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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원태우의사 집터(안양1번가)에 표지판 설치된다

안양똑딱이 2018. 8. 14. 16:48

 

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히는 의거로 민간 항일 운동의 포문을 연 안양 출신 원태우 의사가 생전에 살았던 집터에 표지판이 설치된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14일 독립의 밑거름인 항일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항일유적 안내판 및 바닥 표지판을 도내 64개소에 설치한다고 밝혔다.

도는 지난해부터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알리기 사업’을 위해 문헌참조와 현장조사를 진행, 항일유적 목록화 작업을 완료했다.

중요도, 보존상태, 활용성, 접근성 등을 기준으로 설치대상 선정 작업을 위한 1차 전문가 평가를 실시했고, 선정된 설치대상 유적지에 대해서는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현지 정밀조사를 거쳤다. 이어 선정된 목록을 시군에 송부해 설치 우선순위, 안내판 위치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진행했다.

도는 최종 확정된 64개소(바닥표지판 병설 20개소 포함)에 대해 안내 문안을 마련해 전문가 감수, 국립국어원 최종 검토 등 세밀한 검증을 통해 최종안을 확정한다. 또 안내판 디자인, 토지 점용허가 등을 위해 9월 말까지 관련부서 협의를 완료한 후 10월부터는 현장 설치를 진행할 계획이다.

원태우(1882년~1950년)는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1동 642(당시 행정지번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4세가 되던 1905년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오후 6시15분께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항일운동에 불타던 원태우 의사는 당시 동네 청년들과 함께 현재의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일행중 한명이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원 의사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지자 유리창이 박살나며 여덟개의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군데에 박히는 자상을 입혔고 이토의 일행은 놀라서 상처를 응급처치하는 등 한 시간 이상 열차가 멈춰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원 의사는 어떻게 달리는 기차 그것도 열차안에 탄 이토를 향해 정확하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으며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로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이다. 또 고개를 깎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아시 장사라 불리우던 원 의사의 돌팔매질 실력과 천운을 더해서. 
이토에 대한 피격 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증시가 한때 일시 폭락하고 일본의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열도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사건 발생 이틀후에는 국내에도 알려지자 고종은 사좌서신을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면하고 경기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사건 직후 원태우 의사는 자리를 피했으나 안양역의 철도 노무자로 있던 야마사키의 제보에 의하여 일본 헌병들에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동료들은 거사를 결행 시 두려움으로 현장을 이탈하여 무혐의로 석방되고 단독으로 거사를 일으킨 원태우 의사만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민중 봉기 등으로 확대될까 하여 자신을 공격한 원태우 의사의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다.
이에 원 의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 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악의적인 고문으로 인하여 평생 고통에 시달렸으며 온몸에 흉칙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원태우 의사의 의거 결행 85주년이자 원 ㄹ의사 서거 40년만인 지난 199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우 의사의 기록은 대한매일신보와 김윤식의 <속음청사>,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뒤늦게 한 한국인에 의하여 일본에서 발견되어 원태우 의사의 의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태우 의사의 유품으로는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으며 나머지는 안양시청 별관 1층 민원실 앞 홀 한쪽에 있다가 2018년 초 안양박물관으로 옮겼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형물,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의거지 자리에는 안양시에 세운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정확한 위치는 관악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300미터 정도 올라오면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이다.
원태우 의사의 의거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맞선 최초의 공개적 저항 활동으로 역사적으로 대단히 값지고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안양에서 태어나 안양에서 의거를 일으켜 안양뿐 아니라 국내에서 항일운동의 시금석을 놓은 인물임에도 실상 그의 업적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원태우 의사의 흉상 이미지로 일본인 화가가 그린 그림을 밑그림 삼아 한복 도포에 갓을 쓴 모습을 하고 있으나 당시 24살의 청년이자 석공이었다는 점에서 맞지않을뿐 아니라 안양시, 인터넷 자료 등에 쓰여진 표기는 물론 관내 설치된 기념 표지석에 의사, 지사로 각각 다르게 표기되고 있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도가 진행한 실태조사 결과 용인·화성·평택·안성·이천시 등 도내 30여개 시·군에 1895년 을미 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이 산적해 있었지만 대부분의 항일유적지가 잊혀지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도는 내년에는 안내판 설치사업의 적극적인 활용을 위하여 보훈처, 교육청 등과 연계하여 항일유적지에 대한 답사프로그램 운영, 유적지 안내책자 발간 등 다양한 알림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