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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文鄕, 故 김대규 시인 타계 7주기 묘소 참배

2025.03.24./ #추모 #묘소참배 #김대규시인/ 文鄕(문향) 故 김대규 시인 타계 7주기 추모 묘소 참배길에 다녀오다. 김대규 시인은 1942년 4월 20일 안양시 양지동 946번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2018년 3월 24일 77세의 일기로 타계한후 시흥시 논곡동 김념 김씨( 金寧 金氏 ) 문중 납골묘역에 잠들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 오렴."-김대규 시인의 엽서-이 시를 읽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시인이 말하는 '나의 고향'은 안양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영혼의 고향이기도 할 것이다. 김대규 시인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나 고향인 안양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다양한 문학 작품 활동을 왜 온 한국..

[20250325]잊혀진 독립운동가, 의왕 하우현성당 윤예원 신부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의병항쟁을 비롯해 많은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천주교회의 인사들 가운데도 의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평신도를 비롯해 사제와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미 친일로 돌아선 교회지도부의 거부로 종교적-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읽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없었지만, 천주교인 역시 겨레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당시 천주교회의 주교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단죄하였다.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으며, 대구 교구장이던 드망쥐 주교는 “일..

[박철하]의왕 출신 한글학자 이희승 선생 생애와 마을

이희승(李熙昇, 1896~1989). 호는 일석(一石)이다.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 출생이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대를 이은 2세대의 대표적인 한글학자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는 한문을 배웠으나 청년기에는 서울에서 열정적으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회사를 다니며 스스로 돈을 벌면서 학업을 이어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일제강점기 이희승의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는 조선어학회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제정, 사전 편찬 사업 전개 등 한글 정리와 통일 및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일제 강점 말기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우리말의..

[20250324]서안양우체국~안양초교 방향 횡단보도 설치

2025.03.23/ #도시기록 #안양5동 #횡단보도/ 안양시 만안구 "우체국사거리"라 불리우던곳. 안양5동 옛 결혼회관 자리에 오피스텔 (25층의 주상복합 판테온 디오르나인 3개동)이 들어선 이후 우체국사거리(서안양우체국~안양초교)에 횡단보도가 새로 설치돼 지하도로 다니던 불편이 해소됐다. 안양초교~남부시장 방향에는 기존의 육교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할수 있다.

[20250324]안양 학의천과 안양천에 개나리꽃 만개 시작

2025.03.23/ #도시 #안양 #개나리꽃/ 봄이왔나봄. 안양천과 학의천에 개나리꽃 만개하기 시작. 개나리를 생각하면 왠지 노란 병아리떼가 봄나들이 갈 것만 같아서 동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인데요. 노란 개나리와 함께 봄을 아름답게 물들여 보세요. 개나리는 개화 시기가 빠르고 군락을 이루면서 피어나기 때문에 봄철 풍경을 화사하게 만듭니다. 예로부터 봄이 되면 개나리를 보며 새해의 활력을 얻고자 하는 의미로 감상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안양시의 상징꽃(시화)인 개나리꽃이 만개할때 아름다운 모습을 볼수 있는 명소는 안양천 덕천교~명학대교, 쌍개울~충훈2교. 학의천 쌍개울~학운교 구간 등으로 노란 개나리와 하천물에 비친 풍경이 어우러져 멋진 봄날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20250324]1872년 군포와 안양에서 '場'(장)이 열렸다

1872년 지방지도중 과천지도(果川地圖) 1800년대 군포와 안양에서 장이 열린듯 1872년  지방지도 편 지도에 軍浦場과 安養場이 명기돼 있다.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安養場)과 군포장(軍浦場)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군포장은 과천현 관내이며 안양장은 금천현 관내였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안양시 지명유래』등 역사적 기록을 들여다보면 군포장(軍浦場..

[최병렬]의왕시 한자 지명 표기(儀旺 -義王) 변경 과연 정답?

1. '의왕'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불리웠나?  '의왕'이란 이름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경기도령 제3호에 의거하여 지방행정구역 통폐합이 실시될 때 경기도 광주군의 의곡면(儀谷面)과 왕륜면(旺倫面)을 통합하여 수원군 의왕면으로 하면서 연유된 것이다. 의왕의 행정변천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의왕지역은 백제에 속했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 지역을 점령해 율목군(栗木郡)을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과주군(果州郡)으로 고쳐졌고, 990년(성종 9)∼994년에 다시 부림(富林)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광주목(廣州牧)에, 1284년(충렬왕 10)에는 부원현(富原縣)에 속하..

[박철하]빼앗긴 땅에 세워진 의왕 부곡철도관사

빼앗긴 땅에 세워진 부곡 철도관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급격하게 세계 열강들과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대립에 휘말리게 되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을 시작으로 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회오리가 몰려왔다. 그러한 와중인 1944년 2월 28일 조선총독부는 군포역과 수원역 사이에 새로이 간이 정거장을 설치하고 3월 1일부터 업무 취급을 개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의 부곡역의 시작이다(경기도 수원군 일왕면 삼리/수원-부곡 8㎞, 부곡-군포 3.8㎞). 당시 부곡역은 수원역과는 달리 간이 정거장으로써 역원만이 배치되었다. 역에서는 승객 수송 이외에 수하물을 비롯해 각종 가정 화물도 취급했다.  부곡 간이역의 설치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 ..

[박철하]의왕 기독교역사 근원지 학현교회와 오전리교회

의왕 기독교역사 출발지 학현교회와 오전리교회  의왕지역에 개신교가 전래되어 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0년대이다. 1928년에 간행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따르면, 1904년에 지금의 학현마을에 학현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세는 크지 않았으며 가정교회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1941년경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한편, 문화유씨 집성촌인 오전동 오매기마을에는 성결교회가 자리잡았다. 이곳 문화유씨 집안의 며느리 홍길순은 수원성결교회로 예배를 보러 다녔다. 점차 신도가 늘어나고 1937년 6월 약 20명의 신도들이 오매기 유근풍의 사랑방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오전리 신앙공동체를 시작했다. 1938년에는 유창희의 헌금을 기반으로 교회를 짓고 1939년 6월 오전리교회 헌당식을 가졌다. 1941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