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흥리 韓興履
본관: 청주(淸州)
아호: 몽당(夢堂),
이명 : 한항길(韓恒吉)
출신지: 경기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현재의 안양)
생년월일 1900. 7. 18 ~ 1979. 5. 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사건: 1919년 서울 남대문역 만세운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만세시위 참여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몽당(夢堂)이다. 용익(用翼)의 아들로 1900년 7월 18일 부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린시절 안양으로 이전하여 동안구 호계동 289번지에서 성장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1919년 3월 1일에 탑골공원 밖에서 동료들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기차 통학생의 만세운동 주도 임무를 띠고 시흥, 안양, 군포역 등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연 성을 역설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그 후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한 것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었다.
3월 1일의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있은 후 3월 5일에 학생들로만 구성된 항일독립운동이 경성역(현 서울역) 광장을 기점으로 계획되어 오전 9시경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수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1919년 3월 4일 선린상업학교 학생으로부터 다음날 오전 남대문역에서 거행될 만세시위 계획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리고 3월 5일 안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남대문역에 모인 4,000~5,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붉은 손수건을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때 붉은 완장을 두르고 격문을 배포하며 행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어서 시위대의 한 갈래는 남대문 안 시장에서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을 거쳐 종로 쪽으로 향하였고,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에서 태평통(太平通, 현 태평로 일대)과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 일대)을 지나 종로로 이동하였다. 그도 이때 경기고보 학생신분으로 가담하여 시위대와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며 세브란스병원 근처까지 행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육모방망이로 정강이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예심을 거쳐 1919년 8월 30일 재판회부가 결정되었다.
이 일로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아수(李娥洙)·안상철(安尙哲) 등과 함께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같은 해 3월 30일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다른 글에는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요시찰 인물이라는 낙인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고 기록돼 수감 기간이 다르다.
1920년 교원양성소 시험을 통과하였고, 1929년까지 서울 수창동에 소재한 경성보인학교(보인상고 전신)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8년 4월 경성매일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기사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양에 정착, 그해 11월 국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일념에 따라 안양시 안양동 603에 안양 직물공장을 설립하였다. 당시 공장 내의 근로자들의 학력수준이 매우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공장 내에 공민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이때 시흥군면보단장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94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효자상을 받았고 이 해에 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항길(恒吉)」 개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장문을 닫고 5리 밖에 있는 호계동 본가로 가있다가 그해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이듬해 일자리를 찾던 중 부산 시내에 소재한 <국제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다.
서울의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상경 했던 길에 안양직물공장이 완파된 것을 목격했다.
공장은 전쟁이 나자 도보로 남하하는 인민군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전략상 대형폭탄을 투하하여 완전 파괴시킨 것이다. 전쟁으로 공장이 완파되자 지금의 부천 소사공고(부천시 중구 심곡동 424) 자리에 있던 금정공업을 인수, 안양에서 기계 부품들을 뜯어와 닦고 손질하기 수 개월 만에 제품을 생산하였다.
회사명은 안양에서의 전직원이 다시 모였으므로 「안양직물주식회사」로 등기하여 1953년 5월에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에는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를 육성해야 되고, 한 산업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를 양성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기술학교 설립을 신청, 인가를 받아 공장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3년 후(1961)에는 소사고등기술학교와 소사고등기술학교 전문부가 각각 증설되었다.
1978년에는 고등교육의 기초인 전문대학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후 이해 12월에 부천공업전문대학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듬해(1979) 3월 부천공업전문대학 개교식에 참석한 후 이해 5월 8일, 83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묘는 시흥시 매화동 산 26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안양 자유공원, 자유총연맹 건물 초입에 원태우 지사와 함께 두사람의 흉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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