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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9]과천과 남태령 옛길

안양똑딱이 2024. 1. 9. 14:20

며칠씩 묵으면서 과거장에서 갖추어야 할 예절과 기풍등을 매사에 빈틈없이 익히 고 수련한 다음 과거 전날은 이 산 자락에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몸을 정갈하게 닦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해서 과거를 보 러가는 과객들이 목욕을 하는 시내라 해서 과천(科川)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도 하고 과거 보러 가는 과객들이 묵어가는 촌 이라 해서 과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점차 실과 자를 붙혀서 부르게 된 오늘의 과천이라고 전해옵니 다.

http://www.gctour.go.kr/gctour/kor/infor/intro_5_9.jsp

 

서울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나루에 이르고, 다시 흑석동(黑石洞)을 지나 강변을 끼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동작동(銅雀洞) 이수교(梨水橋)를 우편으로 돌아가면, 승방평(僧房坪) 석굴암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6쯤 가면 큰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가 바로 남태령(南泰嶺)이다. 이 고개는 예전에 과천(果川)을 거쳐 수원(水原)으로 가던 옛길이었다. 또한 삼남(三南)으로 통하던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여 묘소로 가시던 길이었다.

 

과천을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가면 물맛이 좋아 정조께서 가자(加資)로 당상(堂上)벼슬을 제수(除授)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위 산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는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아버님이신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할아버지에 의해 돌아가실 때 협력했다는 김상로(金尙魯, 1702-1766)의 형인 좌의정(左議政) 김약로(金若魯, 1694-1753)의 묘소이다.

 

곡담을 쌓아 정승묘답게 모두 갖추어진 묘였지만, 정조께선 지난날의 아버님의 애절함을 생각하여 지나는 길 옆에 놓인 그 묘소조차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뒤 안양에 만안교(萬安橋)를 새로 놓고, 새 노정(路程)을 택하여 다니게 된 것이 이러한 연유에서였다고 한다.

 

정조(正祖)께서 과천에서 쉬어 가실 때, 과천의 옛 고을 이름을 따서 이 곳 아헌(衙軒)인 동헌에 부림헌(富林軒), 내사(內舍)를 고요하고 편안하다 하여 온온사(穩穩舍)라 명명(命名)하고 친히 현판을 썼으니(정조 14(1790) 211), 지금까지도 그 현판이 남아 있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인 남태령(南泰嶺)에 얽힌 사연이 있다.

남태령에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관악산을 넘나드는 여우가 많이 출몰하였다 하여, 여우고개狐峴라 불러 오고 있었다.

하루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모신 사도세자의 능원에 행차하실 때 남태령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멈추시고 잠시 쉬어가게 되자 한 촌로(村老)에게 넌지시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옵나이다

 

하고 즉석에서 고개의 이름을 고치어 아뢰었던 것이다.

정조께서는 이 고개의 이름이 여우고개임을 이미 듣기도 했으려니와, 한편으로는 일찍이 고려조의 공신(功臣)이요,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는 강감찬(姜邯贊)이 이 고개를 지나가다가 여우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여 크게 꾸짖어 호령하기를,

네 여우들이 다시 이 고개에 근접을 하는 날이면, 너의 족속은 모두 멸종할 줄 알아라 하고 한 소리가 있은 후로 다시는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을 들었기도 하였는지라, 효심도 극진하지만 인자(仁慈)하기로 유명한 정조께서도 그 괘씸

함을 참지 못하시고,

 

너 어찌 거짓 이름을 대었느냐? 그 죄 죽어도 마땅할 지니라

하며 크게 꾸짖으시었다.

 

촌로는 엎드려 죄를 기다리는데, 정조께선 촌로에게 거짓 이름을 댄 사유를 또 다시 묻자, 촌로는 죽을 때가 되느라고 그랬사옵니다. 상감마마께 감히 거짓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여우고개이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쌍스러운 이름을 입바르게 알려올림이 황송하옵기로, 생각나는 대로 알렸사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남태령이라 했는고 하고 정조께서 물으니

 

다름이 아니오라. 이 고개가 서울서 남쪽으로 오면서 맨 처음 있는 큰 고개이옵기로 그리 아뢰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정조께선 촌로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는 잠시 가졌던 노여움을 풀고,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셨는데, 그후로는 이 고개를 남태령(南泰嶺)이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 촌로는 과천에 살던 변씨(邊氏)라 전해지며, 변씨(邊氏) 일족이 아직도 남태령 부근에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