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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안양탐사대 138차 탐방(20180922)_안양4동과 중앙시장

안양똑딱이 2018. 9. 19. 20:16

 

안양탐사대 138차 여정_안양4동과 중앙시장 

9월 22일(토) 오후 4시/ 집결_안양4동 중앙사거리 롯데시네마 일번가점(전 안양CGV. 삼원극장) 앞


찌는듯한 폭염으로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고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가을을 맞아 안양기억찾기탐사대 탐사를 재개합니다.

2018년 후반기 첫 탐사로 오는 9월22일 오후 4시 출발하는 탐사는 누적 횟수로는 138차이기도 합니다. 

이날 탐사 여정은 추석을 앞두고 풍성한 제수용품이 울긋불긋 시선을 사로잡는 안양4동 중앙시장 골목골목을 돌아보고, 중앙시장을 들러싼 지역으로 안양 31개 동 중에서 가장 작지만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동네 안양4동을 돌아볼 계획입니다.

이곳에는 안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1954. 중앙성당), 오래된 중고서점으로 고서적의 책 냄새를 맡을수 있는 아단문고, 항아리골목, 곱창골목, 점집 등 다양한 직종과 형태의 업소와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어 도심속임에도 풍성한 볼거리도 제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양4동
안양4동의 행정구역 변화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果川君 下西面 墻內里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으며 1941년 안양면 안양리로 개칭되었고 1964년 안양읍 안양4리가 된후 1973년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안양시 안양4동이 되었다.
안양4동에는 과거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담안(澹安) , 장내동(墻內洞.澹安) 이라 불리웠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밤나무가 무성한 밤동산이었는데 지금의 벽산쇼핑 일대는 ‘좌백율원’이라는 대단위 율원이 조성되어 밤을 주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삼왕제지였던 삼덕제지 앞에 안양변전소가 설치된 후 삼길양상 등의 공장과 천주교 장내동 성당 등이 건립되면서부터 개화하기 시작했다.
장내동의 중심은 천주교수원교구 장내동성당(현 안양 중앙성당)과 중앙시장이라 할 수 있다.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24평을 구천우(具天祐)신부가 건축하고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져 시흥군 안양읍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자리했다. 1956년 5월4일 성당에서 안양최초의 유치원을 개설했으며, 그 후 건물의 노후화로 재건축을 실시하여 1991년 김영섭 건축가의 설계로 1998년 새로운 성당이 준공되면서 옛 고딕식 성당은 사라졌다.
성당 맞은편에는 근로자회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독일여성이 관장으로 임명되었고 근로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형편이 어려운 근로자에게는 숙박이나 식사를 제공했고 노숙자나 걸인, 홀로사시는 어르신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었다. 지금은 천주교 수원교구 사회복지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중앙시장은 1961년 1월 6일 안양1동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전 당시에는 중앙시장을 새시장, 시대동 시장을 구시장이라 불렀으며 벽산쇼핑이 문을 열면서 한때는 안양시민이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의 약 60%가 유통될 만큼 안양의 시장, 상가지역으로 자리를 굳혔다. 안양의 유일한 삼원극장은 얼마 후 폐쇄되었고 현 부림상호저축은행 이건선 회장이 CGV로 건축, 분양하여 상가가 형성되었다

 

안양 중앙시장

안양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안양4동에 자리한 중앙시장은 1961년 11월 6일 개설되었으며 만안구 안양4동 676-44/ 45 일대에 면적은 59,177㎡ 규모로 주변상가를 포함하면 식품류, 의류, 음식업 등 1,500여개의 점포가 자리하고 있지요.
안양에 처음 생긴 장은 안양시 안양1동 철길 너머에 조선시대 말에 안양장이 있었으며 일제감점기에는 안양시장이라 불리우며 씨름대회도 열리고 우시장과 대장간에 안양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곳일 정도로 그 세가 컸었는데 안양천의 잦은 범람으로 피해가 적지않자 1960년대 안양4동으로 옮기면서 구시장으로 명맥을 이어가다 1980년대 재개발로 인해 완전히 없어졌지요.
안양 중앙시장에 들어서면 왁자지껄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지요. 하지만,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면 텅빈 공간고 있고.. 허름만 쪽방도 있고, 상인회와 번영회로 나뉘어 보이지 않는 갈등도 있습니다. 하지만 40여년 국수를 직접 만드는 이도, 달인이란 칭호를 듣는 어묵집도, 김방 한줄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 기다리는 곳도, 4000원짜리 유명한 국수집도, 정말 싼 할아버지 야채집도, 50년이 넘는 기름 짜는 집도 있고 곱창골목에, 김밥골목에, 잔치음식골목에, 청바지골목에, 한복골목까지 ... 정말 없는게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저렴한 것들이 풍성한 시장입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지요.

 

항아리골목

안양 골목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며 아직도 정감있게 불리우는 골목이 여럿 있다. 밧데리골목. 변전소골목, 곱창골목, 한복골목 등등.. 1970년대 초반에 생긴 항아리골목도 그중 하나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활기를 띠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안양에도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며 인구도 늘어나고 당연히 생필품 가게가 줄지어 생겨나기 시작했다.1977년 중앙로가 개통되면서 안양4동의 새시장(현 중앙시장)은 인근 군포, 의왕, 과천은 물론 멀리 안산, 군자에서도 물건을 구입하러 오는 손님들로 항상 붐빌 정도로 호황이었다.
당시 그릇으로는 양은그릇과 함께 항아리 그릇들이 인기였는데 안양4동 중앙시장과 안양1동 남부시장 주변에는 항아리 가게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에는 철조망 담벼락을 따라 항아리들을 쌓아놓은 가게가 있었고 이에 이 골목을 자연스럽게 항아리골목이라 부르면서 통상적인 지명이 생길 정도였다.
과거 주택에는 뒷뜰, 뜨락, 앞마당, 우물가, 대문위 등에 장독대가 있었고, 장을 담아 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말 그대로 그집의 장 맛을 보여주었지만, 현대화의 물결속에 가볍고 간편한 플라스틱에 이어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항아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더구나 유약파동까지 겪게 되자 남부시장 주변에 있던 항아리 가게들이 하나 들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중앙시장 주변의 항아리 가게들도 줄줄이 문을 닫고는 성당 담벼락에 있던 신일항아리 단 한 곳만이 남아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신일항아리’는 안양5동 냉천로길(175-5)에 있다. 신일항아리 창업주는 신영철씨이다. 한동안 그의 둘째아들 신동윤씨가 가업을 이어 점방을 지키다 최근 공부에 매진하고자 부친이신 신영철씨가 다시 점방을 지키고 있다.신일항아리는 1990년대까지는 현 위치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장내동성당과 벽산아파트 사이 골목 담장 앞에 꽃집들과 있었다.
당시 장내동성당은 고딕양식의 성당이었는데 종탑이 위험해 지는 등 낡아 새로 신축에 들어가면서 시에서 도로를 새롭게 정비하자 현재의 장소로 옮긴 것이다.
신일항아리는 당초 있던 항아리골목에서 벗어나 주택가 골목길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군포나 의왕, 과천, 광명, 성남 등에서도 주문이 올 정도로 오랜 단골과 입소문으로 항아리하면 신일항아리를 찾는다.
안양중앙성당 뒷편 골목길로 점어들면 단독주택 앞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신일항아리 간판이 보이고 점포안에는 아기자기한 작은 항아리부터 화분, 컵, 장식품, 주전자 등 흙으로 빚은 그릇들이 진열돼 있고, 담벼락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유약을 반짝이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일항아리는 전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종류의 옹기가 다 모여 있다. 그 옹기들은 주로 충청도나 전라도에 있는 동기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들인데 그 곳의 흙이 옹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옹기는 물론, 약탕기, 떡시루, 콩나물시루, 옹기정수기 및 김칫독, 크고 작은 양념통들 그리고 요강까지.. 각종 항아리들이 있다. 또 옹기로 된 화분들도 즐비하다. 요즘에는 항아리 수요가 많지 않아서 옹기명장,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등 주로 장인들의 작품을 많이 가져온다고 한다.
한 집안의 장맛을 보면 음식 솜씨를 알고, 장맛은 장독에서 나온다고 해서 예전엔 집집마다 장독대를 두고 항아리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가 고이 모셨지요. 항아리는 숨쉬는 쳔연용기로 장뿐 아니라 쌀독, 김치독으로도 사용되고 뒷간이 먼 집에서는 안방에서 오강으로도 쓰여지며 이사갈때는 깨질까봐 애지중지하며 가장 귀하게 모시던 거였지요.
시대는 흘러가고 현대화속에 단독주택들이 아파트와 연립, 다세대로 바뀌며 뒷마당의 장독대도 사리졌지요. 아파트문화에 김치냉장고까지 생기고 단순 간편한 것을 추구하면서 장 담그는 것고 잊혀져 가고, 이제 장독대도 사라지고, 집집에서 큼지막한 항아리 보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발효에도 좋고, 저장 기능이 탁월하고, 내용물을 정화해 주는 숨쉬는 항아리의 효율성으로 아파트에 둘 수 있는 자그마한 응기와 신세대형 항아리를 찾는단다.
예전에는 큰 독이 많이 팔렸는데 주거환경의 변화에 따라 요즈음에는 아파트에 둘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고, 자그마한 옹기 소품. 즉 신세대형 항아리가 잘 팔리고, 쌀독 용도의 항아리도 많이 나간다고 한다.
골목길 한쪽에 크고 작은 항아리를 보는 것도 옛 문화를 더듬는 하나의 추억이지요. 옛날 잠자기전 방 한쪽에 곱게 자리했던 오강도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는데 요즈음은 어떤 용도로 쓰일려나 궁금하네요. 어느 글에서 보니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 가정에 갔더니 이주 예쁜(어떤 것은 난초, 국화 등 그림까지 그려 있으니까여) 요강단지가 식탁위 스프 단지로 요긴하게 쓰여지고 있더란 믿거나 말거나 야그도 있고요.
신일항아리(☎ 447-1048. 만안구 안양 5동 707-77)

 

음기와 양기가 모여 신기가 센곳, 점집 많은 동네 안양4동

/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불교의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유래된 ‘즐거움이 가득하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安養世界)’를 뜻한다. 이같은 지명 탓일까. 안양은 예로부터 기와 영성이 강한 도시라고들 했다.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 신과의 소통이 잘 되기 때문일까. 안양 만안구 수리산 계곡에는 치성을 드리는 장소가 많았고, 굿당도 서너곳 자리할 만큼 기가 세다고 소문나기도 했다.. 자연환경 복구차원에서 계곡과 산 깊숙이 있던 치성을 드렸던 장소들은 사라지고, 굿당도 이젠 두곳 밖에 남지 않았지만 현재도 안양 만안구 4.5.6동을 중심으로 8.9동까지 만안구 원도심의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무속인이 터를 잡고 있음을 알리는 빨간.하얀 깃발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 안양4동 골목과 안양5동 충혼탑 뒷편 언덕위에는 무속용품을 파는 대형 전문매장이 있을 정도다.
안양 수리산에서 안양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속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태민안과 시민 안녕을 기원하는 신명나는 굿판이 자난 28일 펼쳐졌다.
한국무속연합회 안양본부 한상윤 본부장 말에 의하면 안양에는 120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등록하지 않은 이들까지 합치면 2천여명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인구 밀도로 따지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무속인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토속신앙인 무속을 전통문화로서 시민들에게 전파하고, 유. 무형의 가치를 계승·발전시키고자 한다는 뜻으로 지난 2003년 부터 수리산 자락 병목안시민공원에서 국태민안과 시민안녕을 기원하는 무예술제를 해마다 열고 있다.
한상윤 본부장은 "무속인들이 사회에서 멸시, 천대를 받고있는 현실에서 신앙성과 예술성, 축제성을 지닌 무속문화를 일반인에게 제대로 알리고 무속인들의 규합을 통해 권익 신장을 찾고자 매년 수천만원의 경비를 갹출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예술제 사진첩 httpsa//www.facebook.com/coreachoi/mediabset?set=a.563820836995971.1073741859.100001041789694&type=3\:\:\:https\://www.facebook.com/coreachoi/media_set?set=a.563820836995971.1073741859.100001041789694&type=3

 

안양 중앙성당(옛 장내동성당)

안양 중앙성당(옛 장내동성당)은 서울교구가 1937년 밤나무밭 6,657평을 교회부지로 매입한 후 1954년 9월 7일 초대 주임신부인 구천우(具天祐)신부가 안양읍내에서는 처음으로 24평의 목조건물 성당을 지어 노기남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장내동성당' 설립 후 1956년 5월4일에는 안양 최초의 안양유치원이 개원했으며, 1958년에 명동성당과 같은 고딕형 성당을 세멘트와 목조로 신축해 1959년 봉헌식을 갖고 당시 안양지역사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의 노후화로 안전문제가 생기자 1991년 사진속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는 현대식 새 성당을 새로 지었다. 장내동 성당이 주변은 당시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이라 불렀다.

 

 

안양탐사대는 도시와 마을과 동네의 골목길에서 사라지고 변화되는 흔적들을 찾아 지난 2003년 2월부터 매주 토요일 마을과 동네 골목길을 걷는 마실을 해 왔습니다. 사진, 영상, 스케치, 이야기 등으로 도시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를 통해 또다른 프로젝트, 기획 등을 해보려는 도시.마을.골목연구, 건축, 사진, 걷기 등에 관심있는 시민은 탐사여정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탐사에 참여코자 하시는 분은 SNS 페이스북 안양기억찾기탐사대 ( www.facebook.com/groups/132023160294699/ )에 접속후 신청해 주시거나 전화주시기 바랍니다. 문의: 길잡이 최병렬(016-311-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