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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58]안양 석수1동 옛 미군부대 동네(2014.10.09)

안양똑딱이 2018. 8. 9. 18:15

 

[탐사58]석수1동 옛 미군부대 동네
2014.10.09/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석수1동/ 제58차 탐사로 찾아간 곳은 안양 석수1동의 석수대림아파트 단지와 석수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자리한 오래된 동네로 서쪽으로는 경부선 철길과 만안로, 동쪽으로는 경수산업도로, 남과 북쪽으로는 거대한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인 분지같은 곳입니다.
탐사 코스는 안양예술공원버스정류장(경수대로)-경수대로1201번길-경수대로207번길-파리바게트석수대림점-경수대로1201번길-경수대로1273번길-기와집-만안로연결육교(과거 땡땡땡건널목)-경수대로1273번길-삼막천연결부-경수대로1213번길-바람개비있는언덕위길- 경수대로1219번길-경남아너스빌아파트단지후문-경수대로-뒷풀이(안양예술공원초당순두부)


1970년대 이전에는 석수동 삼거리에서 안양예술공원앞을 통과해 비산동으로 가는 경수산업도로(현 경수대로)가 없던 시절이라 이 동네의 중심이었던 미군부대와 동네를 연결하는 통로는 1번국도(현 만안로)에서 경부선 철길 건널목을 건너야 했지요.
1960년대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는 고층의 석수대림아파트 단지로 바뀌었지만 미군부대 정문앞의 동네는 건물만 다소 변화가 있을뿐 좁디 좁다란 골목길속을 들어서면 기와를 얹은 옛 건물도 적지않게 남아 있고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도 만날 수 있네요.
이 동네는 6.25전쟁 이후 석수동에 미군부대(제83보급대대)가 생긴 이후 주민들이 늘어난 곳으로 1960년 말 무렵에는 미군을 상대로 하숙을 하는 집에 성병진료소도 있었고, HOTEL이라 간판을 내건 여인숙에 양복점, 고깃집 등 안양시내 못지않게 경제적으로 물자가 풍부했던 곳이기도 했지요.
당시 미군부대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인기 최고였답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초콜렛에 과자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간혹 성인잡지에서 뜯어낸 누드사진이라도 몰래 학교에 가져오는 날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호기심 어린 눈들로 인기 폭발이었지요.
미군부대 주변의 모습은 이미 '석수동사람들(Suck-su Dong village)'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1968년 3월 한국에 파병돼 이듬해인 1969년 4월까지 1년여 동안 이 부대 전령으로 용산 8군사령부와 오산미군기지 등을 오가는 우편물 수송을 담당했던 닐 미샬로프(2014년 현재 71세·Neil Mishalov)씨가 당시의 모습을 35㎜ 슬라이드 필름과 흑백필름에 담아낸 900여장의 사진들을 그의 홈페이지(www.mishalov.com)에 올렸는데 관심을 갖고 방문하는 수많은 네티즌들로 그의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미군사전문지 성조지가 보도할 정도였지요.
그는 당시 마을 풍경과 함께 노인,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 모심기, 물대기, 쟁이갈기 등 농사짓는 생활상뿐 아니라 안양지역의 주변 농촌과 미군부대 인근의 생활상, 안양 1번국도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모습, 여름철 물놀이를 즐겼던 안양유원지의 모습들을 담았습니다.
특히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1풀장에서의 물놀이 장면뿐 아니라 대형풀, 풍선장수, 아이스크림을 사려는 어린이들의 모습, 헬기를 타고 찍은 1968년도 당시의 안양 시가지의 전경과 도로, 건물의 모습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2003년 안양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안양시민축제에서 닐미샬로프 사진전을 통해 안양시민들에게 보여지면서 그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었는데 안양시로부터 초청을 45년만에 한국을 방문해 안양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고 그가 근무했던 석수동을 찾아 감회에 젖기도 했었지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에도 그는 국내 사진작가들의 도움으로 자신이 촬영했던 곳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비교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의 홈페이지에는 45년전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시공을 초월해 보여주고 있답니다.
이날 탐사길에 만난 한 할머니는 20살 무렵에 이 동네에 와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땡땡댕 건널목 얘기를 꺼내자 "어찌 그 때를 아느냐" 하시면서 옛 기억을 끄집어내 서울을 가려면 철길을 건너 30분마다 오는 수원과 영등포간을 시외버스를 타야 했고, 안양시내야 그냥 걸어다녔다는 얘기하며, 땡땡땡 건널목에서 기차에 치여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전해주시며 감회가 크신듯 말씀을 이어가시네요.

 

석수1동의 명칭 유래
석수동(石水洞)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싸인 안양유원지 일대에 석공(石工)이 많아 石手洞이라 하였으나, 1932년 개설된 수영장을 石水水泳場이라고 하면서 石手가 石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 석공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관악산 계곡의 큰바위와 맑고 깨끗한 물을 연상시키는 좋은 이름입니다.

 

지명유래전설
석수1동은 조선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였다가, 정조 19년 (1795년) 음력 윤2월 1일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5월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3월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라 했다가, 1963년 1월1일 법률 제175호에 따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로 되었다가, 다시 1964년 1월1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제2리.3리(新安養二里.三里)로 개편된 후, 1973년 7월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이 되었고, 1979년 4월 28일 시 조례 제340호에 따라 석수1동은 분동해 충훈부(忠勳府), 꽃챙이 등의 제 지역을 석수2동(石水2洞)이라 하였으며 1987년 1월1일 대통령령 제12007호에 따라 광명시 소하1동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1일 시 조례 제931호에 따라 만안출장소에 편제된 후, 1990년 1월1일 시 조례 제10008조에 의거 충훈부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分洞)해 석수2동에서 분리되었고, 이어 1992년 10월1일 내무부 승인 제892호에 따라 만안구로 편제되었다.

석수1동의 변천일람
고구려 장수왕 63년(475) : 잉벌노현(仍伐奴縣)
신라 경덕왕 34년(757) : 곡양현(穀壤縣)
고려 태조 23년(940) : 금주현(衿州縣)
조선 태종 13년(1413) : 금천현(衿川縣)
14년(1414) : 금양현(衿陽縣)
34년(1434) : 금천현(衿川縣)
정조 13년(1795)음(윤) 2.1 : 시흥현(始興縣)현내면(縣內面)안양리(安養里)
고종 32년(1895) 5.26 :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
1914. 3. 1 :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
1963. 1. 1 : 시흥군(始興郡)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
1964. 1. 1 : 시흥군(始興郡) 안양읍(安養邑) 신안양2리(新安養二里)
1973. 7. 1 :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
1979. 4. 28 : 안양시(安養市) 석수2동(石水二洞)
1987. 1. 1 : 대통령령 제12007호에 의거 광명시 소하1동 일부지역 편입
1989. 5. 1 : 만안출장소(萬安出張所)에 편제
1990. 1. 1 : 시 조례 1000호에 의거 충훈부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
1992. 10. 1 : 만안구(萬安區)에 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