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동에는 세종대왕 손녀 무덤이 있다
이정진 | 부곡향토문화연구회
의왕문화원 발행 의왕문화 제20호에서
의왕에 정착한 지 15년이 지났다. 의왕은 서울과 수원 등 인근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임에도 자연환경이 살아 있는 오묘한 매력을 지닌 도시이다. 녹지 비 율이 높으며 산과 호수 등이 지닌 청정함과 이웃 간의 정이 살아있는 도시라는 것이 내 가 의왕시에 살아오며 내내 지녀온 느낌이 다. 2006년 의왕에 이사 왔을 때 2년만 머물 고 떠날 예정이었는데 지금껏 부곡동에 정착 해 마을에 맘 붙이고 살게 된 이유도 좋은 자 연환경과 이웃들이 함께하는 따뜻한 정서가 좋아서이다. 부곡동에 있는 다양한 마을 커뮤 니티 중에서 부곡향토문화연구회도 내가 의 왕에 정주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부곡향토문화연구회는 2015년에 부곡동 마 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이 만든 주민공동체로,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잊혀져 가는 사람과 자연을 발견하고 이어주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부곡향토문화연구회 시작부터 함 께해오며 지역의 역사를 함께 공부하면서 마 을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초 평동 새우대와 하동정씨 집안에 대해 처음 알 게 된 것도 부곡향토문화연구회의 '시사 읽고 답사하고'라는 팀에서 의왕 시사를 함께 읽고 공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시사 읽고 답사하 고' 팀에서는 의왕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의 왕시사』(의왕문화원, 2007) 중에서도 부곡동 부분만을 발췌하여 회원들과 함께 학습하였 는데 시사를 공부한 후에는 현장답사도 병행하였다. 정현조와 의숙공주의 묘도 그때 함께 공부했던 분들과 직접 찾아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왕송호수 물막이 둑의 서쪽 끝에는 넘치는 물을 넘어가게 하는 '무념이'가 있다. 그 바로 앞쪽으로 하동정씨 하성부원군 현조 묘 河 간판이 있는 )'라는 데, 그곳에 세종대왕의 손녀 의숙공주(公 主)와 정현조(祖)가 함께 묻혀있다. 초평 동에 하동정씨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는 부분 을 의왕시사에서 확인했는데 하동정씨 집안 의 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정현조, 의숙공주와 맞닿아 있었다. 조선 초기 훈민정 음 창제에 공이 큰 정인지(麟趾)의 아들 정 현조가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결혼하여 하성 부원군이 되었으며, 훗날 초평동으로 묘를 이 전하여 쓰게 되었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도 하 동정씨들이 아랫새우대 음나무재에 많이 모 여 살았다는 기록을 『의왕시사』를 통해 살펴 볼 수 있었다.
초평동은 조선 시대 [여지도서](1759) '광주 월곡면 조'에 상초평리와 하초평리로 기록되 어 있고, 1906년 [지방구역정리]에 의해 안 산군 월곡면 초평리가 되었다. 다시 1914년에 수원군 반월면 초평리로, 그리고 1949년 화성 군 반월면 초평리가 되었다가 1983년 의왕읍 으로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의왕시의 시 승격에 따라 의왕시 초평동이 되었다.
'초평(草坪)'은 '새우대'의 한자 지명으로, 땅 형세가 불룩하게 뻗어 나온 '꽃'의 지형에 새
풀이 많이 자라던 벌판에 형성된 마을을 지칭 하는 말이다. 새우대의 '새'는 풀이나 억새 와 같은 풀을 총칭하는 순우리말로, 새우대는 곧 억새 같은 풀이 우거진 높은 지대를 의미한 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초평동은 새우대마을로 불린다.
구봉산 높은 자락에서 내려다보면 초평동 마 을의 모습이 영락없이 새우의 모습과 닮았다 는 마을 어르신의 이야기도 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지명 유래에 대한 제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우대 를 '새우'와 관련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정현조와의숙공주묘
의숙공주는 세종대왕의 손녀이고 세조와 정 희왕후의 딸인데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정인 지의 아들 정현조와 혼례를 하였고 정현조는 부마 하성부원군에 봉해져 왕족의 반열에 오 른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자녀 없이 지내오다 가 안타깝게도 의숙공주가 37세에 별세하고 만다. 후에 정현조는 새로 장가를 들었고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9명이나 낳았 다. 하동정씨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정현조 의 첫 부인이었던 의숙공주의 묘를 정현조 묘 와 함께 이곳 새우대로 이장하여 관리하며 제 사를 모셔오고 있다.
정현조 묘비의 상단 문양에는 앞쪽에 해와 뒤쪽에 달(초승달)이 있다. 이 해와 달의 문양 을 묘비에 새기는 것이 일반 평민들이 하던 형 태는 아니어서, 묘비만 보아도 무덤의 주인공 이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었음을 유추 할 수 있었다.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런 사실이 주는 정치적·경제적 혜 택은 그렇다 하더라도, 혈연과 가문을 중시하 던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그것이 매우 큰 의 미가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정현조의 후손들은 의숙공주가 직접 출산한 후손이 아 님에도 불구하고 의숙공주의 제사를 모셔오 고 있다. 이는 유교 사상에 따른 효의 이행이 외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 다.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 지역의 숨겨진 이야 기와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세종대왕 손 녀의 무덤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임이 분명하다.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지역에 대 한 애정과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멀리 타지 를 답사하며 역사 공부를 하는 것도 좋겠으나 내가 사는 고장과 마을에 대해 공부하고 알아 가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 을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조선 시대의 역 사와 생활풍습, 왕실의 이야기 등을 나눠볼 수
있는 연구주제로 세종대왕 손녀의 무덤은 충 분히 의미 있는 콘텐츠다.
도시개발로 초평동의 많은 부분이 머지않아 사라질 예정이다. 세월의 흐름에 의한 변화를 무조건 반대할 수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 간직 해온 소중한 것들이 너무도 쉽게 사라지고 변 해가는 현실에서 종종 안타까움과 허무함을 느낀다. 의왕에 살아온 15년간 부곡동의 많은 곳이 도시개발로 변화하고 사라졌음을 곁에 서 보았다. 장안마을도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 려워졌고 곧이어 월암의 도룡마을도 초평동 도도시개발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마을은 누군가의 정주 공간이며, 마을이 지 닌 다양한 자원은 마을의 정체성을 만들어주 는 소중한 자산이다. 시대에 따른 개발은 어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충분하게 숙고하고 고려 하여 오래도록 지키고 기록할 가치가 있는 자 원들이 무분별한 개발로 쉽게 사라지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 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매 우 소중한 일이다. 다음 세대에게 과거를 이어 주는 일은 어쩌면 현재를 사는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 기록되고 기억되지 않는 많은 것들은 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현조(鄭顯組)와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 정현조와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역은 왕송저수지 서쪽 야산에 위치하며 묘역 아래에 새롭게 조성한 신도비와 사당이 있다. 정현조의 묘표는 방부원수형으로 앞면에는 태양을 뒷면에는 초승달을 새겼다.
의숙공주(懿淑公主, 1441년 ~ 1478년 1월 15일(음력 1477년 12월 3일)는 조선 전기의 공주이며, 세조의 장녀이자 적장녀이며 어머니는 정희왕후이다. 의경세자(덕종)의 여동생, 예종의 누나이기도 하다.
1441년(세종 23년),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1](晉陽大君, 세조)과 삼한국대부인 윤씨(三韓國大夫人 尹氏, 정희왕후)의 딸로 태어났다.
정인지의 아들인 하성부원군 정현조와 혼인하였으며, 1455년 아버지 세조가 즉위하자 7월, 의숙공주(懿淑公主)에 봉해졌다. 같은해 11월에 왕실 행사에 초대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468년(세조 14년) 세조의 붕어 후 봉상시에서 세조의 시호로 올린 글자 중 의숙(懿肅)이 그녀의 작호 의숙과 음이 똑같다는 이유로 개정되었다. 승정원에서 간(簡)·의(毅)·흠(欽) 세 글자를 아뢰었는데, 당초에 정한 세조의 시호 의(懿)자를 바꾸어서 흠(欽)자로 변경하였다.
1468년(예종 1년) 12월 16일 예종은 의숙공주에게 쌀 50석(石)을 선물하였다.
1475년(성종 6년), 사간원에서 내수사의 재곡으로 회암사(檜巖寺)를 중건하는 일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회암사 수리가 내수사의 재곡이 아닌 의숙공주 개인의 재곡으로 수리하는 것이며, 작은 곳을 수리하는 것에 불과하니 다시 언급하지 말라고 하였다.[2]
1477년(성종 8년) 12월 3일 사망하였다. 성종은 조회를 철회하고 의숙공주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또한 부의(賻儀)로 쌀 70석과 황두(黃豆) 30석, 청밀(淸蜜) 10두, 기름(油) 1석, 소맥(小麥) 3석, 석회(石灰) 10석을 하사하였다.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가좌동 정토부락에 매장되었으며 이후 남편 정현조가 그 아래에 매장되었다. 후에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으로 이장하여 정현조와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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