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05/ #안양 #기억찾기탐사대 #골목 #동네 #석수동3동 #충훈벚꽃축제/ 안양기억찾기탐사대 43차 여정을 석수3동에서 시작. 충훈고-충훈부 안양천 뚝방길(충훈벚꽃축제)-충훈2교-와룡로3번길-석수로202번길-석수동주민센터-석수로212.216번길-시내버스9-3차고지-충훈고-안양예술공원(김중업박물관)-뒷풀이
안양 석수3동은 일제강점기에 밤의 명산지로, 1950년대에는 화훼와 고등채소로 키우던 곳이다. 1970년대 초 시흥군 안양읍 시절에는 이곳(현 럭키아파트 자리)에 안양공설운동장이 설치돼 군과 읍 행사 등 다양한 대규모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특히 1977년 안양 대홍수때는 이곳에 수백동의 천막이 설치돼 피난민들이 임시 수용돼 생활하기도 했다가 1986년 6월 30일 비산동에 새 운동장을 건립해 이전한다. 지역원로이신 변원신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그 이전인 1960년대 공설운동장 마련을 처음 논의하는 과정에서 안양9동 새마을지역을 후보지로 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양 석수3동에는 1970년대 말부터 단독주택들이 들어섰으나 1983년 도시계획에 따라 주공아파트를 비롯 아파트와 빌라, 연립주택등이 신축되었고, 석수주공2단지(07.02.08착공)과 석수주공3단지(07.07.26착공)에 대한 재건축이 완료됨에 따라, 석수아이파크아파트(2009.09.30준공),석수코오롱아파트(2010.02.12준공) 완공되어 현재 1,687세대가 입주해 있다.
안양 석수3동은 예로부터 충훈부(忠勳府)라 불리워 왔다. 충훈부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 공훈을 세운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공적을 보존하는 사무와 공신으로 책록할 때 해당자의 업적을 조사하거나 공신 책봉 후 그 후손들을 관리하는 업무도 맡는 등 현재의 국가보훈처와 유사한 업무를 처리하던 기관으로 현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충훈부라 불리우는 이유
충훈부는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 설치돼 공신도감(功臣都鑑 )으로 부르다 1434년에는 충훈사(忠勳司)로 개칭했으며, 1454년 세조(世祖)때 충훈부(忠勳府)로 개칭하여 승격시켜 공신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그렇다면 안양 석수3동이 충훈부로 불리우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당시 관청 충훈부는 공해전(公廨田: 국가 기관이나 궁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설정한 토지)이라 하여 직접 관장하는 토지가 있었는데 경기도내 사성리와 우두리, 광화대리(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 석수3동)일대에도 넓은 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훈부는 이 지역을 관리 운영했는데, 일반 농민에게 경작하게 하고 도지를 받았으며 마을이 형성되자 관청의 명칭을 취해 충훈부(忠勳府)로 호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훈부 현대아파트 옆 공원에는 커다란 충훈부 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지석은 당초 충훈1교 앞 옛주공아파트 입구에 있었는데, 주공아파트 단지가 재개발되면서 이전한 것으로 이 자리로 재개발전 충훈목욕탕 건물이 있었던 자리다.
아울러 안양시는 충훈2교 다리 둔치에 관람석을 갖춘 공연장을 조성하면서 관람석 하단에 충훈부 유래에 대한 설명을 돌 표석에 새겨 부착했다.
충훈벚꽃축제
충훈벚꽃축제는 지난 2003년부터 안양시가 예산을 지원하는 민간사업으로 석수3동 충훈2교 인근 둔치와 롤러스케이트장 등 안양천 제방을 중심으로 1.5km에 걸쳐 조성된 왕벚꽃나무가 매년 4월 초순이 되면 벚꽃을 만개해, 순백색으로 물들인다.
안양충훈벚꽃축제는 제6회 행사까지 격년으로 이틀간 열렸지만 제7회(2013년)부터 충훈벚꽃축제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규모가 커지면서 5일로 늘어났다.
그러나 2013년 행사의 경우 축제추진위원회 측이 행사판을 키우면서 업체를 끌어들여 천변에 허가 받지 않은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수십동의 천막과 야시장을 펼치는 등 불법 장터를 펼쳐 결국 축제의 본질이 놀자판, 먹자판으로 변질되며 비난이 빗발치자 시가 뒤늦게 고발조치에 나섰으나 뒤늦은 대처와 사전에 차단하지 못해 물의를 빚었다.
더욱이 추진위는 축제를 불법 장터로 전락시킨 것도 모자라 행사장을 지나는 자전거도로를 전면 통제한다는 안내판까지 설치했다. 안양천 자전거도로는 안양시를 넘어 수도권 주민이 이용하는 공용도로나 다름없어 이용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는 2014년 행사에 있어서도 비슷한 형국으로 하천 둔치에 수십동의 천막이 설치되는 등 안양시가 장터를 허용하고 나서 빈축을 사고 있다.
충훈벚꽃축제는 안양시가 수천만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행정력도 동원하는 등 사실상 시 행사나 다름 없다는 사실에서 안양시 행정이 거꾸로 가는 있는 형국이다.
안양 석수3동의 행정 변화
조선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였다가, 정조 19년(1795) 음력 윤 2월 1일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5월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3월1일 부령 제 111호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라 했다가, 1963년 1월1일 법률 제1175호에 따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로 되었다가, 다시 1964년 1월1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제3리(新安養3리)로 개편된 후, 1973년 7월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이 되었고, 1979년 4월 28일 시 조례 제340호에 따라 석수1동은 분동해 충훈부(忠勳府), 화창동(花倉洞) 등의 제 지역을 석수2동(石水二洞)이라 하였으며, 1987년 1월1일 대통령령 제 12007호에 따라 광명시 소하1동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그 후 1989년 5월 1일 시 조례 제 931호에 따라 만안출장소에 편제된 후, 1990년 1월1일 시 조례 제1000호에 의거 충훈부지역을 석수3동으로 분동(分洞)해 석수2동에서 분리되었고, 이어 1992년 10월 1일 만안구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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