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1회 졸업생… 이경수 옹
[안양시민신문]2007. 7. 26
손병학기자 블로그 http://upstart.blog.me/50020167892
“90년의 세월도 나그네길일 뿐 아니겠나”
안양공립보통학교(안양초) 1회 졸업생… 이경수 옹
전쟁 뒤 손목시계 하나로 재기에 성공해
“나에게 남은 여생은 교회일 돕고 싶어”
“일본군으로 갔던 남양군도에서 1년9개월 만에 돌아오던 날이었어. 도쿄에서 하루를 묵고 요코하마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데 구명조끼를 하나씩 나눠주는 거야. 어쩐지 ‘여기까지 와서 죽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
일본군으로 끌려가 2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던 스무 살이 갓 넘은 이 앳된 청년은 다행히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안양에서는 귀향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너무 슬프면 눈물이 안 나오지만, 너무 기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야.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서 쏟아지는 눈물이 내 눈으로 보이더라구”
1928년 개교한 안양초등학교(당시 안양공립보통학교)는 안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초등학교다. 이 학교 1회 졸업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이경수 옹(1918년 3월17일 생)을 만나게 된 것은 스톤앤워터(관장 박찬응)의 ‘기억프로젝트’ 덕분이기도 했다. 이윤진 큐레이터는 친절하게 섭외까지 도와주었지만, 막상 이경수 옹을 만나려니 덜컥 겁이 났다. ‘90년 동안 살아온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감히 어떻게 써 낼 수 있을까’
안양공립보통학교가 생겼을 때 전교생은 45명에 불과했다. 11살 이상은 2학년으로 그 미만은 1학년으로 편입됐다. 시설이나 교사수도 부족했기 때문에 4학년까지만 다닐 수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자 긴 나뭇가지에 가마니를 묶어서 흙이나 돌 퍼 나르는 일을 했어. 운동장 만드는 일도 학생들 일이었거든. 온통 빨간 진흙이 묻어서 옷이니 몸새니 형편없었지 모야”
4학년을 마치고 교장의 추천서로 군포초등학교로 옮기면서 형편(?)은 조금 나아졌다. “안양에 통학생이 나밖에 없었어. 전교생 돈을 모아 안양우체국으로 저금하는 일을 맡으면서 풀 깎고 퇴비 만드는 잡일은 면제가 됐어. 허허” 군포초등학교 14회로 졸업한 이경수 옹은 수리산 끝자락 양짓말에 있는 한글서당에 2년을 더 다니게 됐다. “그때 왜 중학교로 가지 않았나 모르겠어. 아무튼 서당을 나온 뒤로 장사를 하고 싶더라구”
당시 이경수 옹의 아버지는 과자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안양역 철길 조금 위에 다리가 있었어. 지금은 복개해놔서 모르지. 다리 못미처 둘째 집 과자공장이 우리 집이었어” 설탕배급을 맡기도 한 그의 집에서는 눈깔사탕을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걸 받으려 늘어선 줄이 안양역 로터리까지 이어질 정도로 꽤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6.25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니 그 공장은 폭격을 맞아 다 없어져 버린거야” 모든 가족들의 실의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경수 옹은 가지고 있던 손목시계를 팔아 자전거부터 샀다고 한다.
“영등포에 큰 과자도매상에 가서 조금씩 물건을 떼다가 우시장 인근에서 과자를 팔았어. 근데 그 도매상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돈 걱정은 말고 많이 가져다 팔라’고 말하는 거야. 우리 가게를 본적도 없으면서 말이야. 그때부터 조금씩 가세가 일어나기 시작했지” 이후 이경수 옹은 과자도매점 3곳을 가진 것은 물론 롯데라면(현 농심) 대리점까지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게 됐다.
나이 60이 넘어서면서 그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념하게 됐다. “남부시장에 누가 중국음식점을 해보라고 해서 하게 됐지. 근데 영 술을 같이 판다는 일이 마음에 걸렸어. 교회에 몸담은 장로가 할 일은 다른데 있다고 생각 했어” 그는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 등에 개척교회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중국을 비롯해 사이판에도 교회 설립을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나그네 같은 인생 마치면 영원한 나라로 가는 것 아니겠나”
안양제일교회 임칠호 장로는 장학기금명감에서 “이경수 원로장로의 발자취를 찾기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크고 확실해서 한정된 지면에 옮겨 쓰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고 말할 정도다.
안양초 1~8회 졸업생은 35년 전 동창회를 만들어 지금도 2달에 한 번씩 모이고 있다. 2005년에는 효행상을 만들어 100만원의 금액을 시상할 만큼 활동이 활발하다.
“(기억프로젝트)전시회를 하는데 안양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면서 말을 하라고 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아나. 다만 새로운 문화 때문에 가정문화가 허물어져 가는데 효행이라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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