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 마루에 걸터 앉아 내다 보니 바로 앞은 이제 막 벼꽃이 피는 푸른 논이 펼쳐져 있고 그 논 너머로 물왕골 군자 가는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하얗게 가로로 놓였다.
제법 더운 날씨일텐데 그의 집 마루는 집 뒤 언덕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으로 시원하였다.
"할머닌 어디 가셨는데?"
"응. 장에."
"시장?"
"응."
"야. 담배 펴볼래?"
"......."
"우리 할머니 담배야."
그가 마루 끝 한 쪽에 놓인 곰방대에 봉초를 채우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제법 익숙하게 불을 붙이고는 쭉쭉 소리를 내며 빨더니 훅하고 흰 연기를 내뿜었다.
집에 들어설 때부터 나던 외할아버지 방에서 맡던 쌉싸한 냄새가 바로 담배연기에 찌든 냄새였다.
"콜록콜록"
천봉이 내뿜은 연기를 맡고 기침을 하자 그가 댓돌에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 원상태로 두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와 함께 살지 않는다고 했다.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갑자기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엄마는 언제 오셔?"
"몰라. 올 때 되면 오겠지."
그는 재미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라."
"응."
그렇지 않아도 나도 재미가 없던 판이었다.
"갈게."
"응. 잘가라."
그 날 그렇게 천봉의 집에 다녀오고 나는 집에서 아버지의 담배를 몰래 빼 피워 보았다.
아버지의 담배는 천봉 할머니의 담배와 그 냄새가 달랐다.
마치 시골 외가에서 소죽을 쑬 때 태우던 짚단에서 나던 연기나 혹은 마른 낙엽을 태울 때 나던 연기처럼 구수하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사학년 여름에 나는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논으로 난 창문을 열고 제법 깊게 들이키기까지 하다가 어느날 갑자가 목이 따끔거리고 콧물이 심하게 나더니 더 이상 담배를 피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큰 눈을 껌뻑이며 종례시간을 기다릴 때는 기대감에 두근거리곤 했다.
내 머리통만한 빵을 받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양동이에 가득 빵을 담아 들고 오는 것은 천봉이 자주 맡아서 했다.
어느 날인가 하루는 그 빵이 부족하였다. 그날 천봉이 빵을 받을 수 없었는데 기껏 들고와서 자신의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제법 서운하고 서러웠을 법 하였다.
천봉이 눈물을 보이자 함께 나눠주던 옆반 담임 선생이 천봉의 뺨을 때렸다.
"이 자식. 어디서 울어. 응?"
우리 담임선생님은 교무실에 다녀오시느라 자리에 없었는데 그 사단이 났던 것이다.
"선생님. 뭐하시는 거예요?"
막 돌아 오다가 그 장면을 본 선생님이 화가 나서 큰소리로 따졌다.
"왜 남의 애를 때리느냐고요?"
"아니, 뭐 애가 빵 안준다고 우니까....."
"그런다고 그렇게 때려요? 예? 일학년짜리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예요. 사과하세요."
"빨리요. 빨리 사과하세요."
잠시 어안이 벙벙해하던 옆반 선생도 화가 났는지 욕설을 했다.
"에이. 씨발."
"뭐요? 씨발?"
"어디서 욕이야? 응?"
두 선생님의 싸움은 점점 커져 갔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여자분이셨는데 남자선생에게도 절대로 꿀리지 않았다.
옆반 담임선생이 주먹을 들어 우리 선생님의 얼굴을 마치 때릴 듯이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결국 소란을 듣고 선생님들이 몰려와 싸움은 일단락 되었다.
그리고 그 옆반의 남자선생은 학교를 그만 두고 떠났다.
그 일이 있은 뒤로도 나는 천봉에게 왜 울었느냐고 물은 적이 없었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육학년 졸업이 가까워지는 이학기에는 밖에 나가서 사진도 모여 찍고 중학교에 가면 어찌어찌 해야 된다는 둥 우리들은 틈만 나면 할 얘기가 많아 늘 시끄러웠다.
운동장 끝에 하늘 높이 치솟은 미류나무 그늘에 모여서 또 이야기꽃이 한창일 때 일년 후배 성진이 또 나를 놀리고 달아났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라고 해도 학년이 다른 그는 내 눈에도 어려보였다.
범고개 안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사는 그는 걸핏하면 나를 놀리고 제 집으로 달아나 숨곤 하였다.
혼내주겠다고 쫓아갔다가도 큰 대문을 밀고 들어가 쾅하고 닫아버리면 그 앞에서 맥없이 돌아서곤 했었다.
천봉이 성진을 불렀다.
"야. 이리와봐."
성진이 머뭇거리며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자 천봉이 다시 말했다.
"그래. 너."
워낙 나이 차이도 있는데다가 덩치도 큰, 제 한참 형같은 천봉이 부르자 성진이 쭈뼛거리며 다가 왔다.
"야. 너. 이제 얘 중학교 갈 거고 너도 금방 중학교 갈 건데 중학교 가면 선후배 관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앞으로 조심해. 알았어?"
성진은 천봉의 훈계에 네하고 돌아섰다.
그 무렵부터 천봉과의 기억이 없다. 중학교는 어디를 갔는지 어디서 사는지 모르고 지내다가 그를 본 것은 고삼때던가 고이때던가 반창회를 한다고 모였을 때 우리가 모여있던 교실에서 머리 내다 보이던 운동장 건너 교문가에서 서성이다가 떠난 날이었다.
그렇게 잠깐 먼 발치에서 보고 말았다.
글쓴이 임희택(맑은한울)님은
안양시 박달동 범고개에서 태어난 1963년생 안양토박이로 안서초, 안양동중(신성중), 신성고, 한양대(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안양시민권리찾기운동본부 대표 등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고 맑은한울 별칭의 논객으로도 활동했다. 현재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며 사회복지사로, 맑고 밝고 온누리를 추구하는 자칭 진정한 보수주의자이다.
'이야기보따리 > 기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희택]중2때 소풍가던날 안양영화예술학교로 일탈(2022.06.09) (0) | 2023.07.09 |
---|---|
[임희택]어릴적 열쇠를 찾아낸 행운과 네잎크로버(2023.04.24) (0) | 2023.07.09 |
[임희택]어릴적 밀린 방학숙제 몰아치기(2023.01.28) (0) | 2023.07.09 |
[임희택]어릴적 밀린 방학숙제 몰아치기(2023.01.28) (0) | 2023.07.09 |
[임희택]초등학교 시절 학교앞 군부대와 사격장(2022.05.19) (0) | 2023.07.09 |
[임희택]안양동중 통학시절 안양역 마당의 약장수(2020.02.10) (0) | 2023.07.09 |
[임희택]어릴적 추억과기억속의 화수분 논(2023.04.21) (2) | 2023.07.09 |
[임희택]안양 박달리 범고개에서 인덕원 안양동중 등하교(2022.06.09) (0) | 2023.07.09 |
[임희택]안양 박달리 범고개 주변 옛지명들(2018.09.29) (0) | 2023.07.09 |
[임희택]안양 더푼물 샘과 머리 두개 달린 뱀(2022.05.10) (0) | 2023.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