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11 100

[문원식]어수(御水)물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AD 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이 삼성산 자락에 안양사(安養寺)를 창건한 이후, 세월이 가면서 안양사 아래 마을을 안양리(安養理)라 부르고, 이 안양리가 발전해서 오늘날 안양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극락정토를 일컫는 안양(安養)이란 말과 같은 멋진 지명을 우리 안양시가 갖게 된 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인 바, 상식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이유 몇 가지를 들면 그것은 바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경관과 살기 좋은 인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명산들인 관악산을 뒤로 두고, 좌우로 청계산과 몰악산 및 수리산에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 속을 학의천과 안양천이 합류하며 흘러나가는 형세를 취하고 있는 곳이 바..

[문원식]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안양행궁(安養行宮)

[문원식]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안양행궁(安養行宮)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정조임금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위해 삼성천에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전인 1794년, 안양리(安養里)에는 안양주필소(安養駐 所)가 당시의 경기감사 서 용보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원래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서 만들어진 행궁(行宮)과는 구별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궁이라고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안양행궁(安養行宮)이라고 불려지게된 안양주필소가 원래 있던 자리는 안양1동 674-29번지인 지금의 아카데미극장 1층에 있는 강촌목장이라는 식당에서부터 그 뒤편 주차장 건물과 로얄호텔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극장 건물 우측 하단에 세워진 표석..

[문원식]만안교(萬安橋)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정조임금이 그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던 화산능행(花山陵幸)을 6차(1795)부터 과천로에서 시흥로로 변경하면서 안양에는 안양행궁(安養行宮)과 더불어 만안교(萬安橋)가 가설되었다. 시흥에서 안양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가던 능행길은 후에 국도 1 호선이 되었고, 그 중에서 만안교에서 시작하여 안양역전을 경유하여 구 경찰서 자리에서 끝나는 안양노정은 만안로(萬安路)라 이름지어져 지금도 그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원래 만안교가 가설되기 이전 삼성천에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한 목교가 가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목교로는 임금이 행차하는 어가의 행렬을 지탱하기 어려웠던 연유로 해서 당시 금천현감 서 유방에 의해서 정조 19년(1795) 9월, 착공 3개월만에 완공을 ..

[문원식]수리산(修理山)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수리산은 안양시의 진산(鎭山)으로 시 서쪽에 높이 솟아 관악산 및 모락산과 더불어 안양을 감싸안고 있으며, 예로부터 안양을 보호하는 주산(主山)으로 안양사람들이 마음을 의탁하던 명산이다. 수리산은 태을봉(488m), 슬기봉(451m), 관모봉(426m) 및 수암봉(395m) 등과 같은 영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 정상에 오르면 군자 앞 바다와 소래 염전 및 인천, 수원의 시가지까지 볼 수 있다. 또한 수리산 자락에서 솟아나는 물은 계류이거나 샘물이거나 모두 수질이 좋아 섬유산업과 제지산업이 안양에서 일어나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군포시와 안산시와 함께 수리산을 공유하고 있는 안양시는 수리산의 전체면적 3,099㏊ 중 약 44%에 달하는 면적을 점유하고 있는 관계로 3..

[문원식]새 천년, 안양 100년의 의미

성결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80년대 말 지금의 평촌 신도시 개발공사 도중 선사문화유적지가 발견되었다. 다량의 고인돌과 토기파편 등 출토된 유물들은 생각보다 일찍 이 지역에 우리 조상들이 정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안양이란 지명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헌종년간(1842-43)에 간행된 ‘경기읍지(京畿邑誌)’시흥현도(始興縣圖)인데, 지금의 석수동 지역을 안양리(安養里)라고 표기하고 있다. 안양에 대한 최초의 인구자료는 영조 35년(1759)의 호구조사 기록인데, 현재의 석수동, 박달동을 제외한 나머지 안양지역이 속한 하서면의 인구를 1,51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역마를 이용한 교통의 중심지이던 과천과는 달리 전형적인 농촌 촌락의 형태를 띠고 있던 안양이 발전의 계기..

[문원식]안양유원지 개발의 방향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수도권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놀이 및 휴양지였던 안양유원지는 '69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될 정도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곳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71년 개발제한구역, '73년 비산자연공원으로 편입되어 도시공원지구로 지정됨으로써 개발을 제한 당하는 각종 제도적 규제가 가중되기 시작하자 지속적인 발전을 멈추고 말았다. 이러한 각종 규제의 대상이 됨으로써 야기된 불량한 환경과 전근대적인 서비스 시설은 이후 시민들이 안양유원지를 외면하게 만들었고, 이제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조용히 잊혀져 가고 있다. 이처럼 유원지의 황폐화가 계속되자 안양시 당국에서는 유원지를 정비하고, 개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그와 같은 계획은 '95년 민선시장체제가 들어서면서 구체화되기..

[문원식]안양유원지의 역사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장 일찍이 고려조의 명신 강감찬에 의해서 경기금강이라고 불리어진 관악산의 여러 골짜기 중 가장 수량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곳이 바로 안양유원지 계곡이다. 안양대교 부근에서 안양천과 합류하는 삼성천을 따라 쭉 올라가노라면 삼성산과 관악산이 어우러지는 깊은 골에 당도하게 되는 바, 이 곳이 바로 안양유원지 계곡이다. 이 계곡에는 아름다운 자연풍광 뿐만 아니라 조금만 신경을 쓰면 그 의미를 곱씹어 낼 수 있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그 첫째가 유원지 주차장 못 미처 유유산업 앞마당에서 만나게 되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유명한 보물 제 4 호 중초사지당간지주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보물 제 5 호 중초사지삼층석탑이 있다...

[문원식]안양지역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제언

행정학박사, 성결대학교 교수 현재 수도권에는 서울특별시를 제외하고 21개의 도시들이 운집해 있다. 전 국토의 약 10%의 면적에 불과한 서울·경기권에 인구의 약 40%가 몰려 있고,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다 보니 수도권 도시들의 성장패턴이 획일화되어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 지역이 갖고 있는 특징이나 고유의 매력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마치 규모가 작은 서울시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은 왜 발생하였으며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해답을 [지역정체성(community identity)]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과밀화된 수도권내에서 각 도시들이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인식하고 계획적으로 변화하고자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이 도시는 단지 21개 수도권 도시들 중 하나일 뿐 수도..

[문원식]안양의 성장과 철도

조선시대 역마와 물자이동의 중심축이었던 과천공로는 남태령고개를 넘어 과천, 인덕원, 귀인마을, 호계동, 고천을 경유하여 수원으로 연결되어 현재의 안양을 비껴가고 있었다. 1795년 정조가 비운에 간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찾던 제 6 차 현륭원행(顯隆園幸)이 시흥을 경유하여 안양지역을 통과한 것이 이 지역 공로개척의 효시였을 정도로 안양지역은 발전의 변경(邊境)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과천과 시흥에는 각기 오늘날의 공교육기관에 해당하는 향교가 있었지만 이 지역에는 향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또한 과천 및 시흥과 안양지역과의 격차를 산술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초등학교의 개교 년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시흥초등학교가 1911년, 과천초등학교가 1912년에 개교한 것에 비하여 안양..

[문원식]‘안양’의 유래와 뿌리

안양학연구소장/ 행정학박사, 성결대교수 AD 900년 경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조공을 바치지 않던 광주, 충주, 청주 등 남쪽 3개 주를 정벌하기 위하여 삼성산 자락을 지나가던 중 산꼭대기에서 오색무지개가 어리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늙은 중 능정(能正)을 구름 밑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더불어 대화해 보니 뜻이 맞아 ‘안양사(安養寺)’를 세웠다는 기록이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등에 전해지고 있다. 이 안양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시대 중엽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고, 현재 안양이란 지명의 유래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이라는 말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