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훈]안양천프로젝트의 세 가지 쟁점
[2006/01/02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2006/01/02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안양천프로젝트의 세 가지 쟁점
글/ 이명훈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
2003년부터 <안양천프로젝트 Anyang-river project>를 기획하고 진행시킨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가 던지는 비평적 쟁점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예술감독을 맡았던 백기영 씨에게 몇 가지 쟁점과 관련된 질문을 해보고자 한다.
2004년 9월부터 한 달간 안양천 일대와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supplement space Stone & Water)에서 진행된 <안양천 프로젝트>는 미술이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방법으로 사회의 쟁점을 풀어나갈 것인가를 모색했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흔히 작가/그룹 단위의 프로젝트가 아닌 공간 단위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안공간네트워크의 회원 공간 가운데 스톤앤워터는 작가 발굴 외에도 공공미술프로젝트나 문화예술 교육프로그램을 자체 기획하여 예술과 일상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즉 대안적 미술을 미술계 내부로부터 도출해내는 방식 이외에 미술계 외부로 관심을 돌려 과연 미술의 자기 존재성을 사회나 일상의 맥락에서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특히 공간의 설립자인 박찬응 씨에게는 작가지원이나 기획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한 미술저널의 기고에서 “진정한 대안은 지역미술에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의 주장은 예술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그 맥락 속에서 자신의 몫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대안의 진정성은 구체적인 지역의 생활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미술)공간이 단순한 매개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벗어나 능동적이며 공격적인 제안자 혹은 제작자로서 미술의 현장 일선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의 쟁점을 찾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쟁점은 예술(藝術)과 정치(政治)의 관계에서 예술(가)의 태도의 문제다. 예술의 바깥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이다. 특히 20세기를 지배해 온 모더니즘의 예술관, 즉 예술의 자율성을 주창하는 모더니즘이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예술(가)의 정치적 개입이라든지 참여에 대해서 가지는 거부반응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 서구의 모더니즘을 불연속적으로 수용한 한국미술의 경우 그 병패의 심각성은 수많은 왜곡과 변질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술사가 미(美)의 역사로 기술되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비정치적인, 개인화된 개념이다 보니 미술작품의 가치판단을 하는 미술비평이나 미술사 역시 그 내용보다는 형식에, 그것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보다는 민족 혹은 개인의 심미적 기준이나 개인사적 내용으로 국한되어 담론이 형성이 되기 때문에 동시대적 미술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 안이 아닌 바깥으로 나갔을 때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이 문제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공공미술의 경우 예술의 공공성과 자율성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갈등들이 충돌하게 된다.
두 번째 쟁점은 ‘지역(地域)’에 대한 문제이다. 박관장의 진술에서 ‘지역의 생활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지역미술’로 부를 수 있을지는 좀더 숙고해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한국미술계에서 건축물장식으로써의 공공미술을 불식시키고 뉴장르로써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대안이 기성의 인식과 심하게 부딪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 혹은 그것의 ‘미술’ 역시 비슷한 인식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양천 프로젝트>의 두 번째 쟁점으로 백기영 예술 감독에 의해 제기된 ‘지역주의(Localism)’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 감독은 “지역주의는 폐쇄적인 향토주의를 대신하는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표방하는 국제적인 지역주의 네트워킹 차원의 반(反)글로벌리즘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두 가지 저항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미국중심의 글로벌리즘과 서울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주의는 문화인류학자 호미 K. 바바(Homi K. Bha Bha)가 이야기한 ‘문화의 장소화(Die Verortung der Kultur)’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저항’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결과 어떤 전복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국제적인 지역주의 네트워크는 어떤 그림인지가 궁금해진다. 또한 발터 벤야민의 두 개념 ‘정치의 미학화’와 ‘예술의 정치화’와 비교해 ‘문화의 장소화’와 ‘장소의 문화화’의 차이는 무엇일지...<안양천 프로젝트>는 과연 ‘문화의 장소화’인 것인지 ‘장소의 문화화’인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앞의 두 가지 쟁점에서 마지막 세 번째 쟁점을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이다. 이것은 예술과 정치, 지역주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종합적인 쟁점이기도 하다. <안양천프로젝트>는 뉴장르로써 새로운 유형의 공공미술을 지향했다. 백기영 예술감독은 <안양천 프로젝트>의 공공미술의 유형에 대해 1997년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기획했던 클라우스 부스만과 카스퍼 쾨니히의 모토 : “절대로 예술(미술)로 공공공간을 장식하지 않는다.”를 인용하면서 ‘공공을 위한 미술(Art for public)’과 ‘공공장소에서의 미술(Art in publicspace)’을 구별하였다. 공공장소에서의 미술-그것은 공공대중의 시야 또는 시각을 즐겁게 만드는 미술의 장식성을 배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공공의 요구보다 우선하는 것은 예술가의 자율성, 공공장소에서의 미술에 대한 작가의 미적판단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의 자율적이고 순수한 형식을 주장하면, 이것은 언제고 ‘공공을 위한 예술(Art for public)’으로 오해되고 있는 공공미술과 부딪힌다.”는 지적이나, “공공공간의 색다른 경험을 유발시키는 장치를 통해 예술은 자신의 언어로서 기능하고, 자기 스스로 완결적인 목적을 달성함으로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위치에 자리매김 하는 것” 등의 설명에서 그가 생각하는 ‘공공장소에서의 미술(Art in publicspace)’을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류병학 씨가 주장하는 ‘미’와 ‘기능’이 결합된 공공미술의 개념인 ‘퍼블릭퍼니처(Public Furniture)’와 함께 명쾌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 즉 복합적이고 다양한 학제적 결합이 필요한 공공미술은 어떻게 보면 상호소통(Intercommunication)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예술의 자기 정치화를, 장소의 문화화를 공공의 장에서 다양한 이들과 대화할 수밖에 없다. 뉴장르 퍼블릭아트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좀더 이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리라 본다. ■
이 글은 대안공간네트워크가 주최한 <도어투도어3>의 스톤앤워터 심포지움 원고입니다.
글/ 이명훈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
2003년부터 <안양천프로젝트 Anyang-river project>를 기획하고 진행시킨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가 던지는 비평적 쟁점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예술감독을 맡았던 백기영 씨에게 몇 가지 쟁점과 관련된 질문을 해보고자 한다.
2004년 9월부터 한 달간 안양천 일대와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supplement space Stone & Water)에서 진행된 <안양천 프로젝트>는 미술이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방법으로 사회의 쟁점을 풀어나갈 것인가를 모색했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흔히 작가/그룹 단위의 프로젝트가 아닌 공간 단위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안공간네트워크의 회원 공간 가운데 스톤앤워터는 작가 발굴 외에도 공공미술프로젝트나 문화예술 교육프로그램을 자체 기획하여 예술과 일상의 접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즉 대안적 미술을 미술계 내부로부터 도출해내는 방식 이외에 미술계 외부로 관심을 돌려 과연 미술의 자기 존재성을 사회나 일상의 맥락에서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특히 공간의 설립자인 박찬응 씨에게는 작가지원이나 기획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한 미술저널의 기고에서 “진정한 대안은 지역미술에 있다”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그의 주장은 예술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그 맥락 속에서 자신의 몫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대안의 진정성은 구체적인 지역의 생활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미술)공간이 단순한 매개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벗어나 능동적이며 공격적인 제안자 혹은 제작자로서 미술의 현장 일선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의 쟁점을 찾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쟁점은 예술(藝術)과 정치(政治)의 관계에서 예술(가)의 태도의 문제다. 예술의 바깥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이다. 특히 20세기를 지배해 온 모더니즘의 예술관, 즉 예술의 자율성을 주창하는 모더니즘이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예술(가)의 정치적 개입이라든지 참여에 대해서 가지는 거부반응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 서구의 모더니즘을 불연속적으로 수용한 한국미술의 경우 그 병패의 심각성은 수많은 왜곡과 변질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술사가 미(美)의 역사로 기술되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비정치적인, 개인화된 개념이다 보니 미술작품의 가치판단을 하는 미술비평이나 미술사 역시 그 내용보다는 형식에, 그것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보다는 민족 혹은 개인의 심미적 기준이나 개인사적 내용으로 국한되어 담론이 형성이 되기 때문에 동시대적 미술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이 안이 아닌 바깥으로 나갔을 때 문제는 훨씬 복잡하다. 이 문제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공공미술의 경우 예술의 공공성과 자율성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갈등들이 충돌하게 된다.
두 번째 쟁점은 ‘지역(地域)’에 대한 문제이다. 박관장의 진술에서 ‘지역의 생활과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지역미술’로 부를 수 있을지는 좀더 숙고해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한국미술계에서 건축물장식으로써의 공공미술을 불식시키고 뉴장르로써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대안이 기성의 인식과 심하게 부딪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 혹은 그것의 ‘미술’ 역시 비슷한 인식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양천 프로젝트>의 두 번째 쟁점으로 백기영 예술 감독에 의해 제기된 ‘지역주의(Localism)’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 감독은 “지역주의는 폐쇄적인 향토주의를 대신하는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표방하는 국제적인 지역주의 네트워킹 차원의 반(反)글로벌리즘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두 가지 저항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미국중심의 글로벌리즘과 서울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주의는 문화인류학자 호미 K. 바바(Homi K. Bha Bha)가 이야기한 ‘문화의 장소화(Die Verortung der Kultur)’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저항’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결과 어떤 전복이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국제적인 지역주의 네트워크는 어떤 그림인지가 궁금해진다. 또한 발터 벤야민의 두 개념 ‘정치의 미학화’와 ‘예술의 정치화’와 비교해 ‘문화의 장소화’와 ‘장소의 문화화’의 차이는 무엇일지...<안양천 프로젝트>는 과연 ‘문화의 장소화’인 것인지 ‘장소의 문화화’인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앞의 두 가지 쟁점에서 마지막 세 번째 쟁점을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이다. 이것은 예술과 정치, 지역주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종합적인 쟁점이기도 하다. <안양천프로젝트>는 뉴장르로써 새로운 유형의 공공미술을 지향했다. 백기영 예술감독은 <안양천 프로젝트>의 공공미술의 유형에 대해 1997년 뮌스터 조각프로젝트를 기획했던 클라우스 부스만과 카스퍼 쾨니히의 모토 : “절대로 예술(미술)로 공공공간을 장식하지 않는다.”를 인용하면서 ‘공공을 위한 미술(Art for public)’과 ‘공공장소에서의 미술(Art in publicspace)’을 구별하였다. 공공장소에서의 미술-그것은 공공대중의 시야 또는 시각을 즐겁게 만드는 미술의 장식성을 배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공공의 요구보다 우선하는 것은 예술가의 자율성, 공공장소에서의 미술에 대한 작가의 미적판단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의 자율적이고 순수한 형식을 주장하면, 이것은 언제고 ‘공공을 위한 예술(Art for public)’으로 오해되고 있는 공공미술과 부딪힌다.”는 지적이나, “공공공간의 색다른 경험을 유발시키는 장치를 통해 예술은 자신의 언어로서 기능하고, 자기 스스로 완결적인 목적을 달성함으로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위치에 자리매김 하는 것” 등의 설명에서 그가 생각하는 ‘공공장소에서의 미술(Art in publicspace)’을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류병학 씨가 주장하는 ‘미’와 ‘기능’이 결합된 공공미술의 개념인 ‘퍼블릭퍼니처(Public Furniture)’와 함께 명쾌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 즉 복합적이고 다양한 학제적 결합이 필요한 공공미술은 어떻게 보면 상호소통(Intercommunication)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예술의 자기 정치화를, 장소의 문화화를 공공의 장에서 다양한 이들과 대화할 수밖에 없다. 뉴장르 퍼블릭아트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좀더 이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리라 본다. ■
이 글은 대안공간네트워크가 주최한 <도어투도어3>의 스톤앤워터 심포지움 원고입니다.
2006-01-02 11: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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