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마애종/안양 마애종의 종합적 고찰
[2008/11/14 안양민예총]최 응 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2008/11/14 안양민예총]최 응 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안양 마애종의 종합적 고찰
-범종 양식을 통해 본 마애종의 제작시기를 중심으로-
최 응 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1. 머리말
우리나라의 다양한 불교미술품 가운데 마애불은 일찍이 百濟백제의 泰安태안과 瑞山 磨崖三尊佛서산마애삼존불로부터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제작되어 온 가장 한국적 특색을 지닌 불교조각 분야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은 중국의 石窟寺院석굴사원을 모본으로 하였지만 석굴을 굴착할 수 없었던 우리의 자연환경을 맞게 자연의 암반을 다듬어 고부조로 조각한 뒤 前室전실을 만드는 한국식 석굴에서 출발하였다.
花崗巖화강암은 그 재질이 희고 독특한 윤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하여 불교 미술품을 만드는 데 제격이지만 다루기 어렵고 오랜 공정을 필요로 하는 제작기간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암면을 파 들어가 불상을 제작하는 것은 그 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으며 결국 화강암이 대부분인 우리의 실정에 맞게 암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고부조상으로 표현하는 마애불이 자연스럽게 제작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마애불도 처음에는 높은 高浮彫고부조로 표현되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상호를 중심으로 낮은 부조로 바뀌어 나가고 나중에는 아예 선각으로만 간략히 표현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의 크고 높은 산은 물론 동네 어귀의 잘 생긴 큰 바위에는 마애불 한 곳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애불은 우리 근처에 가장 친근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한국적 독특한 불교 조각 분야로 자리 잡게 된 마애불의 전통을 이어받은 안양 석수동 마애조각은 암면에 佛·菩薩像불·보살상이 아닌 磨崖鐘마애종을 조각한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이 마애 조각은 사찰에서 쓰이는 범종을 2개의 기둥으로 이은 종가에 걸어두고 그 옆에는 당목을 들고 범종을 치는 승려 입상을 조각한 모습이다. 따라서 그 명칭을 정확하게 부친다면 ‘磨崖梵鐘마애범종 및 打鐘僧侶像타종승려상’으로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 같다.
이 마애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종을 부조로 조각하였다는 독특한 소재와 함께 이를 치는 승려 입상까지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나중에 언급될 일본 중궁사 소장의 ‘天壽國曼多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의 우측 하단부에 범종을 타종하는 장면과 아주 유사한 점에서 주목된다.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622년에 제작된 천수국 만다라 수장은 비록 원본에 많은 보수가 있어왔지만 밑그림의 제작과 감독에는 고구려계나 신라계통의 인물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수장에 나오는 범종의 타종 장면은 7세기 전반에 범종이 사찰에서 쓰여 졌다는 적극적인 증거인 동시에 당시 범종의 형태를 추정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석수동 마애종 역시 오랜 세월의 차이는 있으나 범종이 과거에 어떻게 걸리고 타종되었는지 알려주는 또 다른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원래 범종이란 절에서 시간을 알릴 때나 大衆대중을 집합시키고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사찰의 鐘閣종각이나 殿閣殿閣에 매달아 놓고 아침 저녁으로 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세속적 번뇌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청정히 참회토록 하고 불교의 무한한 理想리상과 信仰心신앙심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범종의 소리를 통해 지옥에서 고통 받는 衆生중생들까지 구제할 수 있다는 大乗仏教대승불교의 심오한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점에서 사찰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불교의식법구의 하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석수동 마애종은 원래 소리를 내는 불교 의식법구로서 용도를 지니고 처음부터 조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인 소리로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기에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애종을 조성한 목적은 바로 단순히 청동의 범종을 화강암의 마애종으로 변화시킨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상징과 이상의 소리를 구현해 냄으로서 범종이 지닌 자비의 사상을 조각으로 표현해 낸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安養寺址안양사지의 安養이라는 지명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범종의 소리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大乘佛敎대승불교의 적극적 의지를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안양 석수동 마애종의 현상과 특징을 자세히 살펴본 뒤 마애종이 과연 언제쯤 제작되었고 그 조성의 의의와 가치 등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 범종이 지닌 특성과 시대적인 흐름을 개관하고 이러한 시대적 변화 과정에서 마애 범종의 양식적 특징과 가장 부합되는 시기의 편년이 가능한 범종과의 비교 고찰을 통해 제작시기를 구명해 보고자 한다.
물론 마애 부조라는 특성상 일반적인 불교공예품으로 제작된 범종과는 표현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다행히 이 마애종은 세부적인 특징이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어 편년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나아가 이 마애 범종이 지니고 있는 학술적 가치와 중요성을 통해 마애종이 지닌 의의를 새롭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2. 한국 범종의 조형과 세부 특징
三國時代삼국시대 범종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현재로서 우리나라 범종의 초기 양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 초기의 종은 중국 종에서 기원하는 것은 분명한 듯 하며 이러한 중국 종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변화 발전된 모습이 바로 통일신라의 종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725년에 만들어진 오대산 上院寺상원사 梵鐘범종은 이미 한국 범종의 전형양식으로 완성을 이룬 이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상원사 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종의 시원적 작품이라기보다 통일신라 종으로 완전히 정착을 이룬 이후 제작된 가장 전성기의 범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통일신라종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이나 일본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意匠의장을 지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부의 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共鳴공명]가 웅장하여 동양 삼국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옹]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부분[鐘腹 종복]이 불룩하다가 다시 鐘口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무라든 모습이다.
종의 정상부에는 한마리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양다리는 각각 앞 뒤로 뻗어 발톱으로 종의 상부인 天板천판을 힘차게 누르고 있다. 이 부분을 竜鈕룡뉴라 부르며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부분을 강화하면서도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원래는 고래를 무서워한다는 상상의 바다짐승인 蒲牢포뢰)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형태의 音筒음통 (또는 音管음관, 甬筒용통 이라고도 함)이 솟아 있다. 이 부분에는 대체로 몇 줄의 띠를 둘러 3~4개의 마디로 나눈 뒤 그 마디마다 위아래로 솟은 연판 무늬를 새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음통은 대부분 그 내부가 비어있고 하부 쪽이 종신 내부에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독특하다.
따라서 이 음통은 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음향조절장치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음통도 시대가 내려가면서 구멍이 막혀지거나 공명과는 관계없는 규모가 작은 종에까지 사용되어 점차 형식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물로 변화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종의 몸체 상부와 종 아래쪽의 하부에는 동일한 크기의 문양띠[文様帯문양대]를 둘렀는데, 이 부분을 각각 上帯상대와 下帯하대라 부르며 여기에는 당초무늬, 연꽃무늬나 宝相華보상화무늬 등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상대 바로 아래에 붙여 네 방향에는 사다리꼴의 廓곽을 만들어 이 곽 안으로 9개씩 도합 36개의 돌출된 종 꼭지(鐘乳종유)를 장식하였다. 그 형상이 마치 연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연꽃봉우리 모습인 蓮蕾形연뢰형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더러운 연못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은 불교에서 사바세계에서의 불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극락정토에 표현되는 蓮化生연화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범종에 장식된 鐘乳종유는 처음부터 일본 종의 꼭지형 장식과는 다른 연꽃봉우리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점에서 乳頭유두라는 지금까지의 이름보다 ‘蓮蕾(연뢰)’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연꽃이 모여진 蓮廓연곽은 대체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종의 굴곡에 비례하도록 만들어진 결과이며, 상대와 붙은 윗부분을 제외하고 그 외곽 부분에 띠를 둘러 대체로 상, 하대와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편 종신의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서 별도로 마련된 撞座당좌라는 원형 장식을 앞 뒤면 두 곳에 도드라지게 배치하였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종신의 1/3 부분 쯤에 해당되는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정점부에 해당된다.
이 당좌에는 중앙부에 연밥[蓮子연자]이 장식된 원형의 子房자방을 만들고 그 주위로는 蓮瓣文연판문과 그 바깥 테두리를 구슬을 연결시켜 나가는 連珠文帯연주문대로 두른 圓圏원권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앞 뒷면에 반대로 배치된 두 개의 당좌와 당좌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의 여백에는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듯한 奏楽天人像주악천인상이나 飛天像비천상, 또는 供養者像공양자상을 장식하는 것도 우리나라 범종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특히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설명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범종은 이러한 통일신라 범종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각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되어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3. 마애종의 현상과 특징
마애종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32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현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종이 위치한 지역 주변에는 통일신라에 창건된 中初寺址중초사지 朴慶植,「安養 中初寺址에 대한 考察」,『實學思想硏究』14집 (모아실학회 2000)
박경식,「안양 중초사지에 대한 고찰」,『실학사상연구』14집 (모아실학회 2000)
와 고려 태조 때 건립된 安養寺址안양사지가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이 주변이 佛敎史的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826년에 세워진 中初寺址중초사지 석조 幢竿支柱당간지주는 그 명문을 통해 당시 황룡사의 승려가 참여한 사실과 安養寺址안양사지에는 뛰어난 조형성을 지닌 고려시대의 귀부와 승탑 朴慶植,「安養 安養寺의 七層塼塔과 龜趺」,『文化史學』제11· 12· 13호 (韓國文化私學會, 1999)
박경식,「안양 안양사의 칠층전탑과 귀부」,『문화사학』제11· 12· 13호 (한국문화사학회, 1999)
을 볼 수 있어 당시 이 두 절의 寺格사격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마애종이 위치한 곳은 이러한 주변 절터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조성 당시부터 주변의 절터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마애종은 535 × 550cm 정도의 커다란 암면을 고르게 다듬은 뒤 陰刻음각과 陽刻양각의 부조 형태로 조각하였는데, 벽면 중앙에 범종을 중심으로 이 범종을 매달기 위해 세워져 있는 두 개의 기둥과 이를 가로 지른 鐘架종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종 양 쪽에 길게 솟은 두 개의 기둥 가운데 왼쪽 기둥 중단 아래에 승려 입상이 두 손으로 당목을 잡고 종을 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우선 중앙에 걸린 범종의 현상을 살펴보면 들보의 중앙에서 4단으로 꼬이면서 내려온 쇠사슬이 늘어져 용뉴의 목 안으로 연결되었고 가늘고 긴 목으로 묘사된 용두는 그 입을 천판 상에 붙인 듯 표현되었다. 불거진 눈과 머리 뒤로 솟아오른 뿔까지 세밀히 표현되었으며 목 뒤에 붙은 음통은 그다지 아직 가늘게 표현되지 않았으며 용뉴의 목 높이와 거의 유사한 높이까지 솟아 있다.
종신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쪽으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종구 쪽이 가장 넓어져 있다. 상대와 하대가 묘사되었지만 별도로 장식된 문양은 보이지 않으며 상대 아래 붙은 2개소의 蓮廓연곽 안에는 한국 범종의 독특한 특징인 돌출된 9개씩의 蓮蕾연뢰가 표현되었다. 따라서 이 마애종이 부조이면서도 한국 범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4개의 연곽과 연곽 마다 9개씩의 蓮蕾연뢰를 표현하고 있는 점은 한국 범종의 전형 양식을 분명히 이해하고 충실히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연곽 아래로 구획을 둔 것은 크기가 큰 대형 범종에서 볼 수 있는 鐘身종신을 두 개의 틀로 합쳐 주조할 때 생기는 주물 접합선 흔적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이 범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종신에 표현된 3개의 撞座당좌이다. 중앙에는 원형의 당좌를 두었고 양 쪽으로 반원형만 표현된 당좌를 둔 모습은 이 마애종을 조각한 제작자가 부조로 표현되는 범종을 매우 입체적인 방법으로 구성한 조각 기술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범종에서 撞座당좌는 종신 앞, 뒤에 2개가 장식되는 일반적이며 4개의 당좌가 표현된 종으로는 1058년에 만들어진 淸寧4年銘청녕4년명 범종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당좌의 위치는 종신의 1/3 정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원형의 자방 주위로 8엽의 複瓣복판으로 보이는 연판문을 세밀히 표현하고 있다.
한편 종신에는 당좌 외에 한국 종의 두드러진 특징인 주악상이나 비천상, 불보살상의 조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범종 가운데 부조상이 전혀 없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형의 범종에는 대부분 奏樂像주악상이나 飛天像비천상을 표현되어 있어 아마도 조각 기술의 제약으로 의도적으로 생략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鐘口종구 쪽에는 폭이 넓은 下帶하대가 분명한 구획을 두고 자리 잡고 있으나 역시 문양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중요한 구성 가운데 하나가 왼쪽 기둥에 붙어 종을 치는 僧侶立像승려입상의 모습이다. 머리는 분명히 삭발하여 승려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동그란 얼굴은 耳目口鼻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작은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느껴진다. 양 어깨를 덮은 가사 가운데 왼쪽 가사는 안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린 반면 오른쪽 가사는 직선 주름으로 표현하였으며 大衣대의 안으로는 목 아래로부터 비스듬히 가로지른 승각기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배 앞으로 양 손을 길게 내려 긴 撞木당목의 잘록한 자루 앞 쪽과 중간 부분을 잡고 있다. 특히 당목 부분의 묘사가 주목되는데 잘록한 자루는 앞 쪽으로 가면서 폭이 넓어진 원통형을 이루다가 그 앞쪽을 밋밋하게 처리하여 마치 절구 공이처럼 묘사되었다.
재질이 나무로 보이는 당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점에 지금까지 그 예가 남아있지 않은 당목의 형태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승려의 무릎까지 덮힌 大衣대의 아래로는 구획을 두어 바지와 같은 裙衣를 표현하였고 두 발은 옆쪽으로 가지런히 향하고 있으며 신발의 코가 앞으로 들린 모양을 볼 수 있으나 상체에 비해 다리 부분은 약간 짧아진 느낌이다.
범종이 세운 두 기둥을 가로지른 들보에 걸린 모습은 그 크기와 형식으로 보아 鐘閣종각과 같은 건물이 표현되어 있는데, 양 기둥 위에 마치 치미와 같은 날개 장식이 좌우로 뻗친 모습이나 중앙에 걸린 범종의 쇠사슬을 장식한 火焰形화염형의 보아지 장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애종은 전체의 구성이 종각 안에 걸린 범종을 치는 승려 인물상과 범종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현재의 실측치를 살펴보면 마애종의 전체 높이는 126cm이며 그 가운데 종신 101cm와 용뉴를 포함한 종의 전체 높이는 126cm, 승려 입상은 102cm 이다. 고려시대 분묘에서 발굴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고려시대 평균 남자 신장이 평균 162.62cm라는 내용을 참고로 종의 크기를 역으로 환산해 보면 200.86cm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이것은 약간의 오차를 인정하더라도 이 마애종이 최소한 2m 내외의 대형 범종을 묘사한 것임을 추측케 한다. 그렇게 본다면 당연히 종루 안에 걸린 범종과 그것을 타종하는 인물상이 조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 고려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통해 본 마애종의 제작시기
이상에서 살펴본 마애종의 현상 가운데 범종의 특성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제작 년대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범종의 종신의 외형은 종구 쪽으로 내려오면서 바깥으로 벌어지는 모습을 통해 통일신라 종 보다는 고려시대 범종에 더 유사하다.
고려시대 종은 범종의 양식적 특징상 크게 立狀花文帶입상화문대의 유무를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필자는 이를 다시 초, 중, 후, 말기의 4기로 세분화하여 구분하고 있다. 拙稿, 「韓國梵鍾의 特性과 變遷」『聖德大王神鍾 綜合 論考集』(국립경주박물관 1999) pp.176~227 및 「한국범종의 특성과 변천」『하늘꽃으로 내린 깨달음의 소리』(직지사 성보박물관 2004) pp.240~255 참조
초기는 고려 범종이 성립되어 전개를 이루어 나간 통일신라 종과의 과도기적 시기로서 대체로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중기는 고려 범종으로의 완전한 정착을 이룬 1058년의 청녕사년명 종이 만들어진 11세기 중엽부터 12세기 말경으로 편년지울 수 있다. 입상화문대로 특징 지워지는 고려후기 종은 13세기 초부터 14세기 초를 후기로 나누어 입상화문대의 정착과 小鐘이 유행된 시기, 그리고 14세기 전반부터 말까지의 고려 말기의 범종은 외래(中國) 양식의 유입과 절충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통일신라의 범종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그 형태와 의장 면에서 다양하게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그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종신의 외형이 직선화되거나 아래 부분인 鐘口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밖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고려 전기의 天興寺鐘천흥사종(1010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龍鈕용뉴의 목이 天板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는 고려 종의 새로운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龍頭용두의 활달한 모습에 비해 목은 지나치게 가늘고 그 뒤에 붙은 音筒음통은 가늘고 세장한 느낌을 주어 통일신라 용뉴와 비교할 때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한편 고려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통한 편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천판의 외연인 상대 위로 立狀花文帶입상화문대라는 돌출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기 시작하는 것으로서 이 입상화문대의 有無유뮤를 통해 고려 종은 전기(12세기 말 이전)와 후기(13세기 초 이후)로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따라서 이 마애종은 우선 고려 전기 종에 해당되는 양식적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용뉴 역시 천판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비록 천흥사종에서 보이기 시작하지만 널리 유행하는 것은 12세기를 접어들어서의 일이다.
이 역시 마애종의 제작시기가 늦지 않음을 시사한다. 13세기에 들어오면 용뉴의 목이 더욱 가늘면서도 길어지고 점차 S자형의 굴곡을 이루면서 매우 복잡하게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용의 입안에 표현되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거나 목 뒤에는 마치 불꽃이나 뿔과 같은 기다란 장식이 첨가된다. 아쉽게도 마애종은 上·下帶상·하대의 장식문양이 없고 鐘身종신에 飛天비천이나 佛·菩薩불·보살과 같은 부조상이 표현되지 않아 보다 정확한 제작시기를 규명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따른다.
고려 범종의 부조상은 초기까지 몸을 옆으로 뉘인 채 나르는 듯한 飛行飛天像비행비천상을 부조하지만 점차 연화좌 위에 앉은 佛·菩薩像불·보살상을 장식하거나 三尊像삼존상을 天蓋천개와 함께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상대와 하대에도 당초문이나 보상화문 외에 국화문과 번개무늬(雷文뇌문)과 같은 기하학적 문양 등의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다.
특히 마애종에서 주목되는 당좌의 표현은 분명히 종신에 묘사된 4개의 撞座당좌를 나타낸 것으로 淸寧4年銘청녕4년명 종(1058년)이 가장 빠른 예이지만 고려 범종의 경우 그다지 수효는 많지 않다. 당좌는 본래 종을 치는 자리로서의 기능이 우선이지만 보다 장식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그 수가 4개로 늘어난 것이며 종의 크기에 비해 매우 작게 표현되는 것도 역시 고려적인 새로운 변화이다. 이처럼 마애종의 당좌는 비록 그 수효가 통일신라에서 볼 수 없는 4개이지만 청녕4년명 범종에서도 볼 수 있어 고려 범종의 새로운 요소를 충실히 재현한 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청녕4년 명종에 비해 당좌의 높이는 종구 쪽에 치우치지 않고 아직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종신 1/3 정도에 자리 잡고 있음은 청녕4년 명종보다 앞선 시기의 범종이란 점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안양 석수동 마애종의 제작 시기는 고려 범종에서 나타나는 종신의 외형이 바깥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점에 통일신라보다 고려 종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신의 상대 위에 입상화문대가 표현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일단 고려 후기의 범종 양식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아울러 용뉴가 그 입을 天板上천판상에 붙이고 있는 점은 통일신라 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전기에서도 이른 시기 범종 양식임을 보여준다.
상대 아래 표현된 굵은 연뢰의 표현과 종신1/3 정도에 자리 잡은 당좌의 위치도 통일신라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그 수효가 4개로 늘어난 것은 새로운 고려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미루어 이 범종은 고려전기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구비한 작품이면서 제작시기가 청녕4년명종(1058년)보다는 빠르고 어떻게 본다면 고려 범종으로 정착을 이루는 1010년의 천흥사종보다 이른 시기인 고려초기 범종 양식을 반영해준다고 볼 수 있다.
승려 입상을 중심으로 복원한 종의 크기가 2m 내외에 이르는 대형종이라는 점도 고려시대 초기의 종에서 대형종이 많이 만들어진 점과 비교될 수 있는 점이다. 종신에는 비록 비천상이 없지만 용뉴와 짧아진 음통의 형식은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광도현) 조우렌지(照蓮寺·조연사) 소장의 峻豊4年銘(준풍4년명/963년)이나 시모노세키(下關市하관시) 소장의 스미요시진자(住吉神社주길신사) 소장 범종(10세기 중~후반)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범종은 10세기 중~후반 쯤 조성된 통일신라 범종 양식에서 이제 고려범종으로 성립되는 시기의 고려 초기 작품을 따르고 있다고 추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안양사의 창건 시기인 고려 태조가 926년에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남행하던 중 절을 세웠다는 東文選동문선의 「衿州安養寺塔重新記금주안양사탑중신기」의 기록은 ‘‘옛적에 태조께서 조공하지 아니하는 자를 징벌할 목적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산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기어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는데 과연 구름 밑에서 노승을 만났으며 그 분의 이름은 能正이었다.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누어 보니 태조의 뜻에 꼭 맞았다. 이것이 이 사찰을 건립하게 된 연우이다, 절 남쪽에 있는 탑은 벽돌로 7층을 쌓았고 기와를 덮었다,…(下略)”『東文選』권76, 李崇仁 「衿州安養寺塔重新記」
중요한 참고가 된다. 즉 이 마애종은 中初寺중초사와 관련된 통일신라 9세기보다는 10세기 전반의 安養寺안양사의 창건시기에 더 연관성이 많으며, 안양사 창건 이후인 10세기 중~후반에 안양사와 관련되어 조성된 마애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5. 석수동 마애종의 중요성 및 의의
석수동 마애 범종과 함께 범종을 치는 장면이 묘사된 것으로는 일본 나라(奈良내양)의 주구지(中宮寺중궁사) 소장의 ‘天壽國曼多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은 622년에 제작된 것으로 작품으로서 당시 종교, 생활 장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유명하다. 더욱이 수본의 우측 하단부에는 八作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 내부에 범종이 걸려있고 이것을 한 스님이 撞木당목으로 치는 구체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범종은 승려 입상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중형 이하의 작은 종을 묘사하였다는 점과 종신에 보이는 십자형 구획과 쌍용의 용뉴를 통해 초기 중국 범종인 祖形鐘조형종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수동 마애종 역시 전체적인 구성과 승려의 자세에는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범종 타종장면을 조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록 석수동 마애종이 돌이라는 재질의 특성상 원근감과 입체감, 정교한 세부 표현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범종의 모습만큼은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조각을 하였던 제작자는 당시의 범종을 충분히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었던 미적 감각을 지녔다고 추측된다.
한편 석수동 마애종은 원래 소리를 내는 佛敎불교 儀式法具의식법구로서 용도를 지니고 처음부터 조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인 소리로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애종을 조성한 목적은 바로 단순히 청동의 범종을 화강암의 마애종으로 변화시킨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상징과 이상의 소리를 구현해 냄으로서 범종이 지닌 자비의 사상을 조각으로 표현해 낸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安養寺址안양사지의 安養안양의 지명이 뜻하는 바처럼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범종의 소리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大乘佛敎대승불교의 가장 궁극적인 교리를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석수동 마애종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벽면에 조각한 마애 범종이란 중요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범종을 타종하는 승려 입상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두어야 한다. 현존하는 유일한 삼국시대 자료인 天壽國曼多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이 당시 범종의 형태와 타종의 모습을 통해 범종이 사찰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구체적인 자료라 한다면, 이 안양사 마애종은 통일신라의 범종 양식을 이어받아 새롭게 고려의 범종이 창안되는 과정의 범종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승려가 들고 있는 撞木당목도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고대의 범종 당목을 재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자료임에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석수동의 마애종은 고려 10세기 중~후반쯤 당시 통일신라 종 양식을 아직까지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 초의 범종 양식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鐘樓종루 안에 달린 2m 내외의 대형 범종을 당시의 스님이 당목으로 打鐘타종하는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과 강조를 적절히 조화시켜 성공적으로 구현한 고려초 마애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이러한 석수동 마애조각의 중요성과 의의를 통해 이제 지방 문화재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됨이 마땅하리라 본다(* 편집자 주
일반 시민과 청소년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한자말로 된 전문용어를 한글로 함께 풀었습니다.
).
-범종 양식을 통해 본 마애종의 제작시기를 중심으로-
최 응 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1. 머리말
우리나라의 다양한 불교미술품 가운데 마애불은 일찍이 百濟백제의 泰安태안과 瑞山 磨崖三尊佛서산마애삼존불로부터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제작되어 온 가장 한국적 특색을 지닌 불교조각 분야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원은 중국의 石窟寺院석굴사원을 모본으로 하였지만 석굴을 굴착할 수 없었던 우리의 자연환경을 맞게 자연의 암반을 다듬어 고부조로 조각한 뒤 前室전실을 만드는 한국식 석굴에서 출발하였다.
花崗巖화강암은 그 재질이 희고 독특한 윤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하여 불교 미술품을 만드는 데 제격이지만 다루기 어렵고 오랜 공정을 필요로 하는 제작기간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암면을 파 들어가 불상을 제작하는 것은 그 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으며 결국 화강암이 대부분인 우리의 실정에 맞게 암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고부조상으로 표현하는 마애불이 자연스럽게 제작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마애불도 처음에는 높은 高浮彫고부조로 표현되다가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상호를 중심으로 낮은 부조로 바뀌어 나가고 나중에는 아예 선각으로만 간략히 표현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우리의 크고 높은 산은 물론 동네 어귀의 잘 생긴 큰 바위에는 마애불 한 곳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애불은 우리 근처에 가장 친근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한국적 독특한 불교 조각 분야로 자리 잡게 된 마애불의 전통을 이어받은 안양 석수동 마애조각은 암면에 佛·菩薩像불·보살상이 아닌 磨崖鐘마애종을 조각한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이 마애 조각은 사찰에서 쓰이는 범종을 2개의 기둥으로 이은 종가에 걸어두고 그 옆에는 당목을 들고 범종을 치는 승려 입상을 조각한 모습이다. 따라서 그 명칭을 정확하게 부친다면 ‘磨崖梵鐘마애범종 및 打鐘僧侶像타종승려상’으로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 같다.
이 마애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종을 부조로 조각하였다는 독특한 소재와 함께 이를 치는 승려 입상까지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나중에 언급될 일본 중궁사 소장의 ‘天壽國曼多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의 우측 하단부에 범종을 타종하는 장면과 아주 유사한 점에서 주목된다.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622년에 제작된 천수국 만다라 수장은 비록 원본에 많은 보수가 있어왔지만 밑그림의 제작과 감독에는 고구려계나 신라계통의 인물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수장에 나오는 범종의 타종 장면은 7세기 전반에 범종이 사찰에서 쓰여 졌다는 적극적인 증거인 동시에 당시 범종의 형태를 추정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석수동 마애종 역시 오랜 세월의 차이는 있으나 범종이 과거에 어떻게 걸리고 타종되었는지 알려주는 또 다른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원래 범종이란 절에서 시간을 알릴 때나 大衆대중을 집합시키고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사찰의 鐘閣종각이나 殿閣殿閣에 매달아 놓고 아침 저녁으로 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세속적 번뇌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청정히 참회토록 하고 불교의 무한한 理想리상과 信仰心신앙심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범종의 소리를 통해 지옥에서 고통 받는 衆生중생들까지 구제할 수 있다는 大乗仏教대승불교의 심오한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점에서 사찰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불교의식법구의 하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석수동 마애종은 원래 소리를 내는 불교 의식법구로서 용도를 지니고 처음부터 조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인 소리로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하기에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애종을 조성한 목적은 바로 단순히 청동의 범종을 화강암의 마애종으로 변화시킨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상징과 이상의 소리를 구현해 냄으로서 범종이 지닌 자비의 사상을 조각으로 표현해 낸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安養寺址안양사지의 安養이라는 지명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범종의 소리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大乘佛敎대승불교의 적극적 의지를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안양 석수동 마애종의 현상과 특징을 자세히 살펴본 뒤 마애종이 과연 언제쯤 제작되었고 그 조성의 의의와 가치 등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국 범종이 지닌 특성과 시대적인 흐름을 개관하고 이러한 시대적 변화 과정에서 마애 범종의 양식적 특징과 가장 부합되는 시기의 편년이 가능한 범종과의 비교 고찰을 통해 제작시기를 구명해 보고자 한다.
물론 마애 부조라는 특성상 일반적인 불교공예품으로 제작된 범종과는 표현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다행히 이 마애종은 세부적인 특징이 나름대로 잘 부각되어 있어 편년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나아가 이 마애 범종이 지니고 있는 학술적 가치와 중요성을 통해 마애종이 지닌 의의를 새롭게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2. 한국 범종의 조형과 세부 특징
三國時代삼국시대 범종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현재로서 우리나라 범종의 초기 양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 초기의 종은 중국 종에서 기원하는 것은 분명한 듯 하며 이러한 중국 종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변화 발전된 모습이 바로 통일신라의 종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통일신라 725년에 만들어진 오대산 上院寺상원사 梵鐘범종은 이미 한국 범종의 전형양식으로 완성을 이룬 이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상원사 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 종의 시원적 작품이라기보다 통일신라 종으로 완전히 정착을 이룬 이후 제작된 가장 전성기의 범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통일신라종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이나 일본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意匠의장을 지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부의 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共鳴공명]가 웅장하여 동양 삼국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옹]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부분[鐘腹 종복]이 불룩하다가 다시 鐘口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무라든 모습이다.
종의 정상부에는 한마리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양다리는 각각 앞 뒤로 뻗어 발톱으로 종의 상부인 天板천판을 힘차게 누르고 있다. 이 부분을 竜鈕룡뉴라 부르며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부분을 강화하면서도 장식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원래는 고래를 무서워한다는 상상의 바다짐승인 蒲牢포뢰)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형태의 音筒음통 (또는 音管음관, 甬筒용통 이라고도 함)이 솟아 있다. 이 부분에는 대체로 몇 줄의 띠를 둘러 3~4개의 마디로 나눈 뒤 그 마디마다 위아래로 솟은 연판 무늬를 새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음통은 대부분 그 내부가 비어있고 하부 쪽이 종신 내부에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는 점이 독특하다.
따라서 이 음통은 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음향조절장치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음통도 시대가 내려가면서 구멍이 막혀지거나 공명과는 관계없는 규모가 작은 종에까지 사용되어 점차 형식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물로 변화되는 점을 볼 수 있다.
종의 몸체 상부와 종 아래쪽의 하부에는 동일한 크기의 문양띠[文様帯문양대]를 둘렀는데, 이 부분을 각각 上帯상대와 下帯하대라 부르며 여기에는 당초무늬, 연꽃무늬나 宝相華보상화무늬 등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상대 바로 아래에 붙여 네 방향에는 사다리꼴의 廓곽을 만들어 이 곽 안으로 9개씩 도합 36개의 돌출된 종 꼭지(鐘乳종유)를 장식하였다. 그 형상이 마치 연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연꽃봉우리 모습인 蓮蕾形연뢰형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더러운 연못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은 불교에서 사바세계에서의 불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극락정토에 표현되는 蓮化生연화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범종에 장식된 鐘乳종유는 처음부터 일본 종의 꼭지형 장식과는 다른 연꽃봉우리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점에서 乳頭유두라는 지금까지의 이름보다 ‘蓮蕾(연뢰)’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연꽃이 모여진 蓮廓연곽은 대체로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종의 굴곡에 비례하도록 만들어진 결과이며, 상대와 붙은 윗부분을 제외하고 그 외곽 부분에 띠를 둘러 대체로 상, 하대와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한편 종신의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서 별도로 마련된 撞座당좌라는 원형 장식을 앞 뒤면 두 곳에 도드라지게 배치하였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종신의 1/3 부분 쯤에 해당되는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정점부에 해당된다.
이 당좌에는 중앙부에 연밥[蓮子연자]이 장식된 원형의 子房자방을 만들고 그 주위로는 蓮瓣文연판문과 그 바깥 테두리를 구슬을 연결시켜 나가는 連珠文帯연주문대로 두른 圓圏원권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앞 뒷면에 반대로 배치된 두 개의 당좌와 당좌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의 여백에는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듯한 奏楽天人像주악천인상이나 飛天像비천상, 또는 供養者像공양자상을 장식하는 것도 우리나라 범종의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특히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양식을 설명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범종은 이러한 통일신라 범종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각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되어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3. 마애종의 현상과 특징
마애종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 32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현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종이 위치한 지역 주변에는 통일신라에 창건된 中初寺址중초사지 朴慶植,「安養 中初寺址에 대한 考察」,『實學思想硏究』14집 (모아실학회 2000)
박경식,「안양 중초사지에 대한 고찰」,『실학사상연구』14집 (모아실학회 2000)
와 고려 태조 때 건립된 安養寺址안양사지가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이 주변이 佛敎史的불교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826년에 세워진 中初寺址중초사지 석조 幢竿支柱당간지주는 그 명문을 통해 당시 황룡사의 승려가 참여한 사실과 安養寺址안양사지에는 뛰어난 조형성을 지닌 고려시대의 귀부와 승탑 朴慶植,「安養 安養寺의 七層塼塔과 龜趺」,『文化史學』제11· 12· 13호 (韓國文化私學會, 1999)
박경식,「안양 안양사의 칠층전탑과 귀부」,『문화사학』제11· 12· 13호 (한국문화사학회, 1999)
을 볼 수 있어 당시 이 두 절의 寺格사격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마애종이 위치한 곳은 이러한 주변 절터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조성 당시부터 주변의 절터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마애종은 535 × 550cm 정도의 커다란 암면을 고르게 다듬은 뒤 陰刻음각과 陽刻양각의 부조 형태로 조각하였는데, 벽면 중앙에 범종을 중심으로 이 범종을 매달기 위해 세워져 있는 두 개의 기둥과 이를 가로 지른 鐘架종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종 양 쪽에 길게 솟은 두 개의 기둥 가운데 왼쪽 기둥 중단 아래에 승려 입상이 두 손으로 당목을 잡고 종을 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우선 중앙에 걸린 범종의 현상을 살펴보면 들보의 중앙에서 4단으로 꼬이면서 내려온 쇠사슬이 늘어져 용뉴의 목 안으로 연결되었고 가늘고 긴 목으로 묘사된 용두는 그 입을 천판 상에 붙인 듯 표현되었다. 불거진 눈과 머리 뒤로 솟아오른 뿔까지 세밀히 표현되었으며 목 뒤에 붙은 음통은 그다지 아직 가늘게 표현되지 않았으며 용뉴의 목 높이와 거의 유사한 높이까지 솟아 있다.
종신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쪽으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종구 쪽이 가장 넓어져 있다. 상대와 하대가 묘사되었지만 별도로 장식된 문양은 보이지 않으며 상대 아래 붙은 2개소의 蓮廓연곽 안에는 한국 범종의 독특한 특징인 돌출된 9개씩의 蓮蕾연뢰가 표현되었다. 따라서 이 마애종이 부조이면서도 한국 범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4개의 연곽과 연곽 마다 9개씩의 蓮蕾연뢰를 표현하고 있는 점은 한국 범종의 전형 양식을 분명히 이해하고 충실히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연곽 아래로 구획을 둔 것은 크기가 큰 대형 범종에서 볼 수 있는 鐘身종신을 두 개의 틀로 합쳐 주조할 때 생기는 주물 접합선 흔적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이 범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종신에 표현된 3개의 撞座당좌이다. 중앙에는 원형의 당좌를 두었고 양 쪽으로 반원형만 표현된 당좌를 둔 모습은 이 마애종을 조각한 제작자가 부조로 표현되는 범종을 매우 입체적인 방법으로 구성한 조각 기술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범종에서 撞座당좌는 종신 앞, 뒤에 2개가 장식되는 일반적이며 4개의 당좌가 표현된 종으로는 1058년에 만들어진 淸寧4年銘청녕4년명 범종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당좌의 위치는 종신의 1/3 정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원형의 자방 주위로 8엽의 複瓣복판으로 보이는 연판문을 세밀히 표현하고 있다.
한편 종신에는 당좌 외에 한국 종의 두드러진 특징인 주악상이나 비천상, 불보살상의 조각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범종 가운데 부조상이 전혀 없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형의 범종에는 대부분 奏樂像주악상이나 飛天像비천상을 표현되어 있어 아마도 조각 기술의 제약으로 의도적으로 생략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鐘口종구 쪽에는 폭이 넓은 下帶하대가 분명한 구획을 두고 자리 잡고 있으나 역시 문양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중요한 구성 가운데 하나가 왼쪽 기둥에 붙어 종을 치는 僧侶立像승려입상의 모습이다. 머리는 분명히 삭발하여 승려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동그란 얼굴은 耳目口鼻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작은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느껴진다. 양 어깨를 덮은 가사 가운데 왼쪽 가사는 안쪽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린 반면 오른쪽 가사는 직선 주름으로 표현하였으며 大衣대의 안으로는 목 아래로부터 비스듬히 가로지른 승각기까지 세밀히 묘사되었다. 배 앞으로 양 손을 길게 내려 긴 撞木당목의 잘록한 자루 앞 쪽과 중간 부분을 잡고 있다. 특히 당목 부분의 묘사가 주목되는데 잘록한 자루는 앞 쪽으로 가면서 폭이 넓어진 원통형을 이루다가 그 앞쪽을 밋밋하게 처리하여 마치 절구 공이처럼 묘사되었다.
재질이 나무로 보이는 당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점에 지금까지 그 예가 남아있지 않은 당목의 형태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승려의 무릎까지 덮힌 大衣대의 아래로는 구획을 두어 바지와 같은 裙衣를 표현하였고 두 발은 옆쪽으로 가지런히 향하고 있으며 신발의 코가 앞으로 들린 모양을 볼 수 있으나 상체에 비해 다리 부분은 약간 짧아진 느낌이다.
범종이 세운 두 기둥을 가로지른 들보에 걸린 모습은 그 크기와 형식으로 보아 鐘閣종각과 같은 건물이 표현되어 있는데, 양 기둥 위에 마치 치미와 같은 날개 장식이 좌우로 뻗친 모습이나 중앙에 걸린 범종의 쇠사슬을 장식한 火焰形화염형의 보아지 장식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애종은 전체의 구성이 종각 안에 걸린 범종을 치는 승려 인물상과 범종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현재의 실측치를 살펴보면 마애종의 전체 높이는 126cm이며 그 가운데 종신 101cm와 용뉴를 포함한 종의 전체 높이는 126cm, 승려 입상은 102cm 이다. 고려시대 분묘에서 발굴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고려시대 평균 남자 신장이 평균 162.62cm라는 내용을 참고로 종의 크기를 역으로 환산해 보면 200.86cm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이것은 약간의 오차를 인정하더라도 이 마애종이 최소한 2m 내외의 대형 범종을 묘사한 것임을 추측케 한다. 그렇게 본다면 당연히 종루 안에 걸린 범종과 그것을 타종하는 인물상이 조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 고려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통해 본 마애종의 제작시기
이상에서 살펴본 마애종의 현상 가운데 범종의 특성을 중심으로 대략적인 제작 년대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범종의 종신의 외형은 종구 쪽으로 내려오면서 바깥으로 벌어지는 모습을 통해 통일신라 종 보다는 고려시대 범종에 더 유사하다.
고려시대 종은 범종의 양식적 특징상 크게 立狀花文帶입상화문대의 유무를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필자는 이를 다시 초, 중, 후, 말기의 4기로 세분화하여 구분하고 있다. 拙稿, 「韓國梵鍾의 特性과 變遷」『聖德大王神鍾 綜合 論考集』(국립경주박물관 1999) pp.176~227 및 「한국범종의 특성과 변천」『하늘꽃으로 내린 깨달음의 소리』(직지사 성보박물관 2004) pp.240~255 참조
초기는 고려 범종이 성립되어 전개를 이루어 나간 통일신라 종과의 과도기적 시기로서 대체로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중기는 고려 범종으로의 완전한 정착을 이룬 1058년의 청녕사년명 종이 만들어진 11세기 중엽부터 12세기 말경으로 편년지울 수 있다. 입상화문대로 특징 지워지는 고려후기 종은 13세기 초부터 14세기 초를 후기로 나누어 입상화문대의 정착과 小鐘이 유행된 시기, 그리고 14세기 전반부터 말까지의 고려 말기의 범종은 외래(中國) 양식의 유입과 절충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통일신라의 범종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그 형태와 의장 면에서 다양하게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그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종신의 외형이 직선화되거나 아래 부분인 鐘口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밖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고려 전기의 天興寺鐘천흥사종(1010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龍鈕용뉴의 목이 天板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는 고려 종의 새로운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龍頭용두의 활달한 모습에 비해 목은 지나치게 가늘고 그 뒤에 붙은 音筒음통은 가늘고 세장한 느낌을 주어 통일신라 용뉴와 비교할 때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한편 고려 범종의 양식적 특징을 통한 편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천판의 외연인 상대 위로 立狀花文帶입상화문대라는 돌출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기 시작하는 것으로서 이 입상화문대의 有無유뮤를 통해 고려 종은 전기(12세기 말 이전)와 후기(13세기 초 이후)로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따라서 이 마애종은 우선 고려 전기 종에 해당되는 양식적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용뉴 역시 천판에서 떨어지는 경향이 비록 천흥사종에서 보이기 시작하지만 널리 유행하는 것은 12세기를 접어들어서의 일이다.
이 역시 마애종의 제작시기가 늦지 않음을 시사한다. 13세기에 들어오면 용뉴의 목이 더욱 가늘면서도 길어지고 점차 S자형의 굴곡을 이루면서 매우 복잡하게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용의 입안에 표현되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거나 목 뒤에는 마치 불꽃이나 뿔과 같은 기다란 장식이 첨가된다. 아쉽게도 마애종은 上·下帶상·하대의 장식문양이 없고 鐘身종신에 飛天비천이나 佛·菩薩불·보살과 같은 부조상이 표현되지 않아 보다 정확한 제작시기를 규명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따른다.
고려 범종의 부조상은 초기까지 몸을 옆으로 뉘인 채 나르는 듯한 飛行飛天像비행비천상을 부조하지만 점차 연화좌 위에 앉은 佛·菩薩像불·보살상을 장식하거나 三尊像삼존상을 天蓋천개와 함께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상대와 하대에도 당초문이나 보상화문 외에 국화문과 번개무늬(雷文뇌문)과 같은 기하학적 문양 등의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다.
특히 마애종에서 주목되는 당좌의 표현은 분명히 종신에 묘사된 4개의 撞座당좌를 나타낸 것으로 淸寧4年銘청녕4년명 종(1058년)이 가장 빠른 예이지만 고려 범종의 경우 그다지 수효는 많지 않다. 당좌는 본래 종을 치는 자리로서의 기능이 우선이지만 보다 장식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그 수가 4개로 늘어난 것이며 종의 크기에 비해 매우 작게 표현되는 것도 역시 고려적인 새로운 변화이다. 이처럼 마애종의 당좌는 비록 그 수효가 통일신라에서 볼 수 없는 4개이지만 청녕4년명 범종에서도 볼 수 있어 고려 범종의 새로운 요소를 충실히 재현한 점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청녕4년 명종에 비해 당좌의 높이는 종구 쪽에 치우치지 않고 아직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종신 1/3 정도에 자리 잡고 있음은 청녕4년 명종보다 앞선 시기의 범종이란 점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안양 석수동 마애종의 제작 시기는 고려 범종에서 나타나는 종신의 외형이 바깥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점에 통일신라보다 고려 종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신의 상대 위에 입상화문대가 표현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일단 고려 후기의 범종 양식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아울러 용뉴가 그 입을 天板上천판상에 붙이고 있는 점은 통일신라 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전기에서도 이른 시기 범종 양식임을 보여준다.
상대 아래 표현된 굵은 연뢰의 표현과 종신1/3 정도에 자리 잡은 당좌의 위치도 통일신라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그 수효가 4개로 늘어난 것은 새로운 고려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미루어 이 범종은 고려전기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구비한 작품이면서 제작시기가 청녕4년명종(1058년)보다는 빠르고 어떻게 본다면 고려 범종으로 정착을 이루는 1010년의 천흥사종보다 이른 시기인 고려초기 범종 양식을 반영해준다고 볼 수 있다.
승려 입상을 중심으로 복원한 종의 크기가 2m 내외에 이르는 대형종이라는 점도 고려시대 초기의 종에서 대형종이 많이 만들어진 점과 비교될 수 있는 점이다. 종신에는 비록 비천상이 없지만 용뉴와 짧아진 음통의 형식은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광도현) 조우렌지(照蓮寺·조연사) 소장의 峻豊4年銘(준풍4년명/963년)이나 시모노세키(下關市하관시) 소장의 스미요시진자(住吉神社주길신사) 소장 범종(10세기 중~후반)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범종은 10세기 중~후반 쯤 조성된 통일신라 범종 양식에서 이제 고려범종으로 성립되는 시기의 고려 초기 작품을 따르고 있다고 추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안양사의 창건 시기인 고려 태조가 926년에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남행하던 중 절을 세웠다는 東文選동문선의 「衿州安養寺塔重新記금주안양사탑중신기」의 기록은 ‘‘옛적에 태조께서 조공하지 아니하는 자를 징벌할 목적으로 이곳을 지나다가 산꼭대기에 오색구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기어 사람을 보내 살피게 하였는데 과연 구름 밑에서 노승을 만났으며 그 분의 이름은 能正이었다.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누어 보니 태조의 뜻에 꼭 맞았다. 이것이 이 사찰을 건립하게 된 연우이다, 절 남쪽에 있는 탑은 벽돌로 7층을 쌓았고 기와를 덮었다,…(下略)”『東文選』권76, 李崇仁 「衿州安養寺塔重新記」
중요한 참고가 된다. 즉 이 마애종은 中初寺중초사와 관련된 통일신라 9세기보다는 10세기 전반의 安養寺안양사의 창건시기에 더 연관성이 많으며, 안양사 창건 이후인 10세기 중~후반에 안양사와 관련되어 조성된 마애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5. 석수동 마애종의 중요성 및 의의
석수동 마애 범종과 함께 범종을 치는 장면이 묘사된 것으로는 일본 나라(奈良내양)의 주구지(中宮寺중궁사) 소장의 ‘天壽國曼多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은 622년에 제작된 것으로 작품으로서 당시 종교, 생활 장면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유명하다. 더욱이 수본의 우측 하단부에는 八作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 내부에 범종이 걸려있고 이것을 한 스님이 撞木당목으로 치는 구체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범종은 승려 입상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중형 이하의 작은 종을 묘사하였다는 점과 종신에 보이는 십자형 구획과 쌍용의 용뉴를 통해 초기 중국 범종인 祖形鐘조형종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수동 마애종 역시 전체적인 구성과 승려의 자세에는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범종 타종장면을 조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록 석수동 마애종이 돌이라는 재질의 특성상 원근감과 입체감, 정교한 세부 표현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범종의 모습만큼은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조각을 하였던 제작자는 당시의 범종을 충분히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었던 미적 감각을 지녔다고 추측된다.
한편 석수동 마애종은 원래 소리를 내는 佛敎불교 儀式法具의식법구로서 용도를 지니고 처음부터 조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의미인 소리로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애종을 조성한 목적은 바로 단순히 청동의 범종을 화강암의 마애종으로 변화시킨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상징과 이상의 소리를 구현해 냄으로서 범종이 지닌 자비의 사상을 조각으로 표현해 낸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安養寺址안양사지의 安養안양의 지명이 뜻하는 바처럼 그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범종의 소리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大乘佛敎대승불교의 가장 궁극적인 교리를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석수동 마애종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벽면에 조각한 마애 범종이란 중요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범종을 타종하는 승려 입상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두어야 한다. 현존하는 유일한 삼국시대 자료인 天壽國曼多羅繡帳천수국만다라수장이 당시 범종의 형태와 타종의 모습을 통해 범종이 사찰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구체적인 자료라 한다면, 이 안양사 마애종은 통일신라의 범종 양식을 이어받아 새롭게 고려의 범종이 창안되는 과정의 범종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승려가 들고 있는 撞木당목도 지금까지 확인된 바 없는 고대의 범종 당목을 재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자료임에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석수동의 마애종은 고려 10세기 중~후반쯤 당시 통일신라 종 양식을 아직까지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 초의 범종 양식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鐘樓종루 안에 달린 2m 내외의 대형 범종을 당시의 스님이 당목으로 打鐘타종하는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과 강조를 적절히 조화시켜 성공적으로 구현한 고려초 마애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이러한 석수동 마애조각의 중요성과 의의를 통해 이제 지방 문화재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됨이 마땅하리라 본다(* 편집자 주
일반 시민과 청소년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한자말로 된 전문용어를 한글로 함께 풀었습니다.
).
2008-11-14 15: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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