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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4]1911년 개교한 과천초등학교 역사

안양똑딱이 2024. 1. 4. 07:26

1920년대 과천공립보통학교

 

과천초등학교의 역사는 과천지역 초등교육의 역사이기도 하며 지역 교육의 발전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과천초등학교는 1911년 개교하여 1912년 2월 13일 조선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낮은 수준의 실업교육만을 주로 시킨다는 교육방침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곳곳에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들의 교육열을 어느 정도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과천보통학교를 비롯하여 소수의 정식학교를 개교토록 한 것이었다. 참고로 일제 하 당시 초등교육기관으로는 보통학교가 있었고 중등교육기관으로 고등보통학교가 있었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생들은 다시 국내 전문학교로 진학하거나 일본으로 유학하여 예과를 다닌 후 대학교를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등보통학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보통학교 교육으로 만족하여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천보통학교는 곧 과천현 객사건물을 교사(校舍)로 삼아 학생들을 수용하였다. 과천보통학교가 설립될 당시 과천은 행정구역상 군(郡)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1914년 일제 당국의 행정구역변경 조치로 시흥군 관내에 일개 면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시흥군 관내로 편입될 무렵 시흥지역에는 과천보통학교 외에도 안산보통학교와 시흥보통학교가 함께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거리가 멀어 과천 주변의 군포, 안양, 광주 등지의 주민들은 아동들을 대개 과천보통학교에 입학시키곤 했고 이 때문에 과천은 주변지역 중에서도 교육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되었다.
1912년 당시 과천초등학교에 부임한 교원은 훈도(訓導) 1人, 부훈도(副訓導) 2人으로 모두 합쳐 3명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 하 한국의 초등교육 연한은 4년에 불과했고 전체 취학대상 아동의 10% 이하만이 입학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과천보통학교 역시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고 자연히 교원도 많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하에서도 한국인들의 교육열기가 점차 증대되어 1920년대 이래 학생수가 점차 증가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서울거주민들이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의해 대거 과천으로 유입하면서 8-9학급정도로 정원이 불어나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되기 직전 태평양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던 일본은 연합군의 폭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서울시민들을 대상으로 소개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따라 다수의 서울 거주 학생들이 과천으로 이주해야했고 과천국민학교의 학급수도 일시적이나마 자연히 증가하게 되었다. 해방을 전후하여 과천초등학교에 재임하였던 최명식씨(전 안양시교육청 학무과장, 과천초등학교 교장)에 의하면 해방 직전 총학급은 8-9학급이었고 한 학급의 인원은 50명 내지 60명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의 어수선한 와중에서 과천초등학교 전체 재학생이 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양적인 팽창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아울러 서울지역 학생들이 다시 원 거주지로 돌아가 1945년 말 무렵에는 한 학급 인원이 40여명 정도로 약간 줄어들게 되었다. 1947년도에 입학한 최종수씨(현 과천문화원장. 과천초등학교 40회 졸업생)에 의하면 1953년 무렵 총 재학생은 400여명에 이르고 졸업생은 101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시기 교육은 식민지적 억압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제도적으로 보아도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지 않은 까닭에 다수의 아동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교육을 포기해야만 했고 교육방침 역시 한국인들을 일제 통치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데에 맞추어져 있었다. 일제시기 과천보통학교에서 내세웠던 교육방침 역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과천보통학교의 교육방침은 “실천주의의 도덕교육으로 품성을 도야하고 유태도식(遊怠徒食)의 풍조를 없앤다”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들이 게으르고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일제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는 한국사회가 정체되어있어 발전의 가망성이 없고, 오직 일본의 지도 하에서만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이른바 ‘조선사회 정체성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과천보통학교의 교육방침에도 한국인들이 ‘유태도식(遊怠徒食)을 일삼는’ 풍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없애는 데에 목표가 있다고 표방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교육의 목표는 상급학교로의 진학이라든지 직업관의 정립 혹은 인성의 계발에 있지 않고 농사교육 및 실과교육의 장려와 "현재 상태에 만족하여 체제에 순응하는 데에 있었다.
식민통치에 순응하는 인간상을 만든다는 목표 하에 교육이 이루어져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수월하지 않았던 일제시기와는 달리 해방 이후 과천초등학교 졸업생의 상당수는 중학교 등의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종수씨(과천초등학교 40회 졸업생)에 의하면 1954년 당시 졸업반은 두 개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반은 중학교로 진학할 학생들로 구성되었고 2반은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졸업생의 50%가 상급학교로 진학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해방 직후 과천초등학교는 진학할 학생들을 상대로 ‘특별과외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보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보여 상당수의 학생들이 중학교 진학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해방 전후 졸업생들이 진학한 중학교는 주로 안양이나 영등포쪽에 있는 학교로서 특히 서울에 소재한 학교의 경우에는 그 인기가 높아 성적이 우수한 경우가 아니면 입학하기 어려웠다고도 한다.
한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교생활에도 많은 지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전쟁 발발과 함께 모든 학사는 일시 정지되었고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야 학사일정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1951년 ‘1.4후퇴’로 다시금 휴교를 단행하였고 전황이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면서 비로소 피난길에서 돌아온 학생들을 모아 정상적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전쟁 와중에 과천초등학교 건물이 폭격으로 전파되는 손실을 입었다. 그 때의 피해는 건물 파손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당시까지 보관하고 있던 학적부 및 학교연혁자료가 모두 소실되어 과천의 교육을 생생히 보여줄 수 있는 중요자료가 모두 없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혼란한 상황 하에서도 당시 교장을 역임하던 오병선씨가 졸업생 명부만은 가지고 피난길에 올라 현재까지 각 기수별 졸업생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이 명단은 과천초등학교총동창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이후 전쟁 중 폭격으로 교사가 파손되어 다시 수업을 진행하기가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학교 측은 임시방편으로 관문리공회당과 폭격의 피해를 입지 않은 운동장 옆 관사건물을 교실로 활용하였다. 그런데 겨울만 되면 이들 임시시설에 난방을 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운동장에 지하 50cm 가량 터를 파고 움집을 만들어 여기에서 수업을 진행토록 하였다. 이 움집은 과천 관내에 소재한 부락에서 자발적으로 각 1개씩 만들어준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학부모들의 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창회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봄이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움집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휴교도 잦았다고 한다. 이러한 불편은 1951년 미군이 제공한 목재를 이용하여 임시교사를 만들게 되면서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었다. 현재의 교사건물은 1973년 6월에 준공한 것으로 원래 교사가 있던 자리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구 건물은 현재의 운동장 앞부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때문에 운동장은 본관 건물 뒤편에 자리잡은 형태였다. 미군의 지원으로 임시교사가 지어진 곳도 구 본관터였는데 1973년 교사를 신축할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던 것이다. 학교건물 신축 당시 설계를 담당하고 있던 안양교육청 시설계는 다른 학교에 비해 과천초등학교의 기둥을 더 크게 짓도록 하였다. 이는 처음 과천초등학교가 개교할 당시 건물로 쓰이던 객사 앞에 둘레가 큰 나무가 자리잡고 있어 많은 학생들이 추억하는 바가 되었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재도 남아있는 이 기둥은 교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천초등학교의 교사는 그 후로도 몇 차례 확장공사를 거듭하였다. 1974년 12월에는 본관2층에 9개 교실을 개축하였고, 1980년대 이후 신도시개발로 늘어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1988년 10월에 8개 교실을 다시 증축하였다. 이듬해에 또다시 4개 교실을 만들었고 1990년 11월에 5개 교실을 축조하였다. 이처럼 교실 증축이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행해진 것은 충분한 예산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년 학교 측에 지원되는 국가예산이 교실을 대폭 증축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안양교육청에서는 교사 증축이 필요한데도 예산이 지원되지 않아 국유 산야를 매각하는 방법으로 필요한 비용을 겨우 조달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안양교육청 관련업무 책임자였던 최명식씨의 증언에 의하면 국고로 편입되어 있던 현 과천성당 뒤쪽 야산을 매각하고 남은 비용을 교실확장에 썼다고 한다. 이 산은 해방 이후 적산으로 매각대상이었는데 마침 학교재산이 필요한 터였기에 이를 국유재산으로 삼았던 것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교시설이 착착 갖추어짐과 동시에 재학생 수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전쟁 직후인 1953년 졸업생이 90명에 불과하던 것이 1970년도에는 208명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 이래 과천으로 유입해오는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과천초등학교에 수용된 학생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과천초등학교에 본격적으로 학생 수가 증가한 것은 1980년대 신도시개발로 인구가 급격히 유입한 때부터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 과천초등학교는 급격한 팽창을 거듭하였다. 먼저 1981년에 병설유치원을 개교하였고 1982년에는 특수학급을 1학급 설립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1982년 사이 학생이 급격히 증가하여 학급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는데 1983년도의 경우 6학년생이 377명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학급수도 30학급정도로 늘어났고 학급당 인원도 비례하여 증가하였다. 이에 안양교육청에서는 새로이 초등교육시설을 증설할 필요를 느끼고 1982년 9월 1일부로 문원국민학교를 개교하고 과천국민학교에서 12학급 711명의 인원을 전학시키도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격증하는 교육수요를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구증가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1983년도 3월 1일에 다시 청계국민학교를 개교하고 과천국민학교생 13학급 478명을 전학시켰고, 1984년 3월 1일에는 관문국민학교로 13학급 644명을 전학토록 하였다.
학교의 증설과 함께 과천초등학교의 학생구성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이전 대부분 가정이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면 도시화로 인해 학부모들의 직업이 다양해지고 소득수준도 약간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학교 정규수업 이외에 사교육을 받도록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편 학교가 4개소로 늘어난 결과 성적을 둘러싼 학교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1년에 1회 경기도학력평가고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성적에 대해서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비공식적 방법으로 학교 간 순위가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 순위에서 하위로 처지지 않기 위해 각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율학습을 실시하거나 보충수업시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가 되면서 과천초등학교 학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참여도 활발해졌다. 학부모들이 학부모회 혹은 육성회라는 이름으로 후원조직을 구성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것이다. 학부모회에서 자발적으로 모금을 행하고 피아노 등 교육에 필요한 설비를 하기도 하였고 각종 행사에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간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현재 학부모회는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각 학교에서 3학년 학생 이상을 상대로 실시하고 있는 급식이 2000년도부터 모두 무료로 공급되고 있다는 점과 기타 의식수준의 향상으로 학교 측에서 잡부금을 요구하는 사례는 거의 없으며 학부모들의 자발적인 관심과 참여로 활동을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천초등학교는 1990년대 이후에도 많은 발전을 겪었다. 1992년에는 병설유치원 3학급을 편성하였고 1992년 인천교육대학교 교육실습 협력학교로 지정되어, 교생실습을 지원하고 있다. 처음 개교한 1912년부터 2005년도까지 과천초등학교가 배출한 졸업생은 모두 13,324여명에 이를 정도이며 이들 중 상당수가 과천지역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현재 과천초등학교는 35학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59명의 학생이 재학 중에 있다. 이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는 모두 43명에 이른다.
한편 과천초등학교는 1996년 3월 1일자로 교육부 방침에 따라 기존 ‘초등학교’ 명칭을 버리고 ‘과천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 이어 1998년 2학기에 각 교실 교수시설을 대폭 확충하여 선진화된 수업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