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2/ #기록 #기억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평촌 #귀인 #응답하라1960/ 1960년대의 안양 귀인(貴仁)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 군락이 들어선 평촌신도시, 과거 넓은 들판에서 농사를 짓던 70-80년대 이전에는 평촌벌에 농사용 물을 대주던 저수지(방축)도 있었고, 벌말과 중간 간 야산자락에는 마을들이 있었다.
현 평촌동(坪村洞)에는 민배기와 벌말
현 평안동(達安洞)에는 달안이
현 귀인동(貴仁洞)에는 귀인
현 신촌동(新村洞)에는 신말
현 갈산동(葛山洞)에는 당살미와 뒷말 그리고 갈미가 있었다.
귀인동 : 귀인(貴仁)
신말(新村) 동쪽으로 온양 정씨가 배판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갈 때 이 마을에 들려 머물다 갔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때(1789) 전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용을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귀인이 안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귀인1동, 귀인2동으로 분동해 안양평촌에서는 인근 벌말과 함께 가장 번창했던 마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이동리(二洞里)였으며, 1914년 시흥군 서이면 이동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1973년 안양시 평촌동으로 승격되었고, 1992년 동안구에 편입되었다. 1993년 평안동 관할로 되었다가 1994년 평안동에서 갈라져 나와 독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귀인강습소가 있었다가 광복 직후에 이르러 학생의 감소와 재정난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70여호의 대촌인 귀인마을은 평촌신도시 개발구역내에서 몇 안되는 마을중 하나로, 1990년 4월에는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곳은 마을 뒷산으로(해발 60m)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수목이 우거진 곳이었다. 지석묘는 평촌 자유공원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만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마을의 풍요와 무해를 기원 하는 정제(井祭)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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