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20240101]1940~1960년대 면장의 구술을 통해 본 시흥군 동향

안양똑딱이 2024. 1. 1. 22:54

정부는 지난 2006년 1940~1960년대 면장의 구술을 통해서 본 지방행정과 지역민들의 동향 : 경기도 시흥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구술지룔를 제작했다.(사료계열 COH003_14) 

국사편찬위원 전자사료관에서 찾아낸 자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료철: 9건 

생산자: 변원신; 안현선; 윤태선; 이상윤; 이영자; 이준기; 장대흥; 정숙현; 최병혁; [최병택; 홍현영]

생산기간: 2006.04.21 ~ 2006.12.20

사료이력:

[산출물]

DV Tape 32

영상 DVD 27

마그네틱테이프 1

CD 1(OH_06_016_최병택_08)

녹취록1 574(A4)

녹취록2 574(A4)

구술시간 28시간23(1703)

기타자료(A4) 16

 

[정리체계]

이 사료계열에는 구술자별 9개의 사료철이 포함되어 있음

해제

1. 연구의 필요성 및 의의

 

면행정은 국가의 행정력이 일반적인 국민들과 직접적으로 부닥치는 지점에서 국가의 행정력과 그것이 행사되는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주는 부문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국가의 행정력이 실제 어떻게 행사되었는가, 나아가 일반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면행정의 실상을 살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면행정은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법제적으로 자치기구로서 행정기구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면행정은 자치행정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행정적 역할에 충실하였다. 특히 박정희 정권 이후 면행정은 일방적인 행정기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경향을 보였다. 본 구술작업팀에서는 이 점에 유의하여 해방 이후 중앙 차원에서의 정책과 정치적 갈등이 행정기구적 성격을 지녔던 면을 통하여 지역사회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행정적 규정력을 이용하여 근대화의 열망을 지니고 있던 지역사회의 인사들(본 작업에서 확인된 바 흔히 우익계열로 분류되는 세력)이 면장, 면서기 등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던 점에 주의하고자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정권기에 들어와 국가권력의 정당성은 근대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의지와 추진력이 있는가에 좌우되었다. 본 구술작업팀에서는 해방 이후 좌우대립 와중에서 우파의 지도자적 지역인사들이 대개 이러한 중앙권력의 전개과정에서 면장직에 진출하여 공장증설, 새마을운동 등과 같은 일체 지역사회발전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2. 구술자 및 구술의 특징

 

변원신씨는 안양시 안양3리 이장을 거쳐 안양협심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면직원으로 활동한 바는 없으나 1950년대부터 이장, 안양시민원상담역, 시의원 등을 거치면서 지역사회의 행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통한 인물이다. 특히 1970년대 이장활동을 하면서 새마을운동지도자를 거쳤으며 새마을운동의 실질적인 일선지도자로 활동한 바 있다. 새마을운동 진행과정에서 자금부족이라는 문제에 부닥치자 직접 새마을금고를 조직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는데 지역의 새마을금고 운동을 직접 이끈 인물로서 그 발전상과 전체 새마을금고의 전반적 변천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위치의 구술자였다. 구술자의 부친은 대한노총에서 활동한 바 있는 인사로서 좌익인사들과 대립하여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일찍부터 부친을 여의게 되어 생활난을 겪기도 하였는데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의식을 가지면서 나름의 봉사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안현선씨는 1961년부터 안양 부읍장을 역임한 인물로서 안양읍이 급격한 인구팽창을 겪을 당시 읍행정의 변화상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안현선씨에 의하면 박정희정권의 등장 이후의 행정과 그 이전의 행정은 성격상 매우 달랐다. 이전의 행정이 현상유지를 위한 행정으로서 한정된 예산을 수도, 하수처리, 도로보수 등 필요불가결한 부문에 투입, 실행하는 데에 그쳤다면 이후의 행정은 정부에서 시달되는 각종 행정명령을 완수해내는 데에 성격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박정희정권기 면행정은 급격히 그 업무가 팽창하였고 업무추진방식도 이른바 군대식이었다고 한다. 한편 전체적으로 보아 구술자가 구술에는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으며 많은 부분을 생략한 채 구술에 임하였다.

 

장대흥씨는 과천면 면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미군통역관을 지내면서 미국인의 합리성과 그 발전상에 접한 바 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인도 발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과천면사무소에 채용되어 세금징수 업무부터 시작하여 각종 업무를 모두 섭렵하였으며 특히 새마을운동 당시 총무계장으로서 직접 새마을운동을 지휘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과천지역의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는 식량증산계획, 지붕개량운동 등을 중심으로 구술해주었다.

구술자는 과천시에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올 당시에 면장에 취임하여 도시개발계획, 보상업무 등을 직접 맡은 바 있기도 하다. 구술과정에서 당시의 업무추진상황에 대해서도 구술하였다. 한편 그에 의하면 면장은 실질적인 권한 및 그 한계가 뚜렷하여 지역주민들의 로비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행정처리에만 한정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면직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면직원은 군-도에서 하달되는 명령을 일방적으로 수용,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다.

 

윤태선씨는 현 경기도 시흥시에 편입된 부천군 소래면의 부면장, 면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해방 직전에는 경성부청 국민총력과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1950년에는 소래면 부면장에 임명된 데에 이어 1961년에는 민선면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면장 취임 직후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면장직을 사임하게 되었으며 이후 농사에 종사하였다. 윤태선씨의 구술을 통하여 민선면장 선거 당시 지역사회의 선거쟁점이라든지 민선면장과 관선면장의 업무권한 상 차이, 양자 간 업무특성의 차이점 등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술자가 기억하는 경험이 적었고 구술에도 전체적으로 소극적으로 임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충분치 못하였다.

 

정숙현씨는 1937년부터 시흥군 수암면 면서기로 재직하였고 1956년도에 수암면 민선면장으로 선출되었고 1972년부터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일제시기부터 면직원으로 활동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일제시기 면행정실무에 대해 구술해줄 것으로 요청하였다. 일제말기 전시체제기에 이르러 징용, 징병업무를 직접 담당한 실무자로서 겪은 고충을 들을 수 있어 흥미로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90이 넘는 고령으로 인한 건강문제로 구술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고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등 구술상 어려운 점이 있었다. 따라서 일제시기 면행정과 해방 이후 면행정의 변화상에 대해서는 상세한 구술을 듣지 못하였다.

 

이상윤씨는 안양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사회활동과 공직생활을 하였다. 상업활동을 하던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고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194310월 발족한 기구인 조선식량영단에서 근무하였는데, 조선식량영단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일제 말기 쌀 공출과정이나 체계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그는 군대생활에 대한 다양한 기억이 있었고, 당시 경험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6년 안양에서 읍의원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상윤 씨는 읍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안양지역에서 각종 사회단체의 간부로서 활동하는데 주로 반공단체나 행정자문조직이었다. 이에 따라서 구술자의 사회활동을 중심으로 구술이 이루어졌고 안양지역의 사회적 변화로서 도시개발이나 사업체들의 동향, 사건·사고 등이 다루어졌다. 구술에는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역사자료로 사용된다는 부담 때문인 공식적인 내용을 반복하여 이야기하는 경향이 강했다.

 

최병혁씨는 의왕에서 마을이장, 면직원을 거쳐 의왕읍장을 역임하였다. 일제 말기 학교생활과 의왕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구술해 주었다. 한편 그에게 가장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다. 이장으로서 마을개발사업과 소득증대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런 활동을 통해 지역유지로 부상하게 된다. 1980년대에 의왕읍장을 역임했던 그는 당시 의왕지역의 동향과 읍행정에 관해 구술하였고 마지막으로 산림조합의 기능과 역할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영자씨는 전 의왕읍장 최병혁씨의 아내로서 최병혁씨 구술이 진행될 당시에 구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의향을 밝혔다. 이영자씨의 구술은 주로 남편의 이장, 읍장 활동 가운데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과 부녀회활동 등을 소개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약간 소략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준기씨는 시흥군 남면(현 군포시)에서 출생하여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961년 재건국민운동본부 시흥군촉진회 상임간사로 지역사회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되면서 지방공무원으로 환직되어 시흥군과 남면을 오가며 재직하다 16대 남면장을 역임하였다. 그가 면장을 하던 1973년부터 1976년은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여서 면장 재임시절의 활동 내용도 새마을운동과 맥이 닿아 있다. 현재의 군포시장이 형성되어 발전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새마을금고 조직과 운영에도 관여하였다. 군포가 공업지역으로 변화해가는 과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1대와 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고 취락구조개선사업에도 자신의 땅을 기꺼이 내놓으며 주민들을 독려하는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해서 지역에서 그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군포의 초대 민선시장에 도전해보고자 했으나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포기하고 그 대신 자신의 조직력을 제정구와 유선호 두 국회의원 선거에 동원하여 당선시키기도 했다. 재향군인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고 현재까지 관여하고 있다. 고향을 위해 봉사했다는 자부심이 컸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것을 지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후회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