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31/ #아카이브 #기록 #조선직물주식회사 #1938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자료
아카이브번호74424
유물번호서14407
시기1938
자료출처『躍進朝鮮大觀』(帝國大觀社, 1938)
조선직물주식회사(朝鮮織物株式會社) 광고에 포함된 경성부 안양역 앞 공장 조감도(鳥瞰圖)로 공장앞 아래쪽 도로는 현재의 중앙로길이다. 북쪽(위)은 안양3동과 박달리이며, 서쪽(위왼쪽)은 안양3동 양짓말이다. 사진 아래 경부선 안양역전이라 기록한 위치 표시와 전화번호 5번 표기가 아주 이색적이다.
조선직물주식회사는 1932년 11월 11일에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가 박승직(朴承稷: 두산그룹 창업자) 등과 합작하여 설립한 공익사(共益社)가 중심이 되어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872-1( 안양역 인근인 현 안양3동에 설립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견 직물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일본에서 수입한 인견 직물을 취급하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인견 직물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만든 회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인견 생산 공장으로 약 2만 평의 대지에 건평 7000평, 직기 168대에 염색 설비까지 보유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 회사를 선두로 대창직물(大昌織物)을 비롯해서 인견 직물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직물 설립자는 다카이 효자부로(高井兵三郞)였다. 초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조선인은 감사로 박승직만 참여하고 있었다. 1934년에 100만원의 자본금 중에서 37만 3750원을 불입하였고, 1938년에는 79만 1250원을 불입하였다. 2만주의 주식과 133명의 주주가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 자본금 100만원을 모두 불입할 정도로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직물주식회사는 1944년에 동양방적주식회사 안양공장과 함께 징발되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로 전용되어 비행기 제작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화신그룹 창업자인 박흥식은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 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이곳에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일부 기록에는 1944년 5월부터 시운전을 시작하여 6월부터 일부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직원이 650명, 공원이 약 1700여 명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에는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차출된 징용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는 태평양전쟁이 절정단계에 이르렀을 때임에도 일본의 항공전력 증대를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허가를 총독부와 일본내각에 제출하고 수차례 일본을 다녀온 끝에 설립허가를 받은후 10월 2일 자신이 대표가 되어 주식을 공모하여 설립에 나선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1944년 3월경 박흥식이 일본에 직접 가서 기술과 자재의 지원을 요청하고 중일전쟁 폭발일인 7월7일 항공제조사업 허가서 제출하는 등 전쟁 막바지에 군수품 생산을 꾀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울시가 기록한 서울6백년사의 '조선비행기공업'과 화신그룹사 등의 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흔히 박흥식이 안양에 건설한 조선비행기주식회사에서는 전투비행기 시제품만 생산했을뿐 일제패망으로 비행기는 생산하지 못하고 그만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19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박흥식은 자신이 운영하던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개편, 비행기 기술공을 양성하려 했던 사실도 조사과정을 통해 새로 밝혀지는 등 실제로 전쟁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안양에서의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공장에서는 건축가 김중업씨가 일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후 정부 귀속 기업체가 된 비행기생산공장은 1948년 10월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자)에게 불하되어 방직회사로 다시금 변모한다,.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고 한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는 것이 금성방직 안양공장의 시초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는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을 인수하는 등 공장 확대에 나선다.
자료를 보면 전후 원조기관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새로운 설비로 재건된 금성방직은 1968년에 대한농산[회장 박용학(朴龍學)]에 인수된 이후 1973년에 주식회사 대농(大農)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1977년까지 운영되다가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어 안양에서 첫번째 대규모 주택단지로 바뀌게 된다. 지금은 이곳을 댕리단길이라 부르지만 오랫동안 대농단지라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으로 금성방직에 인수되었다가 1967년 10월 금성방직과 함께 대농에 매각돼 아파트단지(안양1동 주공아파트)로 바뀌었으며 이후 진흥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가 지금 다시 재건축(안양역 푸르지오 더샵)이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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