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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2]안양3동 양지마을 유래 표지석 세웠어요

안양똑딱이 2016. 7. 12. 18:33

 

안양지역 최초의 공장인‘안양산업사’(1928년)가 설립된 곳이며, 금성방직(조선직물 전신/1932년)이 있던 자리는 대농단지로 불리면서 지역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됐으며 1940년대 학교(안양중.안양공고)가 세워지면서 중등교육의 산실이 되기도 했던 안양의 원도심 한복판인 안양3동에 양지마을 유래를 소개하는 표지석이 세워졌다.   

 

안양시 안양3동이 주민참여예산사업을 통해 추진한 사업으로 표지석이 세워진 곳은 현 안양3동 주민센터의 모태인‘안양3리사무소’(만안구 양화로 37번길 녹지대/연성대 입구)가 있는 자리로 지난 12일 제막식에는 민수기 만안구청장, 김대규 시인, 고 변원신 전 새마을금고이사장의 미망인인 김순임 여사, 명상욱 도의원, 원용의 시의원 등 20여명이 참석해 제막의 뜻을 기렸다.

 

표지석은 화강석 재질의 2m×1m규격으로 여기에 새겨진 내용은 안양3동이 자료수집과 지역인사 탐방을 통해 작성한 초안을 안양의 문학가인 김대규 시인이 최종 검토해 완성됐다.

 

김기화 안양3동장은 주민참여예산으로 주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던 끝에 440만원을 들여 표지석 제막을 하게됐다며, 제막식이 있기까지 도움을 준 김대규 시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한편 따뜻함을 의미하는 안양 양지(陽地)마을(안양3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후두미동’으로 불리었다. 행정구역의 틀이 갖춰지기 시작한 1900년대 들어 안양읍 안양리(1949. 8. 15)와 안양3리(1964. 1. 1)에 이어 안양이 시로 승격된 1973년 7월 1일자로 지금과 같은 안양3동으로 정해졌다.

 

특히 안양 도심 대부분의 마을과 동네들이 도시재개발과 재건축등을 통해 흔적도 사라졌지만 안양 3동은 오밀조밀 골목길이 남아있고, 비교적 원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끈끈한 삶의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이웃을 정을 나누고 있는 지역이다. 

 

 

■ 양지동(陽地洞) <안양3동>안양공고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3동 1.2.3.4.6.25.26.27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守道君의 증손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다. 이 마을 명칭 에 대하여 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陽地洞이라고 표 기함이 옳다.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복직전에는 아사이학교가 설립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등 많은 학교가 운집되어 있어 안양교육의 요람지로 변모되었다.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金大圭(1942- )의 출생지이며, 방송작사 李瑞求(1899-1981), 소설가 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鄭貴永 (1917- ), 시인 성지조(1934- ) 등 문인들이 오랫동안 이곳에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채만식은 전북옥구 출신으로 <동아일보>.<조선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1925년 단편 <<세길로>>로 조선문단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뷰했다. <<태평천하>>, <<허생전>>, <<아름다운 새벽>>등의 장 편소설을 발표했는데, 193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탁류>>는 그의 대표작으로 현실을 비판하여, 풍류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채만식이 양지동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으로 그는 이해 6월 5일부터 8일까지와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매일신보>에 <安養卜居記>를 발표했다. 그 후 이듬해 3월에 양지동을 떠나 서울 광장리로 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