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30201]1956년 동양 최대 규모 안양영화촬영소 정초식 행사

안양똑딱이 2023. 2. 1. 16:35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안양 #석수동/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1956년 10월17일 개최된 안양영화촬영소의 정초식 모습이다. 안양 석수동 275번지(현 석수현대아파트)에 터를 마련한 안양영화촬영소는 당시로는 동양 최대 규모로 이날 행사를 기록해 방영한 대한뉴스를 보면 정초식과 상량식을 함께 실시했다고  나온다.
정초식(定礎式)이란 건축물을 세울 때, 기초 공사를 마치고 머릿돌을 설치하여 공사 착수를 기념하는 서양식 의식이며 상량식(上樑式)은 목조 건물의 골재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대들보 위에 대공을 세운 후에 최상부 부재인 마룻대(상량)를 올리고 거기에 공사와 관련된 기록과 축원문이 적힌 상량문을 봉안하는 의식으로 본래 목조 건축과 관련된 의식이지만 현대에도 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철골 공사의 마지막 부재를 올리는 의식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날 행사는 대한뉴우스 제94호로 방영되기도 했는데 영상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이기붕 민의원의장, 내무부장관, 문교부장관, 공보실장 등과 영화 연극 관계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정도로 규모가 아주 컸다.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영화가 해외에 많이 진출하도록 하라고 격려하고 촬영소 모형도를 보기도 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이날 안양읍내에 있던 삼덕제지와 금성방직 공장도 시찰했다.
안양 영화 역사를 들여다보면 1954년 수도영화사 홍찬 사장의 주도하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종합촬영시설인 안양촬영소가 안양시 석수동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촬영소 규모는 동양의 헐리우드를 꿈꾸며 3만평의 대지 위에 각각 500평과 350평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촬영, 현상, 편집, 녹음 등 영화작업을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동양 최대의 시설이었다.
그러나 수도영화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신상옥 감독이 1963년(1960년?) 안양촬영
소를 인수하여 1966년에 명칭을 '신필름'으로 바꾼다.
안양영화촬영소를 인수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 내에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거대해져 가는 몸집에 걸맞게 60년대 중반에는 하도급 회사들 까지 동원해 한해 제작하는 영화가 150 편을 넘어서게 됐다고 한다.(자료 출처 영상자료원)
하지만 거대 왕국의 몰락은 정점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됐다.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이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막대한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재정적 위기에다가 박정희 군사정권으로 부터 지원도 시원치 않고, 과도한 제작편수에 따른 태작들을 양산한 결과, 흥행 성적마저 변변치 않으며 신필름은 1970년 회사 규모를 줄인 뒤 안양영화주식회사, 1973년 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으로 개명하면서 연명하지만, 전성기로의 회귀나 부활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욱이 1975년 11월28일, 신필름은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과정에서 삭제한 키스장면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 말소 명령을 받는 수모까지 당한다.
1978년에는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북에 납치되고 신 감독도 북으로 가면서 주인 잃은 영화사는 1981년 문을 닫고 역사의 뒷쪽으로 사라지게 된다
현재 이 자리에는 석수현대아파트(석수동 275번지) 들어서 과거 1960-70년대 동양 최대 규모였던 영화촬영소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으며 안양시가 지난 2016년 9월 7일 아파트 단지 정문앞에 부착한 안양영화촬영소 터 안내판을 통해서 나마 이곳이 과거 영화촬영소였음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