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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서울의 관문 과천과 남태령 옛이야기

안양똑딱이 2024. 1. 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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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행정구역 변화

 

과천은 삼국시대애는 고구려의 '율목(栗木)' 또는 '동사흘(冬斯 )' 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이를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친 것을 고려 초에 '과주(果州)'로 고쳤고, 8대 헌종 9(1018)에 이를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3대 태종 13(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는데, 다음 해에 금천(衿川.지금의 서울 금천구와 시흥시 일부)에 합쳐 '금과(衿果)'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복구되고, 7대 세조 때에 다시 금천에 합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또 복구하였다. 그리고, 조선 말인 고종 32(1895)에 지방 관제 개편에 의해 군이 되었던 것을 일제 때인 19143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에 편입되어 면()이 되었다.

 

1979428일 경기도 조례에 의해 경기도 과천지구 지원 사업소를 설치하였다가 1982610일 과천지구 출장소로 승격하였다. 출장소로 승격한 해부터 정부 과천청사와 서울대공원이 들어앉게 되었고, 198611일에는 시로 승격하였다.

 

현재 과천시와 군포시, 안양시, 서울의 강남구, 금천구, 관악구의 각 일부 지역이 옛날 과천군에 속했던 곳이다.

 

과천의 옛 땅이름 '율목(栗木)', '율진(栗津)'에서 율은 그대로 '()'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율목''밤나뭇골', '율진''밤나룻골'의 뜻옮김으로 보기도 한다. '밤나뭇골''율목'이 어떻게 해서 '밤나룻골''율진'으로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당시엔 과천(율목) 영역이 남태령 너머 한강까지 미쳤기 때문에 나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과천의 또 다른 옛 이름 '동사홀'은 이두식 풀이로 보면 ' ' 또는 ' '이 된다.

 

이를 어떤 이들은 '돋골'에 해당한다며 '해 돋는 고을'이란 뜻으로 보기도 하나, 땅이름의 일반적인 정착 과정으로 볼 때 그런 의미의 땅이름이긴 어렵다.

 

'동사흘(冬斯 )'을 이두식으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또는 사

=홀 또는 골(고을)

>동사흘=도사골(돗아골. 돗골)

 

그러나, '돗골'이나 '도사골''해가 돋는'''으로 본 것까지는 무리가 없으나, 이것을 '해솟음'의 뜻으로 본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높은 지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 지역이 산이 많아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풀어 가야 할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평양 감사는 안 해고 과천 현감은 한다는데

 

조선시대에 과천은 남도 사람들에겐 꽤나 잘 알려진 고을이었다. 그것은 수도 한양의 남쪽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 지방의 길손들은 서울로 올라오려면 대개는 이 과천 땅을 지나야 했다. <대동여지도> 등의 옛 지도를 보면 천안 삼거리쪽으로 이어진 남도길이 직산, 진위(평택), 수원을 거쳐 이 과천 땅을 지나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내려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역시 과천 땅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다.

"동자기 바삐 건너

승방들 남태령 과천 인덕원 중화하고

갈미 사근내 군포내 미륵당 지나

오봉산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

 

그만큼 과천은 예 사람들이 서울로 올 때, 또는 남으로 내려갈 때 대개 거쳐야 했던 중요 고읍(古邑)이었다. 특히, 지방 사람들이 이 곳을 통과하자면 통과세(?)를 내야 지날 수 있어서 어지간히 신경을 쓰기도 했다.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

'현감이면 다 과천 현감이냐?'

 

옛 과천읍의 중심 마을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官門洞) 일대이다. 그래서, 전부터 이 곳을 '읍내(邑內)'라 했다.

과천 현감들은 곧잘 이 읍내를 지나는 길손들에게 돈을 받아 챙겼다. 그래서, 별 힘도 없는 사람이 아니꼽게 권세를 부릴 때 '과천 현감 행세하듯'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과천 현감도 무조건 그 통과세를 받아 낼 수는 없었던지 별별 구실을 다 붙여 길손들을 동헌 앞에 불러들여 돈을 내놓도록 했다. 관 앞에서 담뱃대를 물고 지나갔다느니, 말을 내리지 않고 지나갔다느니 하면서. 아전들은 심지어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트집을 잡아 문세를 물렸다. 이 문세 수탈로 인해서 길손들은 서울 문턱인 이 곳에서 적잖은 돈을 털려야 했다.

 

과천 읍내를 통과해도 서울로 가기까지는 또 돈을 털려야 할 곳이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과천 읍내 북쪽의 남태령이다.

이 남태령을 넘을 때는 길손들의 뜻과는 관계 없이 젊은이들이 고개 밑에서부터 달라 붙어 고갯길에서 도둑들부터 보호를 해 준답시고 동행을 하곤 꼭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고개넘잇돈'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월치전을 받는 곳은 이 곳 말고도 서울 근처만 해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무악재였다.

 

 

과천의 여러 마을들

 

지금은 과천시가 시가지 형태를 이루었지만, 40년 전만 하더라도 이 곳은 지방의 여느 시골과 별반 다름이 없던 곳이었다.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의 좁은 들 사이로 양재천의 상류가 지나고 있었고, 들 양쪽의 언덕 곳곳에 초가집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던 곳이 개발로 인해 많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이름높던 그 과천 고을이 옛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별로 그 옛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과천에 옛날에 있었던 마을들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관문골(官門洞), 읍내

전에 과천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과천 군청의 문이 있어서 '관문골'이라 했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그 옆의 '안점말(內店洞)'을 합해서 '관문리'라 했다.

이 마을에서 서쪽인 새술막으로 가는 길에 군수나 현감의 선정비들이 세워진 '비석거리'가 있었다. 그 비석들은 1972년 길을 넓히기 위해 중앙동 동사무소 옆으로 모두 옮겨 놓았다.

종앙동 동사무소 위에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부친(사도세자)의 능으로 참배하러 갈 때 쉬던 객사인 온온사(溫溫舍)가 있다.

 

·향교말(鄕校洞, 校洞)

지금의 문원동 관악산 입구쪽에 있던 한 마을로, 향교가 있어서 '향교말'이다. 발음 변화로 '생겻말', '생짓말' 등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개발로 인해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문원(文原)'이란 이름은 향교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새술막(新酒幕. 外店)

길가에 있던, 문원동의 한 마을로, 옛날에 길손들이 잘 쉬었다 가는 곳이어서 새로운 술막 거리가 형성되었고, 그 때문에 '새술막'이다. 읍내 바깥쪽으로, 주점이 있던 곳이어서 한자로 '외점(外店)'이라고도 했다. 전국의 옛 도로 가에는 새술막 또는 '신주막(新酒幕)'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많은데, 이러한 곳은 대개 옛날에 많은 길손들이 지나다녔던 곳이다.

 

·홍촌말(洪村)

문원동의 한 마을로, 남양홍씨가 많이 살아 '홍촌(洪村)' 또는 '홍촌말'이다. 개발에 밀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정부 과천청사가 들어섰다.

 

·구리안(九里內)

골짜기 안에 있어 '()의 안'이란 뜻의 말이 이런 땅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관문동이나 문원동쪽에서 보면 완전히 골 안쪽으로 보이는데, 개발로 인해 이 마을도 없어졌다.

 

·다락터(樓基)

'다락'이 있어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산골 마을에 많이 붙는 '()' 관계의 땅이름이 확실하다.

+> > >다락터

 

이 밖에도 과천시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마을이 있었다.

 

바바

 

·가는골(細谷) 문원동. 좁은 골짜기의 마을

·사기말(沙器幕)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나……

·새터말 '사기말''베레이' 사이의 새로 된 마을

·두집메 두 집밖에 없었으나, 나중엔 네 집이나……

·베레이(別陽洞) 청계산 골짜기 안의 벼랑쪽의 마을. '배랭이'

·한내(漢溪) 과천동. 옛날에 하리(下里) 지역. '큰 내'의 뜻. 큰 내(양재천)가 지나……

·삼거리(三巨里) 과천 읍내에서 올라와 두 길로 갈라지는 세 갈래의 길

·남태령(南泰嶺) 남태령고개의 과천쪽 마을.

·안골(內谷) 골짜기 안쪽 마을

·선바위(立岩) 산등성이에 바위가 서 있어. 지금 그 곳에 지하철역이 있다.

·뒷골(後谷) 골짜기 안 마을

·줄바위(注岩) 주암동. 원래 과천군 동면의 지역. 큰 바위가 줄지어 서 있어서. '죽바위'.

·돌무개(石浦) 돌이 많아

·삼부굴(三浦) 산밭골>삼붓골>삼부굴. 그 아래엔 '아래삼부굴'

·맑으내(맑내,淸溪) 막개동. '맑개'. 청계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내가. '청계산'이란 이름의 바탕

·가루개(葛峴) 갈현동. 본래 과천군 군내면 지역. 옛날 과천과 수원 땅의 경계. 수계(水界)

·찬우물(冷井) 찬 우물이 있어서. 과것길 길손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가일(佳日) '가루개' 서쪽 마을. '가장자리 마을'의 뜻.

·제비울 제비가 집을 많이 지어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좁은 골짜기'의 뜻

·샛말 등성이 가운데에 박힌 마을. 사이의 마을의 뜻.

·옥탑골 '오탓골'이란 이름이 변한 듯. '외진 터의 마을'이란 의미 지녔을 듯

·자경골(自耕) '자긍골'이 원이름일 듯. '작은마을'의 뜻을 지닌 듯

 

 

남태령

 

이 고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워낙 고개가 높아 예부터 많은 도둑들이 들끓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이 고개 밑에는 행인들이 고개를 잘 넘을 수 있도록해 준다며 장정들이 대기해 있었다고 한다.

이 고개를 전에는 여우가 많아 '여우고개'라 하기도 했었다

정조 임금도 수원을 오고갈 때 이 고개를 주로 넘었는데, 그 때까지도 이 고개를 대개 '여싯고개' 또는 '여우고개'라고만 불러 왔었다. 한자로는 '호현(狐峴)' 또는 '엽시현(葉屍峴)'으로 씌어 왔다.

학자들 중에는 '여우'의 비표준어로 '여시' 또는 '야시'가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높은 재'가 아닌 '낮은 고개'라 해서 '얕은 고개'의 표현인 '야지고개' 또는 '야시고개', '여시고개', '여우고개'가 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어떻든, '여우고개'가 한자로 뜻옮김된 것이 '호현'이고, '여시고개''여시'가 소리옮김으로 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땐가 정조 임금이 이 고개를 넘다가 근처 토박이 사람에게 이 고개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가 그 요사스런 짐승 이름이 들어간 고개의 이름을 바르게 댈 수 없다면서 서울 남쪽의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南泰嶺)'이란 이름으로 얼렁뚱땅 대답을 한 것이 그대로 이름으로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태령'이란 이름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이미 있음이 문헌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이 전설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

남태령은 또 고개가 너무 후미지고 도둑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웬만한 장정도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혼자서 넘질 않았다. 이를 악용해 남태령 밑의 '한내'라고 하는 곳에서는 행인들의 돈을 뜯어 먹는 얌체 '고개넘이꾼'이 있었다. 이들은 도둑들로부터 행인을 보호해 준답시고 함께 동행을 하여 고개를 넘겨 주고는 돈을 요구했다. 이른바 '고개넘잇돈' 한자로는 '월치전(越峙錢)'이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방에서 한양으로 오는 사람들이 과천을 거쳐 지금의 과천동 '삼거리'라는 곳에 이르면 남태령길로 질러 가느냐 조금 돌더라도 말죽거리쪽으로 돌아가느냐를 결정하느라 망서리곤 했었다.

남태령은 그만큼 예부터 넘기가 거북한 고개였다. ///

우리나라에는 많은 지역에 여시골 즉 여우고개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인적이 드물고 산세가 험해 여우의 출몰이 심했던 까닭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여우고개는 남태령(南泰嶺)이었다.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고 부르게 된 것은 호랑바위가 있는 골짜기에 여우가 많이 출몰하므로 여우골이라 하였는데, 옛날 천년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하여 이 고개에 나타났다는 데서 유래한 설이 있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의 경계이며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의 고개로 18세기 말 효성이 극진한 정조임금이 수원에 있는 선친 사도세자 능()을 자주 참배하러 다녔는데, 어느날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갈 때 "이 고개 이름이 무었이냐?"고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엉겁결에 "남태령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시기하던 자가 "이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인데 어찌 거짓을 고하느냐?" 라고 힐책하자 "고개 이름은 본래 여우고개이지만 신하로서 임금께 그와 같은 상스러운 말을 여쭐 수가 없어 서울에서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이기에 남태령이라 했습니다"라고 아뢰니 정조가 이를 칭찬하였으며, 그 후부터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남태령이라는 말은 광해군 때 만들어진 춘향전에 이미 나오고 있으므로 정조 이전에 불리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