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탐사대가 2013년 11월 30일에 이어 12월 7일 두번째로 찾아간 34차 여정은 안양 박달1동과 안양3동의 대농단지라 불리우는 곳으로 지금은 안양1번가와 연계하는 상업지역이자 주거지역으로 다양한 형태의 주거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군복용 광목을 생산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되고 조선견직이 들어섰던 대규모 공장이었지요. 이 곳에는 1938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화신백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이 해방을 앞둔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 규모의 초대형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설립과정은 박흥식에 대한 반민특위 공소장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만주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징용자들이 차출되었다고 합니다.
1945년 5월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 중에 있었고 평촌 달안동에는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등 비행기 양산체제 제조계획은 거의 완성단계로 만약 전쟁이 계속됐다면 아마도 안양은 일제의 전투기지가 됐을 것입니다.
해방이후 이 부지는 1948년 10월 5일 안양1동에 금성방직을 설립한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성곤 씨가 인수해 1949년 3월 10일 섬유 공장을 준공합니다.
1960년대 사진을 보면 안양역에서 금성방직 안양공장안까지 철길이 있어 화물열차가 들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으며, 담장 둘레만 십리라고들 했습니다.
또 공장안에는 천연 잔디가 깔린 축구장까지 있었지요. 1960년대 당시에는 잔디구장이 전국에 3개 밖에 없었는데 한국 국가대표팀이던 양지선수단을 비롯 공군사관학교 축구부, 실업팀 등이 이곳에 와서 연습경기를 했답니다. 당시 만안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시멘트블록 담장 중간 중간에 난 구멍으로 이회택 등 국가대표선수의 볼 차는 모습을 보며 축구의 열정을 불태운 덕에 안양중,안양공고가 전국 축구를 재패하던 것도 이 무렵이고 이는 축구하면 안양을 떠올리던 부흥기였지요.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금성방직이 전소되자 김성곤은 UNKRA원조자금을 확보하고 이를 이용하여 금성방직 공장 재건에 나섬으로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성곤은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도 인수하여 공장 확대에 나서는데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이 인수하지요.
금성방직과 태평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당시 3천여명의 여성근로자들이 근무해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아닐가 싶습니다.
금성방직은 1967년 10월 안양 1동에 자리한 태평방직(현 레미안 아파트)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택지개발을 통해 1977년 일반에 640여개의 단독필지로 분양된 안양 최초의 대규모 주택단지로 대농단지로 불리워 오고 있는데 농사를 짓던 평촌벌이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까지 안양에서 주택가격이 가장 비쌌던 주택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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