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사람

[20200209]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이억배 작가(경기일보)

안양똑딱이 2020. 3. 26. 12:29


“유령 같은 존재로만 있다가 이번에 처음 호명을 받았어요. 무명의 활동에 이름을 붙여준 것에 감사하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1980년대 수원지역 민중미술을 이끈 <포인트-시점時點ㆍ시점視點 >의 이억배 작가는 지난 3일 안성 그의 자택에서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근 경기도미술관이 1980년대 시대와 사회를 이끌어 온 소집단 미술그룹을 조명하는 전시를 3개월간 연 것에 대한 소회였다.

그의 말처럼 <포인트-시점ㆍ시점>을 비롯한 당시 소집단 미술집단 활동가들은 익명성을 대의로 여겨 시민과 지역과 사회에 몸을 던졌다. 1979년 12월 창립한 포인트는 그 중심이었다. 백종광, 장영국, 최춘일이 창립한 포인트는 수원 크로바백화점 전시실에서 창립 전시회를 열며 문을 열었다. 수원지역 고등학교 선후배들, 소위 ‘미술계 반항아’들이 몰렸다. 시대의 폭력과 불의의 맨몸으로 견뎌야 했던 시대, POINT는 이러한 시대적 고민과 사회에 대한 분노, 새로움에 대한 갈망 등을 현대미술의 실험적인 시도로 옮겼다.

이후 회원 대부분이 군 제대를 한 1984년, 진보적인 의식을 담은 예술활동으로 나아가고자 ‘시점시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포인트의 계승을 의미하는 볼 시(視)자와 새롭게 사회의식, 역사의식을 반영한다는 의미의 때 시(時)자를 결합했다.

이후 <군중 속으로>를 주제로 내걸고 수원지역뿐만 아니라 안양, 부천 등 경기지역 순회전을 열었다. 대중과 더 가깝게 소통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었다.

이 작가는 “작가의 지인과 수원미술인들을 비롯해 일반시민도 많은 관심을 가져 전시장 열기가 뜨거웠다”며 “1985년 순회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했지만, 포인트와 시점시점으로 이어지는 활동이 현대미술의 모태로 출발하며 이후 수원, 안양 등 경기남부 지역에 민중미술운동에 씨앗뿌리는 역할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부터 간직했던 예술가의 삶이자 꿈이었지만, 시대를 마주한 이 작가의 머릿속엔 늘 회의와 의문이 일었다. “멋진 예술가가 되고 싶기도 했지만, 그 시대를 살면서 내가 이런 활동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단한 사명감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민중에게 현실을 알리고 싶었고 미술을 통한 저항을 하고 싶었습니다.”

포인트-시점ㆍ시점이 해체된 이듬해 이 작가는 최춘일, 이득현과 함께 수원지역 목판모임 ‘판’을 결성한다. 민중미술 지향을 뚜렷이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내 문제로 여기며 일치시키고자 분투했다. 미술인 두렁, 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 등 여러 지역의 소집단에서도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예술로 시대와 고군분투하던 그에게 우연히 찾아온 그림책은 “황무지에 단비가 내리듯” 그에게 생긴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줬다. 그림책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 있은 후 1995년 명절 고향으로 향하는 <솔이의 추석이야기>를 펴냈다. 민중미술의 경험은 고스란히 그림책으로 옮겨졌다. 대중관과 화풍, 가치관, 미학이 반영됐다. 이후 민족성, 전통의 문제 등의 화풍이 담긴 <세상에서 제일 힘 센 수탉>,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모기와 황소> 등을 줄줄이 내며 대한민국 1세대 대표 그림책 작가로 활동 중이다. 한국적인 그림과 정서를 담은 특유의 풍속화적인 그의 그림책은 대중의 호응을 받고 있다.

2010년도에 펴낸 한·중·일 평화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은 그가 그동안 그림책 작가로서 골몰했던 주제를 응축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비무장지대에 봄이오면>의 마지막 장면에서 끝내 열지 못한 ‘마음속 철조망’을 지난해 출간한 <봄이의 여행>에서 열면서 완결편 작업을 마쳤다.

그는 “<비무장지대에 봄이오면>에서 DMZ 철문 앞에선 할아버지가 철문을 열고 들어가 북쪽 형제들과 상봉하는 판타지로 마무리했는데, DMZ의 철문만 열고 더 가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면서 “<봄이의 여행>은 휴전선에서 봄이와 할아버지가 전국의 장날을 순례하고, 사춘기가 된 봄이가 두만강역에서 혼자 대륙 횡단열차를 타며 두만강까지 여행하는 걸로 마무리하면서 철조망을 연 완결편을 마쳤다”고 말했다.

<비무장지대에 봄이오면>은 해외에서도 호평 받고 있다. 지난달 27일 전미도서관협회(ALA)가 주관하는 밀드레드 배첼더 어워드에서 어너리스트로 선정됐고, 미국 내 아시아교육협회가 주관하는 프리먼 북 어워드에서 어너리스트에도 뽑혔다. 또 지난달에는 1996년도에 출판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새롭게 작업한 <오누이 이야기>를 펴내며 ‘이억배표 호랑이’로 아동, 성인들과 다시 만나고 있다.

그는 “그동안 10년간 나를 지배한 건 평화그림책이었는데, 이제 마침표를 찍었다. 한 주제에 골몰하니 말랑말랑한 주제들이 다 날라가버렸다”면서 “어둡고 무거운 얘기뿐만 아니라 일상의 작고 소소한 웃음과 행복을 주는 부드러운 주제들을 가지고 계속 그림책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자연 기자

 

출처 : 경기일보(http://www.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