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기록 #기억 #역사 #만안구 #원도심 #동네 #골목 #안양1동 #안양일번가 #화진정 #유래정 #삼성집 #1970년/ 사진은 1970년대 초 안양읍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안양역앞 안양1동(현 안양일번가 안양로 304번길) 골목길의 풍경이다.
사진을 찍은 위치는 장내로 149번길의 현 식당-두끼(2층), 명랑핫도그가 있는 교차로에서 중앙시장쪽을 항한 곳으로 세게과자할인점, 식당-두끼(2층)찍은 것으로 사진속 뒷쪽 왼쪽에는 화진정, 오른쪽에는 유래정과 삼성집, 그 뒤로는 신영순의원 간판탑이 우뚝 서 있다.
화진정은 갈빗집으로 유명했다. 화진정 식당 출입문 왼쪽으로 유리로 둘러싸인 갈비를 굽는 곳이 있었는데 그 고소함은 골목으로 진동했다. 초창기에는 수원의 유명한 갈빗집 주방장을 거액을 주고 스카웃 해왔다나 어쩟다나 아무튼 70년대에는 수원의 화춘옥 못지 않다는 명성을 전국에 날리기도 했다. 아무튼 나무쟁반에 담은 1인용 무쇠접시에 왕갈비란 메뉴로 담아냈는데 달착함과 불맛이 어우러져 인기로 회갑, 상견례, 생신 축하 등 집안에 잔치가 있을때나 가보던 고이었다. 화진정은 90년 이후 석수동 안양대교 건너 오른쪽에 넓은 땅을 매입해 이전했는데 예전 같은 명성은 없어 세월의 뒤안길로 숨어버린 곳이지만 그래도 안양 원로들이 종종 들려 모임들을 갖는 것으로 안다.
화진정에는 안양시민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이집 설립자가 1923년생인 윤금분 할머니인데 1995년 재단법인 회진윤금분장학회를 설립하고 유언으로 화진가든을 재단에 기증한 것. 식당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20년 넘게 장학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난 2015년부터는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의 커뮤니티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었다.
유래정은 갈비와 우거지가 들어간 해장국으로 유명했다. 1970년대에는 통금(밤 12시부터 새벽4시까지 거리에 못 나감)이 있었는데 실내에서의 영업은 할 수 있어 술집과 다방 등이 새벽까지 호황이었다. 특히 나이트클럽은 제법 가격이 비싸지만 밤새도록 춤을 출 수 있어 인기였는데 새벽이면 고고춤을 추며 밤을 새고 나온 이들이 유래정으로 몰려들어 따끈한 해장국 한그릇을 먹고는 곧바로 직장으로 출근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사진을 찍은 곳 오른쪽 골목은 안양역 광장으로 가는 길로 사진속 화원옆으로 새마을 식당, 중국집(현 스타박스, 만리장성 건물)이 있었고 그 앞으로는 선산집, 오부자집(현재 1층 던킹도너츠 건물)이 있었고 광장앞으로는 60-70년대 안양 최고의 빵집으로 여름철 아이스케끼와 하드가 맛있고 학생들의 데이트장소였던 태극당이 있었다.
당시 안양역과 구시장과 구도로(1번국도) 변에는 동춘관, 순영관, 춘방각,영화관 순흥루 등 중국인(화교)이 직접 경영하던 중국집이 제법 있었다. 순영관(현 1번가 롯데리아 앞)이던가? 이 집 화교 할머니의 아주 작은 발이 지금도 기억난다. 전족이라고... 중국에서는 옛날에 발이 작은 여자가 미인이라는 전통으로 어린 소녀나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묶어 성장하지 못하게 10세기에서 20세기까지 1천년 가까이 유지해 왔다고 하는데 이 집 할머니 발이 전족으로 뒤뚱뒤뚱 걷던 모습이 어렴풋하다.
안양역앞 골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번화가였다. 현 신한은행앞 중앙통 골목(안양로 292번길) 양쪽으로는 안양읍사무소, 시흥군청, 안양경찰서, 의용소방대 등 관공서와 제화점, 양복점 등이 많았다.
당시 안양역전에는 다방들도 참 많았다. 역 광장의 폭포수다방에 시외버스를 타려는 사람들과 캬바레 손님들이 많았다면 태극당 옆 지하의 아네모네 다방은 이름 만큼이나 추억들을 많이 남겼고, 숭죽다방은 소장사꾼들이 모이는 집결지 였다고 하고. 역전다방은 안양역에서 만남을 갖는 이들이 많이 찾았다.
그 때 다방에서는 쌍화차가 제일 비싸게 팔렸고 아침에 마시는모닝 커피에는 어김없이 날계란을 넣어 줬는데 저녁에는 '티'라고 하면서 양주를 한 잔씩 넣어 팔기도 했다.
술집과 음식점들도 즐비했다. 태극당과 동춘관 사이 골목길네는 술꾼들이 많이 드나들던 본전집, 12시집, 서울식당, 성호집, 대성집 등 주막 형태의 선술집이 많았다.
현재 안양 1번가의 2층 짜리 건물들은 60-70년대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으로 4-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골조는 그대로 둔채 리모델링을 통해 내부와 외부 모습만 바뀌어 손님을 맞고 있다.신영순병원은 1970-90년대 안양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산부인과였다. 당시 안양.군포.의왕.과천은 물론 멀리 안산 등에서도 아이를 낳으려면 신영순병원을 찾았다. 또한 당시 조산원 자격을 따려면 정부가 지정한 병원에서 일정기간 실습을 해야하는데 신영순병원이 전국에 몇개 안되는 자격 부여 병원중 한곳이었다.
1992년 5월6일자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신영순병원은 9일 오후 2시부터 안양문화회관에서 `어린이 잔치'를 베푼다. 자신이 원장으로 있는 신영순병원 개원 27주년 기념으로 여는 이 행사에는 어린이 1천5백명과 부모 5백명이 참가한다.사회는 뽀식이 이용식이 맡는다."고 언론에 보도될 만큼 관심을 받았던 곳이다.
신영순 원장은 전남 장성이 고향으로 1961년 고려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 이어 1970년대 안양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해 자수성가했는데 1988년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출마해 제13대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1993년에는 제17대 한국여자의사회장에 취임하는 등 정계 비중이 커지면서 병원은 쇠퇴의 조짐을 보인다
신 원장은 1996년 안양8동 성결대입구 왼쪽에 설계디자인이 멋진 병원을 신축해 이전한후 `신병원'으로 이전개원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가지만 결국 매각된다.
신 병원을 매입한 곳은 샘병원을 운영하는 효산의료재단으로 재단은 이 병원을 산부인과 전용의 샘여성병원으로 운영하다가 샘여성병원을 안양5동 옛 등기소 건물 옆으로 이전한 후 2016년 리모델링을 통해 2017년 현재 샘병원 간호사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안양을 떠난 신 원장은 지난 2009년 9월 전남 마량 버스터미널 건물 내에 우리의원을 개원하고 한동안 주민들을 진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앙동(中央洞)
북부동과 시대동(또는 남부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시가지 중앙에 있는 마을이므로 중앙동이라 칭하며, 이 마을을 기점으로 남쪽에 있는 마을이 남부동(南部洞), 북쪽에 있는 마을이 북부동(北部洞)이다.
중앙동이 오늘날처럼 안양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되기는 조선조 제 22 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에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화산능행의 노정(露程)을 과천-인덕원-수원에서 시흥(현 구로구 시흥 동)-안양-수원의 노정으로 바꾸면서 유래정 뒤(안양1동 674-67)에 안양행궁(安養行官)을 짓자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1905년 1월1일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안양역(安養驛)이 건설되자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되어 1917년 7월에 호계 2동에 있던 서이면사무소가 안양1동사무소 옆으로(안양1동 674-271) 이전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양금융조합과 안양연초조합 등이 속속 이 곳에 세워졌고, 광복후에는 시흥군청을 비롯하여 안양경찰서, 안양읍사무소등 공공기관이 들어서자 관가의 거리로 되었다가, 이들 기관이 1970년 대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뉴코리아호텔, 안양백화점, 그 밖에 상점과 유흥음식점이 붐벼 안양의 1번가로 자리를 굳혔다.
'타임머신 > 옛사진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60년대 안양 석수동에 자리했던 신필름 전경 (2) | 2018.04.11 |
---|---|
1970년대 중반의 안양역과 역전 풍경 (2) | 2018.02.26 |
1970년대 초 안양8동 명학바위에서 본 명학마을 (2) | 2017.11.05 |
1972년 안양읍과 시흥군 남면 경계 표지판 (0) | 2017.10.29 |
1968년 안양 시대동과 태평방직 주변 (0) | 2017.10.24 |
1960년대 안양3동 율목마을과 수암천 풍경 (0) | 2017.09.06 |
1959년 유유산업 안양공장 준공식 (0) | 2017.09.04 |
1960년대 말 안양역앞 골목길(현 일번가) (0) | 2017.09.02 |
1970년대 안양1번가에 있던 안양경찰서와 역사 (0) | 2017.08.30 |
1960년대 안양 구시장 가는길 땡땡땡 철길 건널목 (1) | 2017.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