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안양 미륵은 어디로 갔나?
안양 미륵의 기록은 문헌적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 오는 설에 의지하고 있다.
안양미륵당 이란 말은 정조가 아버지능이 있는 화성(수원)을 가기 위해 기획한 園幸乙卯整理儀軌에 궁에서 수원(화성)까지 거둥의 안전을 위해 척후소로 24 곳의 塘馬를 설치하는 중에 제13 당마소가 安養彌勒堂站 이란 말이 있고 口傳에는 정조가 안양을 지날 때 번번이 말이 발길을 떼지 못 하자 그 연유가 미륵부처에게 불공을 드리지 않는 탓이라 하여 불공을 드리니 비로소 말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미륵을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위치는 지금의 안양역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구전에는 언제 형성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여기가 미나리밭 이었는데 동네 할머니가 꿈속에 미륵부처를 본 후 불상의 돌 갓을 발견 하고 지난 밤 꿈을 상기 하면서 그 밑을 파보니 마침내 석조 미륵불을 발견하고 그곳에 움막을 지어 미륵당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그곳이 미나리 밭이라는 이야기는 지금 70대 중반된 시민들도 알고있는 사실임을 볼 때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갔다.
여기서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안양역이 생기면서 안양미륵은 밀리기 시작하여 지금의 본 백화점 자리로 이사 하고 또 한때(1987년)는 화재로 인한 수난도 겪었다.
1983년 도시개발의 힘에 밀려 본 백화점에 자리 물려주고 호계2동(지금 **아파트)으로 가면서 龍華寺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거듭 나기는 했으나 또 인간들의 모사에 밀려 안양을 떠나 지금은 의왕시로 가버렸다.
2007년7월 일 의왕시로 간 미륵을 찾아 그 곳 주지스님을 만나 또 다른 정보가 있나 듣기로 했다.
그 스님도 원래 안양출신이 아니니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 이니 전해 내려오는 구전과 그의 같은 내용 이였다.
다만 어떤 할머니는 당시 무당할머니로 표현했고 그 할머니가 미나리 밭에서 찾은 미륵을 세워 노지에 있는 미륵에 집을 지어 미륵당이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고 했으며 이 미륵을
화응스님이 금강산에서 하산하는 길에 최초로 안양역전에서 지금의 본 백화점 자리로 옮겨 주민들의 예배 처로 한 것이 1946년이라 했다.
스님의 이야기로는 원래 미륵불은 민간 즉 서민들이 쉽게 길을 오가며 복을 빌고 하는 대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계동에서 의왕으로 옮길 때 계측한 무게는 정확히 8.5톤 이였고 당시 조성 연대를 측정 해 본 결과 약4~5백년은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본 백화점 자리에 있을 때 화재로 입은 상처로 어께 부분의 상처와 검게 그을린 흔적 때문에 하얗게 회칠을 해 노아 원형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문화재로서 가치도 상실하고 있었다. 또 머리위에 있는 갓은 석질이 같은 화강암이 아니고 시멘트 갔다고 했다.
정조의 화산능행의궤의 기록에 안양미륵참 이라는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래전 길가에 홀로서 있는 미륵을 경부선 공사와 함께 폐허 또는 묻히게 된 것을 해방을 전후하여 발견하고 한 무당할머니가 그를 중심으로 예배당을 지어 생활 한 것을 1946년 바로 해방 후 화응스님이 다시 전 본 백화점 자리로 옮겨 지금까지 안양 원주민들이 기억하는 미륵당 또는용화사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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