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기억-정진원]1950년대 안양시장(구시장) 이야기

이야기보따리/기억

[정진원]그곳에 ‘안양시장’이 있었다
 
50년 전 안양시장(市場)은 그야말로 궁벽한 산골 촌놈을 어리둥절케 한 별유천지였었다. 당시 수푸르지(지금 비산동)에서 안양천 다리(지금 임곡교)를 건너서 철길을 넘어 경수국도까지의 오른편 넓은 터에 안양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안양의 유일한 시장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상전벽해 시장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거나 머슴의 지게꼬리를 잡고 힘겹게 걷고 걸어서 그곳엘 갔었다. 구리고개 언덕에 올라서서 한숨을 내쉬면 멀리 신세계 안양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었다.  
구리고개 밑에 운곡 마을을 오른쪽에 두고 산모롱이를 돌면 제법 곧게 된 한길이 뻗어있었는데, 거기를 걸으면서 안양쪽을 보면 기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태평방직 공장의 옆모양이 거대한 톱날처럼 보였었다. 풍차를 거인의 팔로 보고 놀랐던 돈키호테가 그것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왼쪽으로 밤나무가 띄엄띄엄 서있고, 오른쪽으로는 야산에 큰 바위가 있었던 길 끝에서 산자락을 돌아서면 수푸르지 동네였다. 안양의 문간 동네처럼 가게들도 있고 민가도 여러 채 있었던 마을이었다.
수푸르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안양시장이 된다. 다리를 건너면서 왼편으로 태평방직공장, 오른쪽 작은 둔덕 아래는 소시장터였다. 소시장은 장날에만 열리고 여느 날에는 쇠말뚝만 뎅그러니 군데군데 박혀있고 쇠똥 냄새가 풍겨나는 곳이었다. 소시장 앞길에는 겨울철이면 마차에 땔나무를 잔뜩 싣고 와서는 바이어들을 기다리는 황소의 워낭소리에 하얀 콧김이 섞여 퍼져나가고 있었다. 철길 쪽으로 나가면서 닭집이 있었는데, 먼 곳 시골까지 와서 닭을 사다가는 그곳 작은 닭장에 넣고 파는 집이었다. 그 닭집 아저씨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별에 별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길가에 즐비했었다. ‘아이스케키’는 작은 통에다 넣어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었는데, 그 시장 중간 길가에는 테이블을 몇 개 놓고 그것을 공장도 가격으로 파는 가게가 있어서, 그것을 사먹으려고 이십 리 밤길을 마다않고 걸어갔었던 생각이 난다. 철길과 경수국도(京水國道) 사이에는 간, 천엽, 순대 등을 파는 좌판이 있었고, 철길에 거의 붙어서는 만년필 가게가 있었다. 지금의 볼펜류가 나오기 전 만년필은 당시로서는 문방의 보배처럼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가게 주인은 만년필 진열대 크기만큼의 작은 키의 아저씨였다.
종로의 육의전(六矣廛)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안양시장이 안양 근동의 육의전이면서 시전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명, 본견과 인견, 모시, 베 등을 파는 피륙전이 있었고, 그곳에서 한복을 지어팔기도 했었다. 냉장시설이 요즘 같지 않은 때여서 생선을 파는 가게는 거의 없었고, 염장한 고등어나 아지, 꽁치를 파는 가게와 건어물 가게들이 많았다. 과일전이라야 배, 사과와 고장 토산인 감, 밤, 대추 등을 파는 정도였다. 채소류 및 양념류를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파는 ‘사카린’인가를 사서 우물물에 풀어서 마시곤 했었다. 각종 솥, 양은 냄비 등 주방 기구 등을 밑에서부터 크기순으로 쌓아놓고 팔기도 했었다. 주로 창호지와 도배지를 파는 지전도 있었다. 여러 모양의 장독을 파는 가게는 시장 뒤편에 있었다.
시장 뒤쪽으로 들어가면 돼지 내장탕, 순대국 등을 파는 곳, 설렁탕집이 있었다. 뒷골목으로는 막걸리집 몇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가 오면 시장 전체가 검은 흙으로 질퍽거렸는데, 그런 날이면 물건을 사려는 사람보다 막걸리집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았었던 것 같았다. 저녁 무렵 그 막걸리집들이 있는 시장 뒷골목에는 난전(亂廛)이 서서 난장판이 되곤 했었다. 당시 막걸리집에는 몇 명씩 작부를 두고 있었는데, 이른 봄 땅에 묻어두었던 배추나 무를 파내서 머슴 지게에 얹어 안양장에 팔러 보내곤 했었다. 머슴은 그때 그 막걸리집에서 낮술에 취했고, 눈에 들어온 작부의 견인에 포로가 되어서 일 년 새경을 며칠 밤에 작부에게 헌납하고 돌아와서는 다시 ‘시시포스의 바위’를 굴렸었다.

1970년대 안양 다운타운 구시장(시대동) 골목

타임머신/옛사진읽기

 

#안양 #역사 #기록 #기억 #골목 #옛사진 #시대동 #구시장 #1970년대/ 1940~1970년 초까지 안양읍내에서 가장 상권이 컸던 시대동(市垈洞)으로 구시장이라 불리우던 현 안양1동의 1970년대 중반의 골목 풍경으로 지금은 과거의 모습들은 모두 사리지고 그 자리에는 뜨란채아파트 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이들이 노는 골목길 앞으로는 버스가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안양역에서 출발한 버스가 땡땡땡 철길을 건너 시장을 통과해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를 건너고 비산동성당 뒷길과 안양운동장 남문앞 고개, 수촌마을 뒷골목을 지나는 옛길과 인덕원으로 해서 과천을 지나 말죽거리로 넘어가는 서울 버스가 다니던 길이었다. 
당시 구시장 철길에는 열차가 지나갈때는 땡땡땡 소리와 함께 건널목에 차단봉이 내려왔다. 철길 옆에는 건널목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60년대 말 구시장 주변에는 이발소, 중국집, 양복점 등이 즐비했었고, 철길 지나 성신약국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쌀 창고와 정미소가 있었는데, 창고 앞은 넓은 마당으로 당시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철길 왼쪽 골목길을 따라 가면 허스름한 주택들이 이어지고 한국제지 공장 담벼락을 따라 안양천쪽으로 가면 정문이 있었다. 땡땡땡 건널목에는 1970년대 중반에 육교가 놓여지고 1983년 태평방직 자리에 진흥아파트, 2002년 1월 한국제지 자리에 삼성래미안이 들어서고 사진 좌측의 구시장 또한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2004년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아볼 수가 없다.

안양 시대동/ 구시장/ 안양1동

안양시장(이하 구시장)은 1926년 1월 28일 5일장으로 개장되었던 안양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9년 안양지역에서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으로 과천을 거쳐 서울로 가던 시외버스정류장과 국밥집에 중국집, 대장간에 우시장, 쌀창고 등이 있던 안양장터이자 옛 다운타운이었다.
이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안양역사가 개설되자 이 지역이 행정과 경제의 소통의 공간으로 급격한 물동량의 증가와 인구유입을 가져온 결과로 1960년대 중반까지 시흥군 최대의 시장이었다.
[참고]인구 1900년대 초 약 3,000명/ 1912년 3,462명/ 1936년 9,234명/ 1940년 1만명/ 1949년 2만명
구시장은 기차와 자동차로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도 있었지만 마침 안양시장보다 앞서 있었던 군포장이 1925년에 있었던 대홍수로 물에 떠내려가자 자연히 안양리의 안양시장이 군포장의 상권을 흡수하며 당시 안양리 지역의 비약적 경제성장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시흥군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구시장은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에서 이곳으로 장을 보러 올 정도로 농산물,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거래되는 품목이 아주 다양했다. 또 매년 정기적인 씨름대회가 열려 1등에 황소1頭, 2등에 광목 1疋이 상품으로 수여되기도 했으며, 서커스 공연 등이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선거유세나 각종행사 등 지역정치의 발원지였다.
안양시지를 보면 구시장은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이 농산물 15만 6천원, 잡화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도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데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했다.
구시장은 1961년 5. 16 직후인 11월 6일 안양4동에 중앙시장(새시장이라 부름)이 개장하면서 상권을 빼앗기자 한때 우시장으로 변신하며 상권의 부활을 모색했으나 침체의 길로 접어든다. 여기에는 하천변에 위치한 저지대였던 관계로 홍수때마다 침수피해를 입고, 주위를 에워싼 한국제지와 태평방직 같은 큰 공장들과 철로 등으로 인한 통행의 단절과 고립화도 한몫을 한다.
구시장은 안양역이 가깝고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며 유동인구가 늘어나자 한때 시장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모색하지만 뒷골목 상점과 노점들이 택지로 바뀌는 등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구로 전락하면서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현재의 자리에는 1970년 중반에 세워진 육교만이 남아 있다. — 장소: 안양

1977년 안양대홍수로 끊어진 수푸루지다리(임곡교)

타임머신/옛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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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안양1동(구시장)과 비산동을 연결하던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로 1977년 안양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대홍수로 인해 다리가 끊어진 모습이다.
1977년 7월 8일부터 9일까지 안양에 내린 비는 무려 467.2mm로 기상청 창설이래 최대의 강우량을 기록하면서 이재민 6만명에 사망, 실종자 288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혀 안양 대홍수라 쓰여지고 있다.
당시 안양과 서울을 연결하던 석수동의 안양대교는 교각이 주저앉았고 해일처럼 밀려드는 유수량을 이기지 못해 도시는 물에 잠기고 말았다. 여기에 삼성산과 관악산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거대한 바위와 흙이 쏟아져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 계곡은 쑥대밭이 됐다.
수푸루지다리는 임곡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안양시내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 교량이었는데 다리가 끊어지자 하천 양쪽에 줄을 묶어 오갈 수 있는 줄배가 운행되기도 했다

안양읍내에서 비산동 수푸루지다리 1968년 풍경

타임머신/옛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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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안양1동(구시장)과 비산동을 연결하던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의 1968년도 풍경으로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대대)에서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가 찍은 기록사진이다.
사진은 구시장에서 임곡마을 쪽을 향해 찍은 것으로 왼쪽 산자락에는 판잣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임곡마을로 현재는 대림대학교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오른쪽은 이마트가 있는 비산사거리 방향이다. 
당시 안양천에는 물이 참 많았다. 사진에 어린이들이 수영을 하는 하는 것처럼 물도 깨끗했다. 수푸루지 다리는 1970년대 중반까지 안양과 과천을 잇는 중요 교통로였다. 당시에는 비산대교가 가설되기 이전이라 안양읍내에서 안양천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다리였기 때문이다. 다리 에는 난간도 없었는데 안양에서 청계.과천가는 버스가 지나갈때면 다리가 좁아 물로 빠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 다리는 1977년 수해때 중간이 짤려나가 비산동과 임곡마을 사람들이 안양읍내로 나오기 위해 줄배를 타고 하천을 건너기도 했다

1968년 안양읍내의 다운타운 구시장

타임머신/옛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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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0~1970년 초까지 안양읍내에서 가장 상권이 컸던 시대동(市垈洞)으로 구시장이라 불리우던 현 안양1동의 1968년도 풍경으로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대대)에서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가 찍은 기록사진이다.
이 사진은 안양읍내 안양역앞을 지나는 구도로에서 비산동으로 넘어가는 구시장 땡땡땡 철도건널목(현 안양1동 육교)을 건너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로 향하는 방향으로 찍은 것이다.
60년대 초까지 구시장 주변에는 이발소, 중국집, 양복점 등이 즐비했었는데 1983년 태평방직 자리에 진흥아파트, 2002년 1월 한국제지 자리에 삼성래미안이 들어서고 사진 좌측의 구시장에는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2004년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아볼 수가 없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1968년 안양 구시장으로 가던 땡땡땡 철길

타임머신/옛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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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0~1970년 초까지 안양읍내에서 가장 상권이 컸던 시대동(市垈洞)으로 구시장이라 불리우던 현 안양1동의 1968년도 풍경으로 석수동 미군부대(83보급대대)에서 전령으로 근무했던 닐 미샬로프가 찍은 기록사진으로 내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감회가 깊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안양읍내에서 비산동 수푸루지 다리(현 임곡교)로 향하는 방향으로 찍은 것으로 사진 좌측 위 산자락에 닥지닥지 붙은 판잣집들은 임곡부락으로 현재는 대림대학교가 들어선 자리다. 당시의 구시장은 안양4동에 새시장(현 중앙시장)이 생긴 이후의 모습으로 점포들이 하나 둘 이전함에 따라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침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구시장 철길은 복선으로 열차가 지나갈때는 땡땡땡 소리와 함께 건널목에 차단봉이 내려왔다. 철길 옆에는 건널목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과천으로 해서 청계가는 버스들이 이 길로 다녔는데 철길을 넘고, 수푸루지 다리를 건너고, 비산동성당 앞과 안양운동장 남문 앞과 관양동 수촌마을 등 옛길로 해서 넘어갔다. 
60년대 말 구시장 주변에는 이발소, 중국집, 양복점 등이 즐비했었고, 철길 지나 성신약국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쌀 창고와 정미소가 있었는데, 창고 앞은 넓은 마당으로 당시 동네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철길 왼쪽 골목길을 따라 가면 허스름한 주택들이 이어지고 한국제지 공장 담벼락을 따라 안양천쪽으로 가면 정문이 있었다. 땡땡땡 건널목에는 1970년대 중반에 육교가 놓여지고 1983년 태평방직 자리에 진흥아파트, 2002년 1월 한국제지 자리에 삼성래미안이 들어서고 사진 좌측의 구시장 또한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따라 2004년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과거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아볼 수가 없다.

안양 시대동/ 구시장/ 안양1동

안양시장(이하 구시장)은 1926년 1월 28일 5일장으로 개장되었던 안양 최초의 공설시장으로 1929년 안양지역에서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으로 과천을 거쳐 서울로 가던 시외버스정류장과 국밥집에 중국집, 대장간에 우시장, 쌀창고 등이 있던 안양장터이자 옛 다운타운이었다.
이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안양역사가 개설되자 이 지역이 행정과 경제의 소통의 공간으로 급격한 물동량의 증가와 인구유입을 가져온 결과로 1960년대 중반까지 시흥군 최대의 시장이었다.
[참고]인구 1900년대 초 약 3,000명/ 1912년 3,462명/ 1936년 9,234명/ 1940년 1만명/ 1949년 2만명
구시장은 기차와 자동차로 동시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도 있었지만 마침 안양시장보다 앞서 있었던 군포장이 1925년에 있었던 대홍수로 물에 떠내려가자 자연히 안양리의 안양시장이 군포장의 상권을 흡수하며 당시 안양리 지역의 비약적 경제성장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시흥군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구시장은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에서 이곳으로 장을 보러 올 정도로 농산물,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거래되는 품목이 아주 다양했다. 또 매년 정기적인 씨름대회가 열려 1등에 황소1頭, 2등에 광목 1疋이 상품으로 수여되기도 했으며, 서커스 공연 등이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선거유세나 각종행사 등 지역정치의 발원지였다.
안양시지를 보면 구시장은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이 농산물 15만 6천원, 잡화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도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데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했다.
구시장은 1961년 5. 16 직후인 11월 6일 안양4동에 중앙시장(새시장이라 부름)이 개장하면서 상권을 빼앗기자 한때 우시장으로 변신하며 상권의 부활을 모색했으나 침체의 길로 접어든다. 여기에는 하천변에 위치한 저지대였던 관계로 홍수때마다 침수피해를 입고, 주위를 에워싼 한국제지와 태평방직 같은 큰 공장들과 철로 등으로 인한 통행의 단절과 고립화도 한몫을 한다.
구시장은 안양역이 가깝고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며 유동인구가 늘어나자 한때 시장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모색하지만 뒷골목 상점과 노점들이 택지로 바뀌는 등 주거환경이 열악한 지구로 전락하면서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옛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고 현재의 자리에는 1970년 중반에 세워진 육교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