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조성현]안양의 독립운동가(2020.05.29)

이야기보따리/자료

안양의 독립운동가

 

이 글은 안양문화원 해설사들의 자료 공유 공간인 다음카페 마애종사랑(dhttp://cafe.daum.net/maejongsarang)에 올려진글로 조성현 해설사가 안양시 사이버향토사박물관에 있는 자료를 재수정한 내용입니다.

 

  1. 원태우(元泰祐) (고종19(1882)∼1950) 독립운동가.

본관은 원주(原州). 원태성과 이호순 사이에서 2남으로 안양시 만안구 안양 1동 642(현 농협중앙회 안양시지부 부근)에서 태어났다.

문헌에 따라 원태근; 김시근;.김태근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원태우로 되어 있다.

그의 형이 원영우인 것으로 보아 「우(祐)」가 항열로 보여진다.

그는 본래 농촌 출신으로 깊은 학식은 없지만 평소에 의기가 높고 바른 일에 앞장을 서는 정신과 기백이 있었다.

그가 23세 되던 해(1905)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위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맺기 위하여 광무8년(1904) 러일전쟁의 승리로 이끈 후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상 우월한 지위와 권익을 얻게 되자 침략의 첫 사업으로 먼저 외교권 박탈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광무9년(1905) 10월에는 포츠머스 회담의 일본측 대표인 고무라를 비롯하여, 주한공사 하야시, 총리대신 가쯔라등이 조약을 체결 할 모의를 하고, 그해 11월 9일에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히로부미를 황제 위문 특파대사라는 구실로 한국에 파견, 한일협상안을 정부에 제출 토록하고, 10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히로부미는 그 다음날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일본 천황의 친서를 봉정(奉呈)하고, 15일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보였는데, 그것이 중대한 내용이어서 조정의 반대가 심하였다.

16일에는 정동에 있는 손택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이하 여덟 대신을 위협하여 헙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에는 일본공사가 우리 정부의 전 각료를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 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까지 동의를 얻지 못하므로, 그 길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기로 하였다.

이날 궁성의 주위 및 시내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고 다른 부대는 쉴 사이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궁중에는 거리낌 없이 드나들면서 시위하였다.

이날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 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황제를 배알하여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정부 대신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한편 어전회의는 고종황제가 병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채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는 이토히로부미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히로부미는 즉시 각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협약에 대한 찬부(贊否)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병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반대 하였을 따름이고 다른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하였다.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위협적으로 조인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을사조약이 체결 되어 외교권이 탈취 당하였다는 소식이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동 조약체결 다음 날인 11월 18일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들은 통곡과 격분속에서 한때 나마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 종로상인들은 철시한 채 통곡하는가 하며, 각급 학교는 문을 닫고 스승과 제자가 손을 맞잡고 개탄과 비분에 빠졌다.

3일 후에는 사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 선생이 자신이 사장겸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 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480여 자(字)의 논설을 실어 온 국민의 울분을 대신 해서 풀어준 결과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2천만 한국민을 항쟁의 대열로 끌어 들이기에 족 할 만큼 격동적이었다.

 5일 후인 11월 22일에는 조약체결의 장본인이자 우리민족의 不共戴天之怨讐인 이토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의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 하고 이날 오전 9시에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하차, 수원의 주산인 팔달산 등 경치를 구경하고 수원에서 안양까지 사냥을 하며 안양에 도착, 안양역에서 오후 6시 15분 서울 행 열차를 탔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지방을 구경 한다는 소식을 접한 지사는 동료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 등과 함께 거사할 것을 맹세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지나가는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 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이만려가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그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졌다.

이때 유리창이 박살나며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 군데에 박혔다.

이 사건으로 오후 7시에 도착할 예정이던 열차가 1시간이나 지체해 8시에 도착했다.

이 사건이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2일 후인 11월 24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해서 였고, 일본에서는 사건 발생 다음날부터 신문에 보도되었다.

오사카에서 발행한 대한매일신문 11월23일자에는 원태근이란 이름으로 안양시장「22통1호」라는 주소와 함께 보도했고, 도쿄에서 발행하는 동경매일신문 11월29일자에는 「이토 히로부미 조난 전말」의 기사로 사건상황을 설명했으며, 일본 박물관 발행의《일로전쟁화보》제29권(1905.12.8 발행)에는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하의 기록화와 함께 보도했다.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그린 것으로 명기된 이 그림은, 갓을 쓰고 휜 도포를 입은 남자(원태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을 앞둔 궁중의 고뇌에 찬 어전회의 장면 등도 함께 담겨 있는데, 동 화보에 의하면 이토히로부미는 그해 11월 25일 낮 12시 30분부터 남산 기슭의 주한일본군사령부 정원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장 입구에는 화려한 아취를 세우고 세계 각국의 만국기가 휘날렸으며 또 10개소의 음식 테이블을 설치하고 일본과 한국기생들을 동원, 내빈들을 접대하고 여흥으로 일본씨름 스모와 줄타기 등을 했다.

한편 원 지사는 사건 직후 사이토 일본 헌병대장이 수명의 헌병과 경찰들을 이끌고 현장에 내려와 철도 공부 다니노와 야마사키의 도움으로 원 지사를 포함한 4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그중 이만려 김장성, 남통봉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원 지사는 철도 방해죄로 감금되어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영등포 감옥에서 풀려난 원 지사는 왜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온몸에 흉측 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더욱이 생계를 꾸려 나가기 여의치 못해 원 지사 형(영우)의 삼남인 계복(1910∼)씨가 원 지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쓸쓸히 타계해 안양시 만안구 안양 4동 709∼16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뤘는데, 그후 1982년 이곳에 화영아파트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원 지사의 유품으로는 원 지사가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고, 또 한 개와 맷돌 1개는 원 지사의 양자인 계복씨가 소장하고 있다. 의거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1990년 8월15일에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11월 22일에는 안양의 자생단체인 「새안양회」에 의해 「원태우지사의거비」가 안양만안시립도서관 광장에 세워졌다. [참고문헌]《기려수필》,《속음청사》,《대한계년사》,《독립운동사》,《안양문헌》, 시흥군지》,《경기인 물지》,《일로전쟁화보》,《대한매일신보》

 

 

   2. 한흥이(韓興履. 恒吉) (광무 1(1897)∼1979)

독립운동가. 교육가. 호는 몽당(夢當). 본관은 청주(淸州). 용익(用翼)의 아들로 부천에서 출생하였으나 어린시절 안양으로 이전하여 동안구 호계동 289번지에서 성장하였다.

아명은 정봉(丁鳳)인데 8살 때(1904) 민적법(民籍法)이 실행되자 조부가 「한 나라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뜻으로 「흥이」로 이름을 지었다.

10살(1906)까지는 조부로부터 천자문·소학 등을 배웠고, 13살(1909)부터는 호계동 소재 낙영학교(樂英學校) 2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 해 폐교되자 수원군 반월면 4리(현 안산시 4동)소재 장화의숙(長華義塾)에 편입하여 맹자·수학·일어 등을 수학하고, 이어 1915년에 시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교 전신)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학비문제와 집안내의 반대의견에 부딪히어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조부의 시국관인 일제가 운영하는 관립교육에 대한 반감의식과 정면으로 대립 되었던 것이다.

즉 조부의 뜻은 경성고등보통학교는 관립학교로서 일제가 주관하는 학교인데 어찌 한국인으로서 그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겠느냐? 는 지론이었으나 그는 신지식을 습득하여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의 불행을 막아보자는 어린 마음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부모가 아들에 대한 뜻을 표명하여 끝내는 조부를 설득시켜 입학을 허락받자 서울 만리동 소재 김달환 댁에 기숙하며 통학하였다.

입학 후 학생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특히 2학년 때(1919) 일어난 3·5학생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최초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1919년 3월 3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초로 반일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11살 되던 해(1907)년 밭에서 김매고 있던 한국인 농부를 왜병이 구타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던 때였다.

그 후 항일운동에 직접 가담한 것은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경기고보 재학중에 기차 통학생의 임무로 독립선언서를 분배받아 시흥·안양·군포역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의 당연 성을 역설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1일의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있은 후 3월 5일에 학생들로만 구성된 항일독립운동이 경성역(현 서울역) 광장을 기점으로 계획되어 오전 9시경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수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었다.

이 장소를 택한 이유는 고종의 인산(因山)을 마치고 귀성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모일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이다.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만들어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시위군중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남대문에 이르렀다.

이날 남대문에 모인 전체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둘렀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학생시위대들과 왜경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도 이때 경기고보 학생신분으로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육모방망이로 정강이를 맞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게 구금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잘못했다」 한마디만 했으면 학생의 신분이므로 훈방으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아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부친은 영등포 경찰서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어머니는 아들의 반송된 두루마기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 졸도 하였다가 그 후 병을 얻기 까지 하였다.

3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감 하자 요시찰인물이라는 낙인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

이때 국권의 회복과 구국(救國)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보통학교 교원 양성소를 지원, 1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전과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학교 당국자로서는 불합격시키기는 아까운 일이었다.

후일의 책임문제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등포경찰서에 전화로 조회한 결과 당시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학생들은 모두 복권되었으니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회신을 받고서야 입학을 허가하였다. 재학중에는 반장을 맡아 학과목 담임이 공무상 출장으로 수업이 결강되면 으레 대강(代講)을 하였다.

1923년 3월 수료식을 앞두고 전과 사실로 또 한 차례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급기야는 수료식을 1주일 동안 연기 하고 야간회의까지 거듭한 결과 졸업은 시키고 우등상을 주나 상장 문안(文案)에 「품행방정」이라는 말을 빼기로 하고, 학교 배치는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 3년 의무 복무로 한다는 등의 결정을 보았다.

그 후 서울 수창동에 소재한 경성보인학교(현 보인상고 전신)에 부임하여 졸업반 담임에 학생감·교무주임의 중책을 맡았다.

1927년 경성부에서는 학교 행정의 효율화와 모범교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학사 시찰단을 구성하였는데, 그는 사학(私學)의 대표격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여러 곳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낙후성과 현재의 우리 학교 교육이란 결국 일인양성정책의 일환이란 느낌이 들어 귀국하는 길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일본 시찰 중에 절감했던 또 한가지 사실은 법률 지식에 대한 부족이었다.

그래서 경성법정학교 야간부에 입학, 3개년의 과정을 이수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하고, 이어 동년 4월 경성매일신문사 기자로 입사하였으나 그의 강직한 기사로 말미암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신문사에서 알게 된 한 상사의 추천으로 경기도 포천의 연초판매소의 사원으로 발령받아 근무 하였는데, 일본 식민통치의 「눈에 가시」 같은 요주의 인물이라 하여 일반인들로부터 철저히 격리 시키기 위하여 함남 영흥을 거쳐 삼수갑산, 강원도 양구 등 춥고 외진 벽촌에서만 근무케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안양에 정착, 그해 11월 국가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 일념에 따라 안양시 안양동 603에 안양 직물공장을 설립하였다.

안양직물의 제품은 질 위주로 튼튼하고 건실하게 만들어져 「쇠가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이 제품에 외제상표를 붙여 판매 한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있었다.

당시 공장 내의 근로자들의 학력수준이 매우 낮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공장 내에 공민학교를 세워 근로자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이때 시흥군면보단장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948년에는 경기도로부터 효자상을 받았고 이 해에 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항길(恒吉)」 개명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장문을 닫고 5리 밖에 있는 호계동 본가로 가있다가 그해 12월에 부산으로 피난을 했다.

이듬 해 일자리를 찾던 중 부산 시내에 소재한 <국제신문사> 기자로 취직했다.

서울의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상경 했던 길에 안양직물공장이 완파된 것을 목격했다.

공장은 전쟁이 나자 도보로 남하하는 인민군 숙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전략상 대형폭탄을 투하하여 완전 파괴시킨 것이다. 전쟁으로 공장이 완파되자 지금의 부천 소사공고(부천시 중구 심곡동 424) 자리에 있던 금정공업을 인수, 안양에서 기계 부품들을 뜯어와 닦고 손질하기 수 개월 만에 제품을 생산하였다.

회사명은 안양에서의 전직원이 다시 모였으므로 「안양직물주식회사」로 등기하여 1953년 5월에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8년에는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를 육성해야 되고, 한 산업체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를 양성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기술학교 설립을 신청, 인가를 받아 공장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소사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3년 후(1961)에는 소사고등기술학교와 소사고등기술학교 전문부가 각각 증설되었다.

1978년에는 고등교육의 기초인 전문대학에 뜻을 두고 학교법인 한길학원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에 취임한 후 이해 12월에 부천공업전문대학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듬해(1979) 3월 부천공업전문대학 개교식에 참석한 후 이해 5월 8일, 8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90년 8월15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묘는 시흥시 매화동 산 26에 있다.

 [참고문헌]

《몽당한한길선생유고집》,《독립운동사》,《현대사자료》, 《시흥군지>,<동아일보>,<경기신문>,<경기교육신보>,<중앙일보>,<안양신문>

 

  3. 하영홍(河永泓) (고종 16(1879)∼1915)

기독교인. 항일투사. 본관은 진주(晋州). 일명 주명(周明). 진찬(鎭瓚)의 아들. 세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연(演)의 15대손이며 조선 중기에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우청(遇淸)의 10대손이다.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삼막골에서 출생하여 21세 때(1900년) 안양시 석수동 지역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이듬해 감리교회 지도자교육반을 수료한 후, 삼막골 마을을 그리스도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전도하였다.

이어 전답을 판 돈 180원으로 초가 3간 규모의 삼막골교회를 세워 이 교회의 속장이 되어 광무 5년(1901) 8월 6일 스웨어러(미국인) 선교사와 존스 장로사(현 감리사와 비슷한 직 책)와 각회 교회 형제·자매 70여명이 봉헌예배를 올렸다.

그 후 가세의 빈곤으로 짚신을 팔아 생활하던 중 25세가 되던 광무 8년(1904)9월 14일(음력 8월 5일) 하오 3시 시흥읍 내의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서 시흥농민들이 봉기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견은 일본이 동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을사조약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원활한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사역키 위하여 동년 8월 청국 안동현지방의 병참기지와 철도건설에 노동자를 보내줄 것을 강요했다.

이에 농민들은 과대한 역부의 모집과 시흥군수 박우량이 역부들의 노임을 한푼도 주지 않고 착복하는가 하면 역부 모집에 있어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자 시흥의 6개면 농민 수 천명(혹은 1만명)이 항쟁을 한 것이다.

그는 성우경(광명시 가학동 출신)과 함께 주동자로 지목되어 곧바로 순검에게 체포되어 15년의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가 그후 1등급 감하여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 3동 병목안(?)에 있었는데 1960년대 도시화로 인하여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시흥직산안핵사주본》,《일한외교사료》,《수원지방교회자료집》,《향기》,《시흥군지》, 《한말시흥농민운동에 관한 연구》,<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신학월보>, <감리교회 연회록>, <안양시지>

 

  4. 이영래(李永來) (고종 10년 (1873)∼1949)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태순(泰純)의 장남으로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113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27일 광목 행상도중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백기화(白基和) 집에 들러 그 집에 모여 있던 이종교(李種敎)외 수명에게 "다른 마을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불러 기세를 올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짚신만 삼고 있어 되겠는가"라고 말한 후 주민 약 5명과 함께 그 날 밤 8시경 관양동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침으로써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켰다.

이 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옥에서 석방된 후에는 광명시 일직동 220번지에 이주해 살다가 1949년 2월 17일 상오 11시 사망했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묘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쟁골에 있었는데 군부대가 들어서자 화장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자료집》, 《시흥군지》

 

   5. 이재현(李在賢) (1917. 2. 2 ∼1997. 2. 24)

경기도 시흥 동면 사람이다.

이명(異名)으로 이해평(李海平), 이재두(李在斗) 로 사용.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공작대를 조직하여 전지에 나가 대일 항전을 전개 하였는데, 이 공작대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이다.

그는 동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공작대는 서안(西安)으로 이주 하였으며, 그는 김동수(金東洙), 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서성(山西省) 등지로 파견 되어 중국 호종남(胡宗南) 직속의 산서지구(山西地區) 유격대와 합류, 정보 수집, 적정탐색, 초모 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 소동구(小東口)를 본거지로 하여 노안성(路安省) 및 하남성(河南省)의 초작( 炸)등지로 진출하여 과감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 됨에 따라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는 광복군 제5 지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월환(羅月煥)은 지대장으로 임명 되었으며, 그는 이하유(李河有), 박기성(朴基成), 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5 지대는 서안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 하면서 장병들을 훈련하는 임무에 종사하는 동시에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정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광복군의 재편성에 따라 제5지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 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 하던 중 광복을 맞이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7년 2월 24일 자택에서 돌아가셨으며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모셨다.

가족으로 부인 김숙 여사와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한국독립사(김승학), 무장독립운동비사, 일제침략하36년사, 임시정부의정원문서,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6. 이재천(李在天) ((1913. 5. 10 ∼ ?)

경기 시흥 동면 사람이다.

호(號)는 우봉(牛峰). 상해 망명 독립지사 이용환(李龍煥)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상해에 있는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였다.

부친의 뜻을 계승할 것을 결심하고 1929년 2월에 화랑제도를 본 따 민족의식의 고취와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조직된 화랑사(花郞士)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의 연락업무, 임시정부 요인 등의 송영(送迎)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임정(臨政) 국무위원 조소앙 선생의 지도 아래 '화랑보(花郞報)' 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상해(上海) 교포들에게 배포 하였다.

1931년 백범 김구(白帆 金九)선생 지도하에, 상해 한국소년동맹조직위원장에 취임하여 무력항일 투쟁을 전개 하였으며(단원 약 200명), 월간지 '새싹'을 발행하여 상해는 물론 조선내(朝鮮內) 각지로 발송하고, 3·1절 기념일(紀念日)에는 '3·1 기념일(紀念日)을 경축(慶祝)함' 이란 격문 700∼800매를 인쇄하여 살포하고 조선내로도 발송하였다.

1932년 8년 29일 기념식을 상해 중국가(中國街) 침례예배당에서 거행 하였는데 등단(登壇)하여 연설을 하였다.

1935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0월 임시 정부의 밀명(密命)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6년 2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김구(金九) 일파로써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을 언도 받고 서대문 형무소와 대전감옥(大田監獄)과 에서 복역하였는데 1940년 8월 18일 석방된 기록이 있다.

이후 행발불명되었으나 일본이 자료 공개를 거부하여 자세한 내막을 모르며, 고문에 의한 정신 이상으로 수감 생활을 할 수 없어 석방 하였을 것으로 추정함(4년 5개월 21일 복역).

일본 경시청의 자료 공개 거부로 사망 일자 확인이 불가능하고 시신도 없어 순국선열(殉國先烈) 위패(位牌)조차 모실 수 없었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을, 1991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2000년 11월 7일 보훈처에서 그의 후손이 없으므로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기로 결정.

2000년 12월 10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충렬대(忠烈臺)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에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현재 직계가족은 없으며 동생 이재현의 장남 이형진씨가 석수동에 거주 하고있다.

[참고문헌]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사상정세시찰보고집,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