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30114]1953년 안양읍과 시흥군지역 북진통일 궐기대회 모습

안양똑딱이 2023. 1. 14. 05:40

2023.01.14./ #기록 #아카이브 #옛사진 #북진통일 #단기4286년 #1953년 #시흥군/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3년 북진통일 궐기대회가 전국적으로 펼쳐지던 그때 경기도 안양읍을 비롯한 시흥군 지역 각 마을 풍경과 군중 모습이 담겨있다. 북진통일 경기도 사진 자료집에서.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이라는 슬로건을 열심히 내걸었다. 특히 한국 전쟁 중에도 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로 북진통일 궐기 캠페인을 끈질기게 벌였다. 수도를 군사분계선에서 가까운 서울특별시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유지한 것도 이 당시에는 북진통일이 곧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시절의 북진통일론은 월남한 사람들의 통일 열망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의 국력 차이와, 미군이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고 1953년에 체결된 한미방위조약에서 무력을 통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금하고 있기에 북진통일은 현실적으로도 명백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북진통일론은 평화통일론 등 다른 통일 운동 논리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대중을 동원한 각종 궐기대회나 시위는 영도자 중심의 비상 결속 체제를 유도하고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고 극우 반공 체제를 공고히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북진통일 운동은 이승만 정권 붕괴 시까지 계속되었다.
휴전이 임박한 1953년 3월 말부터 대중 동원을 통해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궐기대회와 시위를 벌이는 한편 1954년에는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이 불거졌고, 1955년 8월부터 연말까지 적성국/중립국 감시 위원단 축출 운동이 크게 전개되었다. 이에 죽산 조봉암이 북진통일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공약 10장'을 펴서 극좌/극우세력을 억제한 진보세력 주도 하에 유엔 보장에 따른 평화통일을 이루는 '평화통일론'을 들고 일어났으나, 1958년 1월 터진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된 조봉암이 이듬해 사형을 당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북진통일의 개념은 약화되고 다시 평화적 통일이 대두되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가자 판문점이라는 슬로건으로 통일 운동이 일어난 셈. 그렇지만 얼마 안 있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이후부터 반공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승공통일(勝共統一)이라는 구호로 북진통일 이념을 사실상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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