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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득]치열했던 모락산.수리산 전투

안양똑딱이 2016. 6. 11. 08:27

특별기고- 6.25전쟁,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51년 1월 유엔군이 대규모 반격작전 중 일어난 전투
전적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주민들도 모르고 있어

글을 시작하며

2003년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6.25전쟁은 북한 공산정권이 한반도의 적화를 위해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힘을 합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 6.25전쟁 이후 지난 50년간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가 속출한 대변혁기였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이던 소련이 70년 역사를 끝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져갔다. 이로써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는 붕괴되었고, 우리와 줄곧 적대관계를 이뤄왔던 중국과는 국교정상화로 우호국가로까지 발전하였다.

이처럼 온 세계가 급격히 변화하였으나 유독 변하지 않은 집단이 있다. 북한의 김정일 집단은 아직도 한반도 적화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군비를 증강하며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휴전 이후 북한은 강성대국.선군정치를 고집했다. 그래서 스커드 미사일,대포동 미사일, 화학무기에 이어 핵무기 개발에 광분하고 있다. 과연 무엇을 위한 군비증강인가? 이들 무기의 대부분이 휴전선 부근에 한국을 향해 배치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해답은 명백하다.

반면에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6.25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안보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퇴색되어가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금강산 관광, 남북 육로연결,북한의 아시안 게임 참가 등의 남북간의 교류는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를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서해교전, 북한의 핵개발 문제 등의 민감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안보의식은 매우 약화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6.25전쟁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있다. 아니 50년전에 끝나버린 전쟁으로 치부하고 있다. 일부 젊은이들은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며, 이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4만여명의 젊은이가 전사한 미국을 침략자로 매도한다.

또한 미 2사단의 훈련중 불의의 사고로 숨진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서 수 십만명이 촛불시위를 하면서도, 적과 전투중 장렬히 전사한 서해교전의 전쟁영웅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진국은 전쟁을 통하여 교훈을 얻고, 전쟁의 영웅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天下雖安 忘戰必危(천하수안망전필위)"의 교훈을 새겨야 한다.

필자가 안양시, 과천시, 의왕시를 담당하는 대대장으로 부임한 지가 일년이 되었다.

이곳은 수도서울에 근접해 있고, 교통이 편리할 뿐만아니라 주변이 관악산, 수리산, 백운산, 청계산, 모락산 등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기가 맑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도시도 50년 전에는 이라크전쟁시 바그다드의 모습처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음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곳에 부임하기 전에 육군대학에서 한국전쟁사를 2년간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대대장 부임 후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6.25전쟁사에 잘 알려진 수리산과 모락산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리산에는 전적기념비 하나 세워져있지 않았고, 모락산 정상에는 우리 대대에서 6.25전쟁 50주년 기념으로 세운 조그마한 기념비가 고작이었다. 지역주민들도 이 고장에서의 전투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행히 6.25전쟁 휴전 50주년을 맞이하여 안양시민신문에서 6․25전쟁 관련 특집기사를 기획하고 있어서 내심 많이 기뻤다. 그래서 앞으로 3회에 걸쳐서 6.25전쟁을 개관하고, 수리산 전투와, 모락산 전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6.25전쟁을 이해하고, 특히 안양 / 의왕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리산과 모락산 전투의 치열했던 격전을 되새겨서 시민들이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이해하고, 평상시에 전쟁에 대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1. 북한군의 남침 (1950. 6.25~8.3) 2. 낙동강방어작전(1950.8.4~9.14) 3. 인천상륙작전과 반격 (1950.9.15~9.30) 4. 8선돌파와 북진(1950.10.1~11.24) 5. 중공군 개입과 1.4후퇴 (1950.11.25~1951.7.9) 6. 전선의 교착과 휴전(1951.7.10~1953.7.27)

6.25전쟁 개관

북한군은 1948년 말부터 본격적인 남침준비를 하면서, 인민유격대를 남파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켰다. 전쟁직전에는 위장평화공세를 펼치면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투력을 38°선 일대에 집결시켜 이미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1950년 6월25일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전쟁은 계속되었다.

그 동안 6.25전쟁은 25개국이 참전한 국제전이 되었다. 6․25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우려한 유엔군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군사적 제한조치를 가했다.

따라서 유엔군사령관은 제한된 조건 속에서 군사작전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 결과 6.25전쟁은 다른 어떤 전쟁보다도 아주 독특하고 다양한 특성을 가진 전쟁이었다.

6․25전쟁은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기존으로 크게 6개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6․25전쟁을 개괄적으로 요약하면 아래 요도#1 6․25전쟁 경과와 같다.

제 1기는 북한군의 남침기로서 북한의 기습남침 후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북한군은 최초 공격시 한국군 주력을 한강이북에서 포위격멸하기 위하여 북한군 1군단을 주공으로 서부지역에 투입하여 분진합격의 모습으로 서부전선을 돌파하면서, 조공인 북한군 2군단으로 하여금 춘천지역을 조기 돌파 후 그 일부를 수원방향으로 우회시켜 퇴로차단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6사단의 효과적인 방어로 춘천지역을 3일간이나 확보함으로써 이 기도가 좌절되었다.

그러나 한강교를 조기 폭파하는 아군의 과오로 인해 그들의 의도대로 3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한강이북에서 포위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서울이 피탈되자 육군본부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하고, 이 시흥사로 하여금 서부지역에서 전열이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져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토록하였다. 시흥사가 한강선을 방어하는 동안 미지상군이 전개된다.

7월4일부터 차령산맥을 연하는 선에서 최초로 한․미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지연전을 실시하였다. 8월 초에는 낙동강선까지 밀려나게 된다. 한편 북한군도 전투력이 많이 약화되어 작전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제 2기는 낙동강방어작전기로서 낙동강을 연하여 방어선이 구축된 후부터 반격작전이 시작되기까지의 기간이다. 낙동강선에서 북한군은 이미 작전한계점에 도달한 상태였으나, 8월, 9월 두 차례 공세를 감행하여 아군이 낙동강 교두보 포기를 고려할 정도로 최대의 위기상황까지 조성하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해,공군에 의한 차단작전과 워커의 방어기조인 "기동과 역습"으로 적의 공세를 격퇴하고, 반격여건을 조성하였다.

미 지상군이 투입된 이후부터 9월 중순까지 미 8군사령관 워커는 전략적 주도권이 상실된 상황 속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힘겹게 저지하였다.

그 동안 맥아더는 약 75,000여명의 병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지 않고, 이 병력으로 미 10군단을 창설하여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미8군과 연결하여 적을 포위격멸하려는 준비를 추진하고 있었다.

제 3기는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기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가능성에 대한의문으로 많은 사람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성공을 확신하는 맥아더의 강력한 추진으로 9. 15일 감행되고, 이와 때를 맞추어 미8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38°선 이남에서 적 주력을 일거에 포위 격멸함으로써 9월말 38°선을 회복한다.

제 4기는 38°선 돌파와 북진기이다. 전세가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38°선 돌파논쟁이 대두된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다면 중․소가 개입하여 제 3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한반도를 완전통일하기 위해 북진이 결정되고, "50년 10월 1일 한국군 1군단이 동해안축선에서최초로 38°선을 돌파하였다.

북진간 예상외로 적의 저항이 경미했으므로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0월 24일경에는 청천강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소의 개입을 방지할 목적으로 국경선 부근에서는 한국군만이 작전을 하도록 미합참에서 유엔군의 북진한계선을 선정했다.

그러나 10월 19일 평양이 탈취되자 맥아더는 북진한계선을 조정하였고, 선두부대가 청천강까지 진출을 하자 이 선을 임의로 철폐하고 전부대에게 국경선까지 진출해도 좋다는 총추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 명령은 합참의 훈령을 정식으로 위배하는 월권행위였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다음날 발생한 중공군의 공세가 워낙 다급했기 때문에 추궁할 겨를도 없이 그냥 넘어가게 된다.

제 5기는 중공군의 개입과 1. 4 후퇴기이다. 유엔군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하면서 10월 중순부터 한반도 잠입에 성공한 중공군은 기습적으로 2차례에 걸친 공세를 취하였다.

이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유엔군은 지연전도 실시하지 못한 채 10일 만에 무려 250km를 무질서하게 철수하여 38°선일대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때부터 1951년도 전반기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중공군 정월공세, 춘계공세 등 중공군의 4차례 공세가 이 시기에 있었다. 이 중공군의 공세에 대해 유엔군은 적이 공격해오면 방어작전을 반복하면서 철수하다가 적이 공세한계에 다다르면 즉각 반격하는 식으로 3차례의 대규모 반격작전을 시도하게 된다.

다음호에 다루게 될 모락산 전투와 수리산 전투는 51년 1월에 유엔군이 대규모 반격작전을 실시하던 중 일어난 전투이다.

제 6기는 전선의 교착과 휴전기이다. 38°선 일대에서 공방전을 계속하던 유엔군과 중공군은 서로에 대해 일방적인 군사적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서로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 후 명예롭게 철수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유엔군이 3차 반격중에 소련의 제의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을 가지게 되고,이 때부터 전선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교착전 양상을 띄게 된다.

1951년도 후반기 이후의 군사작전은 한마디로 휴전회담을 위한 조연역할을 했다.

휴전회담은 피․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군사분계선 문제와 포로교환 문제 때문에 장기간 끌게 된다. 이 과정에서 "52년도에는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민에게 굴종을 강요하기 위해 중공군은 주로 한국군이 담당하는 전초고지위주로 집중공격함에 따라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면서 인명피해가 늘어나는 가운데 "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중령 임종득(모락산대대장)
(안양시민신문 03/06/27일자 발췌]


수리산, 치열했던 6일간의 전투
특별기고 6·25전쟁,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중공군, 북한군과 유엔군 사이 혈전, ‘수리산 전적기념비’세워져야

수리산전투

수리산은 안양, 안산, 군포시에 걸쳐있으며 주변 도시민들에게는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는 공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수리산은 봉우리와 주변경관이 뛰어나서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삼림욕과 등산을 즐기는 명소가 되어있다. 50여년 전 이곳은 중공군, 북한군과 유엔군사이에서 엄청난 결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름답기만한 수리산이 6일간의 전투의 포화 속에서 신음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 제8군의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의 터어키여단, 미 제25사단, 한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에서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하였다. 수리산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반월리를 거쳐 소사 및 인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고지였다.

따라서 미 제25사단은 서쪽으로부터 터어키여단, 미 제25사단 35연대, 국군 제1사단15연대로 수리산-모락산을 병진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나. 슬기봉전투
2월5일 제27연대3대대는 슬기봉은 공격하기 위한 공격위치에 도착한다. 대대의 공격계획은 L중대를 제1선에서 무명185고지로부터 능선을 따라 슬기봉 방향으로공격하기로 하고 I. M중대는 화력지원을 담당하고 K중대는 예비로 L중대의 좌측을 엄호하기로 했다. L중대가 무명185고지에 도착했을 때 터어키여단은 이미 하산을 한 상태여서 적 상황에 대한 인수인계가 되지 못했다.
한편 슬기봉으로 통하는 능선은 칼끝을 세워 놓은 듯한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능선의 폭은 겨우 3-4명이 통과할 정도로 좁았다. 경사면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외에는 은폐물이 없었다. 2월 5일 7시에 공격을 개시한 중대는 좁은 능선을 따라 돌격을 개시하였으나 번번히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L중대는 요도#5 슬기봉전투 경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대별로 능선을 따라 돌격을 하면서 대봉(440고지)와 슬기봉(431고지)을 점령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미미하였으나 중공군은 고지에 시체 27구를 남기고 철수하였다. 진지의 규모나 장비, 무기, 탄약을 고려시 이 지역에서는 적 50여명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요도#4 태을봉/ 슬기봉 전투작전.
가. 태을봉/슬기봉전투 (1.31-2.3)
1월 31일 아침 미 제25사단은 터어키여단을 좌측에서 슬기봉방향으로 공격시키고, 미제25사단35연대를 우측에서 태을봉 방향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사단 전포병의 5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적의 방어진지를 격파한 후 공격을 실시하여 12시 30분 경에는 터어키여단은 무명266고지를, 35연대 2대대는 무명250고지/210고지를, 1대대는 무명181고지/128고지를 점령하였다. 예상보다 쉬운 전투였다.
이때 2대대 E중대3소대장이 무명210고지 앞에 위치한 무명253고지에서 적이 허겁지겁 진지공사를 하는 것을 보고 바로 공격할 것을 대대장에게 건의하였으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해서인지 근접지원 요청만 하였다. 그러나 공군과 포병의 지원이 없자 15시에서야 공격명령을 하달하여 적기를 놓치게된다.

결국 이날 무명253고지 전투는 아무성과 없이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2월 1일 아침이 되자. 무명 253고지는 중공군이다 철수를 하고 무혈입성 하게된다.
2월 2일 미 제25사단은 터어키여단으로 하여금 슬기봉을, 미 제25사단 35연대 2대대로 하여금 태을봉을, 제1대대가 관모봉을 공격하게 하였다. 10시 30분에 공격을 개시한 유엔군은 12시경에는 2대대가 태을봉 턱밑에 있는 붉은 산에 도착을 했고, 13시 30분경에는 태을봉을 점령하였다. 한편 터어키여단은 제2대대의 태을봉 점령과 때를 같이하여 슬기봉지역을 점령하였다.

당시의 작전상황은 요도#4 태을봉/슬기봉전투 작전경과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날 저녁 터키여단은 중공군의 야간공격을 받게되고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후방으로 철수하거나 태을봉에 있던 미 25사단35연대 2대대 지역으로 철수하게된다. 이때 터어키군과 작전과 미군간에 의사소통이 안되어서 효과적인 작전이 어려웠다. 중공군은 태을봉에 위치한 2대대 E중대에도 밤새도록 계속 공격하였으나 미군들의 투혼으로 끝까지 사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 침낭이나 방한복도 없이 전투를 하면서 대부분이 동상에 걸리게된다. 이 전투는 백병전을 치루는 치열한 육박전이었다. 그래서 아침이 되어서 적이 물러난 후에 확인하니, 적은 100여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유엔군도 전사3명 부상 40명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2월 3일 아침이 밝았을 때 G중대가 교대를 하러왔다. 한편 터어키여단은 2월 3일 저녁 무렵에 슬기봉지역을 점령하였으나 야간에 중공군이 공격을 실시하여 다시 철수하게 된다. 이에 미제25사단은 터어키여단 대신에 예비로 있던 미25사단27연대 3대대를 슬기봉지역 전투에 투입하게 된다.


요도#5 슬기봉전투.
다. 안양시가지 전투 (2.4-2.5)
미 제25사단은 “수리산을 탈취한 후 2개의 기갑부대로써 국도와 소사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중요지역을 확보하면서 한강선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도를 따라 공격하는 돌핀특수임무부대는 제89전차대대장 돌핀 중령과 제27연대1대대장 길버트 첵 중령이 지휘를 하였다. 돌핀부대는 산본동 99고지에서 공격대기지점으로 이동하여 수리산이 점령되기를 기다리다가 안양 동북쪽에 솟아 있는 무명 303고지를 점령하고, 바래트특수임무부대는 소사도로를 따라 신촌-부노리지역으로 이동하여 운흥산-무명150고지를 점령하도록 계획을 하였다.
2월 4일 공격대기지점을 점령한 이들 특수부대는 공중과 지상으로 공격지역을 정찰한 결과 안양천의 얼어붙은 습지를 통과하여 정면에서 303고지를 강습하고 나서 안양시가지를 통과하여 무명175고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2월 5일 아침 7시에 돌핀부대는 공격을 개시하였다. 75미리무반동총과 4.2인치박격포의 지원하에 일제히 공격을 실시하였다. 9시에는 보병부대가 전차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무명 303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의 저항은 강하지 않았다. 13시가 되었을 때 돌핀부대는 무명303고지를 한 명의 피해도 없이 탈취하였다. 이때 산 위에는 56구의 적군의 시체가 있었다. 돌핀부대가 수리산의 후방에 위치한 무명 303고지를 탈취하자 슬기봉지역에서 저항하던 중공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6일간의 수리산전투는 막을 내리게된다.


맺는 말
지금까지 6.25전쟁시 우리고장에서 치루어졌던 모락산전투와 수리산전투의 격전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전투는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한 이후에 중공군을 대상으로 처음 실시하였던 제1차반격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유엔군은 1번국도와 소사/인천방향의 도로를 통제하게되어 수도서울을 회복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된다.
이렇게 중요한 전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수리산과 모락산에서 일어났다. 이 산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수많은 선배 전우들과 터어키군, 미군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가고 있다.

모락산 정상에 조그마한 전적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지난 2000년 6.25전쟁 50주년 기념으로 의왕시와 모락산대대가 공동으로 건립한 기념비이다. 우리 대대에서는 새해 아침에 해맞이 행사와 함께 전적기념비에 헌화와 분향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현충일, 6.25기념일, 훈련시 등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여 선배전우들의 넋을 기린다.
이곳에서 82세 된 노병을 만났다. 김안일 예비역준장은 모락산전투를 15연대장으로 직접 지휘를 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집도 모락산이 바라다 보이는 의왕시 내손2동에 정하시고 수시로 모락산을 오르내리시면서 당시의 전투를 회상하고 전우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고 한다. 우리 대대가 모락산대대로 명명하게 된 것도 6.25전쟁시의 선배님들의 전승과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서이다.

서두에서 필자가 언급했듯이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치열한 격전의 현장인 수리산을 가지고 있는 안양시에서는 이역만리에서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터어키와 미국 전우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손들이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냉정함을 잊지않도록 경계하기 위해서 전적기념비를 수리산에 세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중령 임종득(모락산대대장)
(안양시민신문 03/07/11일자 발췌]

2003-06-28 02:3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