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모락산 결핵요양원
박철하 | 의왕향토문화연구소장
의왕문화원 발행 의왕문화 제20호에서
의왕시 오전동 모락산 서남쪽 기슭 골짜기에 '성라자로마을'이 있다. 우리 가족이 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매달 한 번씩 '치유의 집'에서 봉사를 해왔기에 내겐 아주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성라자로마을은 70년 전 나환자들, 즉 한센병 환우들의 치료와 치유된 환자들의 사회 복귀 및 자활을 마련해 주고자 설립된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事業)기관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6월 2일 미국메리놀회 소속 죠지캐롤 안 주교가 광명시 신기촌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위한 구호와 의료사업으로 시작한 '성라자로 요양원'이 그 모태이다.
그런데 설립 23일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 7월 5일 전쟁의 와중에 성라자로원은 현재의 의왕시 오전동 모락산 기슭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초대 원장으로 1952년 이경재 신 부가 부임했다. 개원 초기에는 주로 이동 진료를 실시했으나 점차 치유된 나환자들이 이곳에 가족과 함께 거주하면서 성라자로마을 요양원(진료소)과 자립정착촌으로 분리되었다. 1952년 경향신문의 한 기자는 '성라자로요양원' 소개글에서, "마을 한가운데는 성모마리아상이 자리하 고, 집 앞마다 꽃밭이 아름다웠고 빨래가 널려 있고 김장독이 놓여있는" 마을로, "적막 속에 쌓 인 이 계곡에 저녁연기가 뭉게뭉게 오를 무렵이 되면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종각에서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고 묘사했다. 1964년에는 고천국민학교 라자로분원(1974년 오전분교)이 개교되어 운영되다가 1984년에 문을 닫았다. 현재 성라자로마을은 한센병 병력자 들의 안식처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노약한 환우들이 함께 요양하며 생활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성라자로마을이 있는 이곳은 과거에 어떠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주변에 조선시대 교통기관의 하나인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원골'이라고 하는 지명유래를 가 지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다. 근대 이후 마을 변천사를 추적하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의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을 통해 자료조사를 해보았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제강점기인 1942년 결핵 요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1951년 성라자로원이 광명에서 이전해 오기 전 이곳에는 세브란스의전 출신의 소진탁 (卓. 1921~2016) 박사가 운영하던 폐결핵 요양소가 있었다는 신문 기사도 접했다. 소진탁 박사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까지 일본에서 동경제국대학 전염병연구 소 연구원으로 결핵과 장티푸스균 등에 대해 연구한 학자였다. 광복 직후 수원결핵요양원을 매 입하여 직접 원장으로서 1946년 12월까지 경영하였다. 이처럼 현재의 성라자로마을이 위치한 곳은 과거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해방 직후인 1946년까지 수원결핵요양원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자료를 통해서 자세히 확인해 보자. 현재의 성라자로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수원결핵요양원이 있 었던 곳임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일신보」의 1942년 5월 21일 및 10월 23일자 기사가 있다.
위의 두 자료의 내용을 토대로 현재의 성라자로마을에 위치해 있던 일제강점기 수원결핵요양원의 설립, 운영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해 강제 동원에 집중하며 의료분야에 있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총후(後)의 결핵(核)을 박멸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가운데 1942년 5월 영등포의 실업가 송병황(炳이 당시 일왕면(面) 오전리(五里) 모락산 자락에 요양시설을 건설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특히 25세 전후의 청년 남자 140만 명이 결 핵에 시달리고 이 가운데 10%인 14만여 명이 매년 희생되는 상황이었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21일자 보도에서 "송림울창(松林鬱蒼)하고 수봉(秀)을 배경으로 한반도(半島) 희유지(稀有地)"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만 해도 현재의 성라자로마을 이 있는 이곳 모락산 자락은 소나무가 꽤 울창하고 수려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도 모락산은 4계절 내내 일반 등산객에게 흥미를 끄는 곳이었다고 한다. 천연의 지하 동굴을 비롯 해서 수원 서호는 물론 멀리 한강과 인천항까지도 보일 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송병황( 秉煌)은 바로 이러한 곳에 10여만 원이란 거액을 들여 임야 8만여 평 가운데 1차로 우선 건평 350여 평의 건물을 갖춘 요양원을 지었다. 이때의 요양시설 이름은 '회춘요양원(回春療養院)' 이었다. 1942년 5월 현재 이미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곧이어 2차로 요양시설 확충이 이뤄졌다. 새로 400평을 매입하여 1942년 10월에 약 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 건물을 증축하였다. 이를 기회로 요양시설 이름도 '수원요양원(水原療養 院)'이라고 개칭함과 동시에 기존의 한방(漢方) 치료뿐만 아니라 '양약부(部)'도 설치하였 다. 전임의사로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내과 과장 이정복李正馥. 창씨개명으로는 牧] 외에 몇 명을 더 초빙하였다. 또한 가난한 환자를 위해 무료로 치료해 주는 '시료부( 部)'도 두었다.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수원요양원을 '수원결핵요양원'으로도 불렀다.
수원요양원 원장은 일제강점기 일본 규슈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결핵병 연구의 권위자 윤치형[尹衡, 1896~1970. 창씨개명으 로는 伊藤洵]이었다. 그는 1944년 1월을 전후해서 서울의 결핵병연구진찰소장으로 전임해 갔다.
해방 이후에도 수원결핵요양원은 유지되었다. 1945년 9월 해방 직후 소진탁 박사가 수원결 핵요양병원을 매수하여 원장으로서 직접 경영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 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 전염병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뒤, 다시 전라북도 위생과 촉탁으로 전주도립의원에서 일한 바 있다. 그는 직접 연구소를 설립해서 세균학적 연구 와 임상적 연구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자 했다. 1946년에 들어와 수원에 별도의 결핵요양소 건립이 추진되고,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에서도 결핵요양소를 국가에서 경영하기로 결정하면서, 소진탁 박사는 해방 이후의 혼란함과 운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6년 12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경영권을 넘겼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文化社(1983), 176쪽. 270쪽 참조. 소진탁 (1921~2016) 교수는 한국 기생충학과 열대의학계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편집자주: 의왕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를 이끄는 박철하 소장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고,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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