관들이 낙향하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주민들에게 어진() ()을 많이 베풀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네요.

인덕원은 조선시대 6대 대로(大路)들 중의 하나로 서울에서 수원을 지나서 삼남지방으로 가던 주요 교통로였다고 합니다.

조선중기까지는 여행자들의 숙소 역할을 하던 원()이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원은 관헌들이 공무로 여행을 할 때에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었다고 하네요.

아직도 인덕원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지만 각종 유흥시설들이 밀집한 번화가이기도 한 곳이 되었습니다.

수원과 안양 출신들은 서울에서 모임을 가지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인덕원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지요.

 

이제 행정복합도시 과천으로

 

옛날 80년대 중반에는 인덕원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던 길은 왕복2차선이었고 일부 구간은 비포장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도권내에 인구분산을 위하여 제2청사를 과천에 마련할 계획은 197512월부터 수립되기 시작했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1979년부터는 공사에 들어갔었고 그래서 그냥 평범한 시골이었던 동네가 천지개벽을 하게 되는데 그 증거가 되는 사진을 아래에서 볼 수 있지요.

이 사진의 연대는 정보가 없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47번 국도상의 한 지점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이랬었던 동네에 가장 큰 변화가 몰려 왔었던 것은 바로 정부 제2청사가 아래와 같은 계획으로 이전을 해오면서부터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게 되지요.

 

19794월 청사 1, 2동 착공

 

19827월에 보건사회부와 과학기술처가 입주

19833월에는 건설부, 농림수산부와 법무부가 입주

19835월 청사 3, 4동 착공 및 1985년에 준공

19862월 경제기획원이 입주

19912월에 청사 5동 착공과 1994년에 준공

1994년 교통부와 환경부 입주 등

 

하여간 1991년부터 사회생활을 하면서 서울로 통근하게 된 저에게는 한동안 정부청사 앞이 일종의 병목구간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도로 포장 이전에 비가 오면 흙탕물이 튀던 길이었고 1990년대 초반 아스팔트를 깔 동안에는 바리케이드들이 차를 붙들어놓는 출퇴근길의 애물단지 구간이었네요.

 

이상한 병원건물

 

그런데 서울을 오가면서 과천청사 근방에서 아주 이상한 건물이 한동한 폐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봤었습니다.

노란색으로 한밤중에 이 건물을 쳐다보면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맞은 편에는 말끔한 아파트단지가 있기도 했었지요.

이건 우정병원이라고 전 세모그룹 회장인 유병언이 1990500병상 규모의 의료시설을 만들려고 착공했지만 공정이 60% 정도이던 1997년에 시공사 부도가 나면서 장기간 방치되고 말지요.

20년간 방치되다가 2018년 건물이 철거되고 4개동 174가구의 과천수자인 아파트가 들어서서 20241월부터 입주가 시작되어서 지금은 볼 수 없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정부 과천청사

 

90년대에는 약사법 개정이니 한의사법 개정이니 해서 늘 이 앞에서 데모가 일어나서 또 교통체증을 일으키던 곳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젠 많은 부서들이 이곳을 떠나서 세종시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예전 같은 활기는 다소 덜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하여간 청사가 높은 관악산을 배경으로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것이 정말 명당자리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요즘은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는 은퇴한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발길이 많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한데 청사 5동의 준공 1994년부터 치자면 한 30년 이상 사용한 것이 되네요.

 

과천주공아파트

 

1980년대 중반에 과천을 지나가면서 가장 인상적이던 것이 바로 이 주공아파트 건물이었는데요.

하여간 이 아파트 앞을 지나치면서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저런 곳에 한번 살아보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건 20137월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당시에는 청사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에 반대하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들이 많이 걸려 있었네요.

하여간 서울에 있던 정부청사의 이전으로 호황을 맞이하던 도시의 운명이 동전의 양면처럼 바뀐 상황이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최종적으로 서울로 향하면서

 

예전 기억으로 이곳까지 막히지 않고 달려왔었다면 수원에서 출발한지 1시간 반 정도는 되어야 이곳을 지나갈 수 있었던 것 같지요?

이제 47번 국도도 벗어나서 과천과 사당간의 시내도로를 통해서 서울로 갈 텐데 다음 여정은 마지막 편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수원에서 사당까지 Part4 (1986~2025) 서울 사당역으로

프로파일

jet blue 2025. 1. 10. 4:33

 

 

이제 수원에서 최종 목적지인 사당역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내년까지 (2026) 이 길을 계속 오갈 것 같다는 가정하에 계산을 한번 해봤는데요. 세월의 무게라는 말이 있지만 정말 많은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40년 동안 무려 4.6년간을 이 도로 위에서 보낸 셈이 되었습니다.

단순 계산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을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인-서울 (In Seoul)을 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는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요.

하여간 이건 시간만을 계산한 것이지만 교통비를 따져봐도 적지 않은 돈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닌 셈이 되는 것 같지요?

하여간 이제 47번 국도를 떠나서 사당동으로 이어지는 서울시내도로를 통해서 여행을 마무리 짓는 여정을 한번 따라가 보기로 합니다.

 

출근길의 마지막 여정

 

수원에서 국도 1호선으로 안양시에 있는 호계사거리까지 오면 국도 47번으로 갈아타게 되었고요.

다시 국도 47호선을 따라오다 남태령 앞에 있는 관문사거리에서 사당역방향으로 들어서면 이제 아래 지도에 보이는 출근길의 마지막 여정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간 과천시내는 물론 주변에도 새로운 시설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서울대공원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비롯해서 198451일 서울 창경원에서 모든 것들을 이전 완료 후에 개장했었고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서울랜드라는 놀이동산은 19885월에 개장을 했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서울경마공원은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경주마 관련 시설로 현재의 위치에 개장한 것은 198991일이었다고 하네요.

과천과학관은 기초과학, 응용과학, 자연사 및 과학기술사관련 전시물들을 보여주는 곳으로 20081114일에 개관을 했었습니다.

하여간 출근길은 즐거운 여가활동들을 지원하는 이렇게 좋은 시설들과는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사당역 방향으로 향하게 되지요

 

 

과천을 떠나면서

 

사실 늘 출퇴근으로 지금 오가는 길을 수없이 다녔었지만 여기서 한 발짝만 옆으로 가면 즐겁게 시간들을 보낼 수 있는 좋은 오락 및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이 있었던 것이었네요.

경마공원은 이미 소개를 했었고 이후 서울대공원, 과천과학관과 서울랜드는 별도의 이야기들로 나중에 소개를 할 예정이고요.

하여간 다시 출근길로 되돌아 와서 이제 시외버스는 과천시 외곽을 향해서 가는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계산된 4.6년간 오가던 버스 안에서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를 가만히 생각해봤었는데요.

1986년부터 서울로 다닐 때에는 창 밖 풍경이 처음 보는 것들이라서 한동안 풍경들을 감상하면서 이 길을 다녔었던 것 같고요.

그러면서 10번 시외버스에서 틀어놓은 라디오로 1988년 올림픽 경기 실황을 듣기도 했었고 19894월부터 6월 사이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심각해지는 뉴스들을 전해 듣게 되었네요.

90년대에는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필요한 영어공부를 하느라고 어학 테이프들을 소니 워크맨으로 열심히 듣고 다녔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MP3를 듣거나 밀린 잠을 버스 안에서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열심히 졸고 다닌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러고 보면 그 긴 시간들을 주로 별로 의미 없이 흘려 보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여간 관문사거리를 못 미쳐서 1982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했었다는 과천성당을 지나가면 이제 거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셈인데요.

다른 것들은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저 과천성당만은 옛날 그 모습이 별로 변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남태령을 향해서

80~90년대를 생각해보면 서울로 가는 방법이 크게 두 가지 정도가 되는 것 같다는 기억인데요.

대부분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서 가는 방법이 있었고 아니면 인덕원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서서 사당역까지 가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여간 어느 방법을 선택하던 남태령 부근에 오면 그날은 지각을 하게 될 건지 아닌지가 명확해지는 지점이었지요.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남태령 부근에 다다르면 이제 그날 해야 할 뭔가가 머리에 꽉 차오는 느낌이 늘 있었는데 그렇듯 이 길을 다니면서 늘 시간과 업무에 쫓겨 다닌 셈이었습니다.

 

이제 관문사거리를 지나서 47번 국도와도 이별하면 남태령으로 향하게 되는데요.

사진 속의 건물들 사이에 용마을로 올라가는 돌로 만든 이정표가 있었지만 예전 80년대에 이곳 풍경은 정말 좀 황량했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요.

하여간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삼남으로 향하던 길손들이 드나들던 남태령이 나오지요.

이 고개는 관악산과 우면산의 중간에 있고 높이가 183미터가 되는 좀 높은 고개입니다.

 

요즘 자동차들에게는 별 것도 아닌 높이이긴 하지만 옛날에 타고 다니던 10번 시외버스에게 이 고개는 정말 엄청난 장애물이었던 것 같지요?

고개를 올라갈 때면 엔진에서 정말 큰 소리가 들렸었고 꽁무니에서는 검은 연기가 펄펄 나오곤 했었습니다.

하여간 수원의 관문인 지지대고개에서 경험했었던 일들을 이 남태령에서도 비슷하게 경험해봤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1990년에 발생했었던 한강의 대홍수 당시에는 10번 버스를 타고 남태령까지 왔었지만 고개 넘어 사당역부터 이수역까지 완전히 침수가 된 상태라서 말이죠.

다시 안양역으로 가서 노량진까지 전철을 타고 가기도 했었네요.

이 높은 고개 정상에는 이제 조선시대부터 삼남으로 가는 대로 역할을 했었던 남태령이란 대형 이정표가 고갯마루에 이렇게 떡 하니 서 있지요.

사실 80년대에 남태령을 기준으로 경기도와 서울특별시가 구분되지만 그 안과 밖의 풍경들이 별로 차이 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남태령 밖인 관문서거리에서 양재동 방향으로는 수많은 비닐하우스들이 원예농업을 하거나 서울시에서 쫓겨나와서 판자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아주 최근에도 비닐하우스촌에는 409가구 650명 이상이 꿀벌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남태령을 내려가더라도 전원마을에 번듯한 단독주택들도 많았지만 최근까지 20여 년간 수돗물도 사용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사는 비닐하우스촌이 60여 채가 있기도 하지요.

 

깎인 돌산들과 사당역 부근 개발

 

예전 80년대에 10번 시외버스를 타고 수방사 근방을 지나갈 때면 사당동 일대가 부산의 산비탈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달동네 풍경과 비슷했었습니다.

그러나 198512월부터 동작구 사당동 재개발이 고시되고 19872월부터 3,283가구의 철거작업이 시작되면서 주변환경들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었네요.

그런데 사당동이 달동네가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1965년부터 충무로와 명동 등지 개발을 위하여 철거민들을 대거 이곳으로 이주를 시켰었다고 합니다.

1968년부터 사당2동 등지에는 이주한 철거민들에게 10평 남짓 땅들을 나눠주어 판자집이든 벽돌집이든 짓고 살게 했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예전 19851018일에 4호선 사당역의 개통과 함께 그 부근의 재개발 논의가 아주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들로 사당동에서 살던 달동네 사람들은 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타 지역들로 이주를 해야만 했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 사람들 중의 일부가 수방사 앞 전원마을의 비닐하우스촌이나 남태령을 넘어서 과천시로 간 경우가 상당수 되는 모양이네요.

하여간 남태령을 넘어가는 길이 수원이나 경기지역으로 나가는 관문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주변의 산들을 깎아서 길이 점점 더 넓어지기 시작했었는데요.

사당역을 못 미쳐서 있던 절개된 산의 속살이 그대로 보이는 인공절벽인데요.

80~90년대를 걸쳐서 한여름 장마철이면 이곳에서 대단한 광경이 연출되곤 했었습니다.

 

하얀 두 절벽 사이에서 힘센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떨어지던 광경이었는데 요즘에도 폭우가 내린 후에는 여지없이 이 절벽들 사이에서는 인공과 천연을 구별하기 애매한 폭포수가 만들어지지요.

하여간 사당역은 도로와 4호선이 통과하고 남부순환로가 통과하는 교통요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673일에는 강남순환고속도로가 또 사당역 바로 전을 지나가기도 했었지요.

이 사진은 강남순환고속도로가 만들어지던 때에 찍은 사진이었는데 절개를 해놓은 비탈면에 터널이 뚫렸고 고속도로의 진출입 램프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사진을 찍었던 20137월에는 철판으로 된 높은 방음벽 뒤에서는 돌산을 뚫고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지고 있었던 쌍굴터널이 보였었네요.

그렇게 교통의 요지가 된 사당역은 그 이전시절의 모습들은 모두 땅밑에 묻어두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제 근 40Km 조금 넘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40년이 다되어가는 동안 늘 다니던 길 주변으로 많은 변화들이 감지가 되는데 어떤 것은 반가운 것도 있고 또 그 반대인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봐도 과천시의 발전은 정말 놀라운 점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젠 그 부근에서 옛날의 풍경들을 찾기가 아주 힘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도를 인공위성에서 쳐다본 지상의 모습으로 바꾸면 아직도 선바위역 근처에서 양재동 방향으로는 비닐하우스들이 정말 많이 보이기는 하네요.

그러나 47번 국도상에서는 그런 남루한 모습들을 찾아보기는 정말 어렵긴 하지요.

하여간 40년 동안 수원에서 매번 같은 길을 오가면서 참 많은 시간들을 그 도로 위에서 보낸 것 같은데요.

아마도 언젠가는 더 이상 아침에 일어나서 이 고리타분한 출근길을 또 가야 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정말 벌어진다면 별로 행복하다는 느낌이 안들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앞으로 몇 년간은 이 길을 오가는 상황일 것 같긴 하지만 하여간 늘 쫓기듯이 오갔었던 별로 내키지 않는 길임에도 이야기로 만들어보니 무려 4편씩이나 내용이 만들어 지내요.

정말 수많은 미움들 끝에 정()이 들어버린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수원의 북문에서 사당동까지 가보는 정말 별 특별할 것이 없는 여행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