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785

[20250324]안양 학의천과 안양천에 개나리꽃 만개 시작

2025.03.23/ #도시 #안양 #개나리꽃/ 봄이왔나봄. 안양천과 학의천에 개나리꽃 만개하기 시작. 개나리를 생각하면 왠지 노란 병아리떼가 봄나들이 갈 것만 같아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인데요. 노란 개나리와 함께 봄을 아름답게 물들여 보세요. 개나리는 개화 시기가 빠르고 군락을 이루면서 피어나기 때문에 봄철 풍경을 화사하게 만듭니다. 예로부터 봄이 되면 개나리를 보며 새해의 활력을 얻고자 하는 의미로 감상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안양시의 상징꽃(시화)인 개나리꽃이 만개할때 아름다운 모습을 볼수 있는 명소는 안양천 덕천교~명학대교, 쌍개울~충훈2교. 학의천 쌍개울~학운교 구간 등으로 노란 개나리와 하천물에 비친 풍경이 어우러져 멋진 봄날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20250324]1872년 군포와 안양에서 '場'(장)이 열렸다

1872년 지방지도중 과천지도(果川地圖) 1800년대 군포와 안양에서 장이 열린듯 1872년  지방지도 편 지도에 軍浦場과 安養場이 명기돼 있다.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安養場)과 군포장(軍浦場)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군포장은 과천현 관내이며 안양장은 금천현 관내였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안양시 지명유래』등 역사적 기록을 들여다보면 군포장(軍浦場..

[최병렬]의왕시 한자 지명 표기(儀旺 -義王) 변경 과연 정답?

1. '의왕'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불리웠나?  '의왕'이란 이름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경기도령 제3호에 의거하여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이 실시될 때 경기도 광주군의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을 통합하여 수원군 의왕면으로 하면서 연유된 것이다. 의왕의 행정변천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의왕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 지역을 점령해 율목군(栗木郡)을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과주군(果州郡)으로 고쳐졌고, 990년(성종 9)∼994년에 다시 부림(富林)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광주목(廣州牧)에, 1284년(충렬왕 10)에는 부원현(富原縣)에 속하..

[박철하]빼앗긴 땅에 세워진 의왕 부곡철도관사

빼앗긴 땅에 세워진 부곡 철도관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급격하게 세계 열강들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대립에 휘말리게 되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을 시작으로 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회오리가 몰려왔다. 그러한 와중인 1944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는 군포역과 수원역 사이에 새로이 간이 정거장을 설치하고 3월 1일부터 업무 취급을 개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의 부곡역의 시작이다(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수원-부곡 8㎞, 부곡-군포 3.8㎞). 당시 부곡역은 수원역과는 달리 간이 정거장으로써 역원만이 배치되었다. 역에서는 승객 수송 이외에 수하물을 비롯해 각종 가정 화물도 취급했다.  부곡 간이역의 설치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 ..

[박철하]의왕 기독교역사 근원지 학현교회와 오전리교회

의왕 기독교역사 출발지 학현교회와 오전리교회  의왕지역에 개신교가 전래되어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0년대이다. 1928년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따르면, 1904년에 지금의 학현마을에 학현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세는 크지 않았으며 가정교회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1941년경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한편, 문화유씨 집성촌인 오전동 오매기마을에는 성결교회가 자리잡았다. 이곳 문화유씨 집안의 며느리 홍길순은 수원성결교회로 예배를 보러 다녔다. 점차 신도가 늘어나고 1937년 6월 약 20명의 신도들이 오매기 유근풍의 사랑방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오전리 신앙공동체를 시작했다. 1938년에는 유창희의 헌금을 기반으로 교회를 짓고 1939년 6월 오전리교회 헌당식을 가졌다. 1941년 ..

[박철하]1800년 전후 신자들 모였던 의왕 하우현성당 이야기

기독교 전래의 역사현장 - 하우현성당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는 1700년대 후반이다. 200년이 훌쩍 넘었다. 정조 이후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는 가운데 순조 때에 이르러 금지와 탄압이 강화되었다. 1800년대에 네 차례의 천주교 대탄압으로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희생됐다. 이때 의왕지역에서도 순교자가 발생했다. 언제부터 의왕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상으로는 충청도 홍주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1751~1801)이라고 하는 천주교 신자가 광주 의일리(현 백운호수 주변 학의동지역)로 이주하여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1845년에는 하우현에 살던 신자 김준원이 광주 포교에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는 다는 증언도 전한다...

[박철하]의왕향토사료관이 번역 배포한 김직연의 연사록과 연행록

○ 김직연의 󰡔연사록󰡕과 󰡔연행록󰡕 의왕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많은 문집과 초상화 등 유물을 보존해 왔으며, 각종 석물과 신도비를 갖춘 왕곡동의 청풍 김씨 묘역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858년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온 김직연은 직접 그 내용을 󰡔연사록󰡕과 󰡔연행록󰡕이라 하여 각각 한문과 한글로 지어 후세에 전했다. 김직연 관련 기록물들은 현재 의왕시 향토사료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있다.  김직연의 󰡔연행록󰡕과 󰡔연사록󰡕은 품산 김직연이 청나라에 사은겸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한글 및 한문 필사본 기행문집이다. 1858년(철종 9) 10월 26일 출발하여 1859년 3월 20일 귀환하여 철종에게..

[빅철하]6명의 정승을 배출한 의왕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이야기

조선시대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왕곡동 청풍김씨 문중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의 입향조는 조선 전기 무신 김우증이다. 입향조란 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을 얘기한다. 김우증은 1506년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에 올라 왕곡동을 중심으로 한 사방 십리에 달하는 사패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현재까지 왕곡동은 청풍 김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의 하나로 이어져오고 있다. 왕곡동 마을 입구에는 청풍김씨 묘문비>가 세워져 있고 마을 중심부에는 청평군 김우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500여 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왕곡동 청풍 김씨 문중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박세채, 송시열 등과 함께 노론의 정치적, 학문적 태도..

[박철하]의왕 능안마을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

능안마을 임영대군 묘역과 사당  임영대군 이구(1418~1469)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세조)의 동생이다. 임영대군은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해서 논리가 뛰어나며 무예도 훌륭했다고 한다. 세조는 임영대군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선비와 같다고 칭찬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임영대군은 항상 검소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을 따서 예종은 임영대군에게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임영대군은 세종과 문종대에 무기를 연구하여 총통을 새롭게 고쳐 만들고 화차를 제작했다. 형 수양대군이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통치를 보좌하였다.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을 경험한 그는 동기간의..

[박철하]고려말 의왕 청계사를 중창한 조인규 이야기

고려말 조인규의 청계사 중창  조인규(1237~1308)의 가문은 본래 유이민의 후예로 양인 농민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려의 재상이자 왕의 장인이 되었으며, 아들들과 사위들은 장군과 재상과 같은 고위직에 오르는 등 고려에서 권세가 대단했다. 1231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30년에 걸친 대몽항쟁 기간을 거친 뒤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충렬왕을 시작으로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의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원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국가의 주권을 침해당했다. 이와 같은 고려와 원의 관계로 몽골어 통역관의 수요가 급증하던 때, 조인규는 몽골어 양성기관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몽골어에 통달하여 명성을 얻었다.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에 갈 때 그를 수행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