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20903]안양사람들 길어마시던 안양5동 찬우물 약수터

안양똑딱이 2022. 9. 3. 17:45

2022.09.03/ #기록 #역사 #흔적 #응답하라1970 #찬우물 #안양5동 #냉천마을 #약수터/ 안양의 원로건축사로 안양시지명위원회 위원이신 최승원 선생님이 1974년에 찍은 빛바랜 옛 사진으로 찬우물(냉천약수터)의 옛 모습입니다.
 
경기도 안양시 안양5동에 찬우물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다. 찬우물(冷泉洞)은 주접동 북쪽으로 안양 515통에 속한다. 충혼탑 아래 (안양5590-5)에 찬 샘물이 있어 그 인근을 찬우물 (冷泉洞)이라 칭하였으며 찬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안양5동을 냉천동(冷泉洞)’이라 부른다. 1980년대 이후 부터 냉천약수로 불리운 찬우물은 안양시와 군포시 경계에 있는 수리산에 소재한 샘물 가운데 한 곳이었다. 수리산에 있는 샘물들 가운데서 수질이 가장 좋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예전부터 수리산 주변 땅들이 비옥해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찬우물 인근에 있는 농경지에서는 찬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다.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찬우물의 물은 마르지 않았다. 찬우물은 마을 주민들에게 주요한 식수이자 농업용수의 역할을 하였다. 이 우물은 일제강점기만 해도 식수와 농업용수에 사용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인구의 유입과 택지 조성으로 옛 찬우물의 모습은 점차 우물 형태로 변해갔다. 수돗물이 들어오기전인 1960-70년대에는 안양읍내 대다수 주민들이 이물을 길어다 먹었고 품삵을 받고 정기적으로 물 배달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찬우물은 1980년대 이후 관정을 파 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공급을 계속했으며 안양시는 1998년 냉천약수터가 있는 곳을 냉천쉼터공원으로 조성했으며 주민들은 2021년까지도 약수(식수)로 이용했다. 찬우물은 안양시 관내 약수터중 수질검사에서 유일하게 일년 사계절 내내 음용수로 판정을 받을만큼 수질이 좋았다.그리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샘물이 매우 차가웠다.

그러나 찬우물(냉천약수)은 냉천지구 재개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파트단지 설계 과정에서 약수터가 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들고 찬우물공원으로 명명해 역사성이리도 이어갈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안양시와 재개발조합측은 물론 주민이나 시의원 누구하나 찬우물(냉천약수)의 보전에 대해 관심 갖는 이가 없었다.

 

찬우물의 전설

호랑이 젖줄에 해당하는 찬우물

 

찬우물의 물이 마르지 않는 것은 풍수적으로 수리산의 형상과도 관련이 있다. 수리산이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찬우물이 있는 곳이 바로 호랑이의 가슴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래서 호랑이의 젖줄처럼 찬우물의 물이 가물어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찬우물이 생기게 된 유래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찬우물 근처에 가난한 농부 내외가 살고 있었다. 농부 내외는 수리산 산등성이에 있는 논과 밭에 곡식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워낙 농토가 적어 열심히 일해도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항상 끼니 걱정으로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 가뭄이 들어 농사짓는 것마저 여의치가 않았다. 농사를 지어야 할 시기에 비가 오지 않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해가 이어져 농사를 아예 지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는 비를 기다리기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농부 내외가, 남은 곡식으로 정성을 다해 제물을 준비해 수리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산신령에게 치성을 올렸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너의 농토 가운데 제일 높은 곳을 파보아라.”, “그 곳에서 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밭으로 올라가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땅을 파자 젖은 흙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어서 샘물이 솟아올랐다. 내외는 기뻐하며 산신령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 후 농부 내외는 산신령이 일러준 샘물로 농사를 지었으며, 샘물을 정성을 다해 관리하였다. 그 후부터 찬우물의 물은 마르지 않았고, 농사는 물론 마을 주민들의 식수로도 이용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