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사진기록/탐사공지

[공지]안양탐사대 139차 탐방(20180929)_안양 평촌동 옛 골목길

안양똑딱이 2018. 9. 27. 13:07

 

안양탐사대 139차 여정_안양 평촌동 옛 골목길

9월 29일(토) 오후 4시/ 집결_평촌동주민센터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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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기억찾기탐사대 139차(2018.09.29) 여정에서 돌아 볼 곳은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과 그 경계에 있는 내손동 일부 동네입니다.  아파트숲에 들러싸인 이곳에는 오래된 옛 골목길과 기와집, 아담한 마당이 있는 주택, 멋진 디자인의 상점들이 자리하고 있어 평촌에 이런곳이 있어 깜짝들 놀라기도 하지요. 의왕시 내손동과 경계지역이기도 한 이곳 주거지역은 콘크리트 아파트가 대부분이지만 아파트 숲숲한복판에는 묘하게도 시골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일부 남아 있답니다. 3년전 지난 79차 탐사에서 동네를 돌아보았을때 100여미터가 넘는 숲이 우거진 골목길도 있고, 오래된 기와집부터 70-80년대 지어진 양옥주택에 연립과 낡은 저층 아파트 등 비록 집들은 허스름하지만 마당에는 대추나무, 감나무, 앵두나무가 익어가면 예쁜 빛깔로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으며 배추에 무우며 고추까지 재배하는 마당도 보았지요.

이는 그동안 거세게 불어닥친 개발도 거부한 토박이 원주민들의 고집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곳도 재개발 움직임이 일고있어 계획대로 라며 수년내 오랜기간 유지해 왔던 삶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79차(2015.09.19) 탐사 페북 사진첩 보기: https://www.facebook.com/choipong1001/media_set?set=a.1022373144474069&type=3

 

 

 

옛길을 걷는다면 한편 역사를 걷는 것이다. 최근 옛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많아졌다.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에 나타나 있는 태평원(太平院)과 석원(石院) 사이의 옛길. 원(院)은 조선시대 정부에서 만든 관용 숙소로 지금으로 말하면 관사와 비슷하다.
대로에는 조선시대 주막과 여인숙 기능을 했던 원(院), 말을 갈아타고 길 관리를 했던 역(驛), 역을 관리했던 찰방(察訪) 터와 각종 비석·장승·서낭당·당산나무 등 길과 관련한 흔적이 길손들을 반기고 여행자에게 또 다른 재미를 던져줄 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나타나 있는 옛길로는 一大路 의주로, 二大路 경흥로, 三大路 평해로, 四大路 동래로, 五大路 봉화로, 六大路 강화로, 七大路 수원別로, 八大路 해남로, 九大路 충청수영로, 十大路 통영別로 불리우는 지명이 붙어있다.
특히 과거 옛길은 신경준의 도로고에는 전국 6대로를, 김정호의 대동지지로는 9대로라 통상 말하지만 대동지지에서는 정조의 능행로를 '수원별7대로'라 따로 적어 모두 10대로라 할 만큼 정조에 의해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八大路 해남로는 경도를 출발 해남까지 이어지는 970 里 길로 그중 지역구간을 살펴보면 숭례문(崇禮門,남대문)-동작진(洞雀津)-승방평(僧房坪)-남태령(南太嶺)-과천(果川)-인덕원(仁德院)-갈산점(葛山店)-사근평(肆覲坪)-진진대(遲遲臺)-수원(水原)을 지나 해남(海南)-남리역(南利驛)-우수영(右水營)까지 이어진다.
지명중 인덕원(仁德院)은 안양시 관양2동이며, 갈산점(葛山店)은 안양시 평촌동과 의완시 내손동 경계인 갈뫼(갈미)마을, 사근평(肆覲坪)은 사근내. 의왕시 고촌동, 진진대(遲遲臺)는 지지대고개. 미륵당고개로 의왕시 왕곡동과 수원시 파장동 경계의 고개를 말한다.
갈산점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의곡면에 속했다가 1914년에 수원군 의왕면이 되었다. 이때 갈산동은 내손리와 포일리로 분할되었으며, 지금은 일부가 안양시 평촌동으로도 편입되었다. 옛 지도를 보면 '주막(酒幕)'이나 '참(站)' 또는 '점(店)'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에도 갈산마을은 안양시 평촌동과 의왕면 내손리(현 의왕리 내손동) 두 곳에 모두 기재되어 있는데, 안양시 갈산마을은 민백동(민백이) 마을 남쪽에, 그리고 내손리 갈산마을은 민배기(민백이) 마을 서쪽에 위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시기 제작된 지형도에는 갈산마을이 민백이 마을 남쪽에 표시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두개의 마을인 것 같지는 않다. 일제시기 지형도에서 갈산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현재 42번 국도로서 안양시와 의왕시의 경계가 된다.

안양 인덕원은 조선시대 한양의 관문에 있었던 행정관료들의 숙박시설인 원으로서 수원 방면에서 온 사람들이 과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유숙하던 곳이었다. 서울 부근 북동쪽에 퇴계원, 북서부에 홍제원, 남쪽 남산 아래 이태원 황해도의 사리원, 충청도의 조치원 등지는 모두 원과 관련 있는 지명들이다. 인덕원 동편 청계산 자락에 원터라는 마을이 있다. 전에 원이 있었던 터라는 뜻의 지명일 것이다. 그곳은 판교(널다리)를 건너 하우고개를 넘어 인덕원 쪽으로 오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었을 것이다. 안양 인덕원에 한양에서 지방을 오가던 행정관료들이 묵어가던 숙박시설(원)이 있었다면 평촌동에는 일반인들이 묵어가면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민배기(禿朴只, 民伯洞) <평촌동>]

평촌동 명칭은 넓은 벌판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벌말[坪村]이라고 한 자연마을에서 비롯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이동리(二洞里)였으나 1914년 시흥군 서이면 이동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1973년 안양시 평촌동으로 승격되었고, 1992년 동안구에 편입되었으며 1993년에는 평촌동과 평안동으로 분동되었다. 평촌동의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은 같으며 1994년에 평안동이 평안동과 귀인동으로 분동되면서 평촌동이 평촌동,평안동,귀인동 세 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별되었다.
평촌동은 인덕원과 갈미 중간쯤으로 과거 삼태기처럼 오목하게 생긴 마을로 민배기라 불리웠다. 과천.인덕원.갈미 등은 관아와 院이 있어 지체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데 반해, 이곳은 좀 외진 곳이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행려자들이 날이 저물면 민박을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민박이(民伯洞)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민배기(民伯洞)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원행정례>는 禿朴只로 기술되어 잇는데, 이는 민배기를 한자화한 표기라고 한다. 즉 禿 은 繹讀하여 민- 으로 읽어 민배기로 나타낸 것이다.
괴산 음씨가 처음으로 세거한 민배기마을은 동쪽 지역을 등너머라 칭하고, 그외지역은 민배기로 통칭된다. 또 마을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있어 그 서쪽지역은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었다.

 

[정진원의 수필, 인덕원사거리]

인덕원 사거리에서 청계 방면으로 진터를 지나 이미 마을을 옆에 두고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장골이었다. 50여 년 전 내 고향 마을은 마을이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너 채 집으로 된 작은 동네여서, 마을 끝 언덕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하얀 겨울 입김이 보였고, 이웃집들의 애기 우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등이 모두 들려서, 시쳇말로 프라이버시가 있을 것도 없고, 있어도 지켜질 수 없는 한 집안 같은 동네였다.

느티나무 가지 밑으로 나 있었던 집 너머 오솔길에서 사당골 개울까지와 아래 논가 동네 어귀 향나무에서 뒷동산 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까지가 산토끼 굴 같은 우리들의 둥지였다. 그 당시에 인덕원 사거리는 대처였다. 우리 마을에 없는 것들, 볼 수 없었던 것들이 거기에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인덕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으나, 옛날 원이 근처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 인마 왕래의 요지라는 점 등을 볼 때 틀림없이 원이 있었을 것이다. 원이란 조선시대 숙박시설로서 전국적으로 수백 군데에 있었다고 한다.

인덕원은 한양의 관문에 있었던 원으로서 수원 방면에서 온 사람들이 과천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유숙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한양 가는 사람이 과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인덕원부터 길 준비를 하고 눈치를 살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덕원 동편 청계산 자락에 원터라는 마을이 있다. 전에 원이 있었던 터라는 뜻의 지명일 것이다. 그곳은 판교(널다리)를 건너 하우고개를 넘어 인덕원 쪽으로 오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었을 것이다. 서울 부근 북동쪽에 퇴계원, 북서부에 홍제원, 남쪽 남산 아래 이태원 등지와 황해도의 사리원, 충청도의 조치원 등지는 모두 원과 관련 있는 지명들인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어릴 적 인덕원은 사거리였다. 북동쪽 구석에 막걸리 집 한 곳, 남동쪽에 가게 하나,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주막 하나, 북서쪽으로 이발소를 하는 살림집 하나가 사거리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안양장, 또는 가끔 군포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이 인덕원 사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벌말(평촌) 쪽에 있었던 주막은 양쪽 여닫이 판문이 달려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서서 반 발짝쯤 내려서면 봉당이었고, 그 한쪽으로 긴 다리 목로가 있고, 목로 위 천정에는 남폿불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막걸리 몇 사발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청계 쪽으로 있었던 가게는 잡화상이었다. 시골 가게치고는 규모가 있는 가게여서 웬만한 물건들은 다 있었다. 각종 사탕이 둥근 유리병에 담겨서 맨 앞에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말린 오징어 한 묶음이 매달려 흔들거리고, 막소주 댓병 궤짝은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담배는 상자째 방안에 놓고 팔았었다.

인덕원에서 동쪽길로 들어가면 지금은 판교, 성남, 분당, 경부고속도로로 나아갈 수 있지만, 당시는 덕장골, 논골, 상청계, 원터, 학현, 의일, 붓골, 능안 등지가 산골의 막다른 동네여서 더 이상 어디로 나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인덕원-판교간 도로가 개통된 지 오래 되었고,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개통되어서 한직골 상공이 고가도로로 얼기설기 볼썽사납게 되었다. 지금 서울외곽순환도로 청계요금소 근처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서, 거기서 더 올라가면 하우고개였다.

초여름 산나물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나 늦여름 칠월비 겨울땔감 풀을 베러가는 나무꾼들이나 들어갔던 산고개였다. 남쪽으로는 벌말, 민백이, 갈뫼, 멀리 범계(호계동) 근처를 지나 군포로 나가는 길이 있어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서쪽으로는 부림말 쪽으로 외나무다리가 놓여져 있었으며, 부림말을 지나 가운뎃말, 말무데미, 뺏말, 구리고개, 운곡, 수푸르지 등을 거쳐 안양에 갈 수 있었다. 그 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안양 동쪽의 한길(대로)이었다.

인덕원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길이 있기는 하였으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지금은 그 네 방향으로 대단히 넓은 길들이 만들어지고, 지하로는 지하철 4호선이 뚫고 지나가 인덕원은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렇게 큰 사거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상전벽해이다. 지금 인덕원 사거리는 정녕 대처이다. 엄청나게 큰 사거리가 되었다. 땅속으로는 지하철 4호선이 달리고 있다. 그곳에 인덕원역이 만들어졌다. 인덕원역에 내려서 서울구치소, 농업진흥공사 방면 ②번 출구로 나가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내 고향 마을에 갈 수 있다.

진터 앞을 지나고, 성고개 산모롱이를 돌면 바로 느티나무 고목이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벌모루이다. 벌모루 언덕배기에 서울구치소 정문이 있다. 그 윗동네가 내 고향 마을이다. 지금은 서울구치소 직원 아파트가 두 동 세워져 있다.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에 내릴 때면 나는 땅속에서 그 당시 인덕원 사거리 지상 달밤에 일어났었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는다. 그때 우리들은 집 떠난 강아지들처럼 길섶에 한 줄로 서서 사정거리를 경쟁하면서 깔깔대고 웃었었다. 거기가 바로 인덕원역 출구가 만들어진 그 푸서리였다.

지금 나는 그 길섶 아래를 정수리로 바치고 지하 인덕원역 의자에 잠시 앉아 타관행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