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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 삼막마을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2. 12:39

안양 삼막마을 이야기
 
삼막골(三幕洞)
 
밀양박씨, 진주하씨, 청송심씨 등의 누대 세거지로, 진주 하씨의 집성촌 이라 하여 보통 하씨촌(河氏村) 으로 불리워오고 있다. 이 마을에 진주 하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기는 진주하씨 문효공파(文孝公派 세종때 영의정을 역임한 河演을 말함) 후손인 하우청(河禑淸1561-1622 호는 낙선재이며 의금부도사를 역임)의 묘를 이곳 뒷산에 쓴 후에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하면서 부터이다. 삼막골 (三幕洞)이란 마을 명칭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윤필거사(尹弼居士)의 세 성인이 삼성산에서 수도하며 유유산업 부근에 제1막을 짓고, 기아의 집(구 안양관광호텔)뒤 수도사(修道寺석수1동 241-40)부근에 제2막을 짓고, 제 3막은 석수1동 산10-1에 지어 이를 삼막사(三幕寺)라 칭했는데, 그 후 그 아래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사찰명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상의 세 성인이 이 마을에 처음 살아 각자 1막씩을 짓고 살았다 하여 삼막골(三幕洞)로 칭했다는 것이나, 옛 읍지나 지리지 등에 는 고려말엽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공(?-1363), 나옹 (1320-1376), 무학 (1327-1405)이 삼성산에서 수도했다는 연유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나 어느 설이 옳은 지는 알 수가 없다. 안양소년원과 구룡마을 사이에 위치 한 삼막골은 삼막천을 경계로 동쪽지역(안양소년원방향)을 웃말, 서쪽지역을 성재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이 마을은 구한말(1898-1904) 지방관리들의 탐학과 한국의 주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박탈되어 가자 분연히 일어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하영홍이 태어난 곳이며, 1901년에는 하영흥이 선교활동을 할 만큼 일찌기 기독교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또 마을 어귀에는 하우청의 묘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성재이에 있는 느티나무(마을에서는 아래 서낭할아버지로 통칭)와 웃말에 있는 향나무(웃말 서낭할머니로 통칭)앞에서 나무제를 지낸다.
 
 
안양 삼막골 쌍산신제
 
당제 또는 당고사라고 불리는 마을제(洞祭)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명맥을 이어온 우리고을의 민속 제사문화로서 역사성과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의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안양시 관내 마을제(洞祭) 제례의식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제한적이나마 지역의 향토 문화유산으로서 명맥을 이어가며 전승되고 있다.안양 삼막골 쌍산신제(일명 느타나무제)는 안양시 석수동 관악역에서 경인교대와 삼막사를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삼막골에서 500여년부터 내려온 마을제로 약 40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남녀노소 약 100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격식도 간소화되고 토박이 어르신들도 돌아가시면서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현지 통장(석수1동 1통, 2통)이 주관하며, 제를 올리는 데 수목에는 통북어를 올려 제물로 받치고, 제단의 제물로는 소머리와 팥시루떡, 막걸리, 삼색과일과 산자 등을 사용한다. 제사는 삼헌(초헌, 아헌, 종헌), 독축(축문낭독), 소지(燒紙), 음복(飮福) 순으로 전통방식에 따라 경건하게 진행됐다.삼막골 쌍산신제는 매년 음력 7월과 10월 초하루 년 2회 제를 올리는데 과거부터 지역의 소중한 식수원인 우물에서 우물 고사를 먼저 지낸 후, 마을의 수호신이라고 여기는 수호목이 있는 2개의 장소에서 같은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특징이다. 먼저 제를 올리는 수호목인 할아버지 느티나무(통칭 서낭할아버지)는 석수1동 689번지 도로변의 마을회관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어 제를 올리는 수호목인 항나무(통칭 서낭할머니)는 느티나무에서 경인교대(삼막사방면) 방향으로 약 100미터 위 지점에 있다.도시화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삼막골 쌍산신제’가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 전승되기 까지는 어려움이 적지않았다. 삼막골에서는 개발행위로 한때 사유지에 있던 우물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이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우물에 맨홀덮개를 덮어 살려내는 등 마주민들의 참여와 노력이 켰다. 또 안양문화원에서도 마을제의 원형이 유지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원을 계속해 왔다. 또 안양시 협조도 적지 않았다. 77년 안양 대홍수 때 뿌리째 뽑혀서 그간 개인 사유지에 임시로 심어져 있던 할머니나무(향나무)를 2010년 10월 16일 인근 하천부지로 이식하여 제단마련과 함께 조경과 벤치 등을 갖춘 소공원으로 조성하는 등 석수1동주민센터와 당시 동장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평가다.한편 현재 안양시 관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마을제는 7곳으로 주로 음력 7월과 10월 초순에 제를 지낸다. 덕현정제(음력 7월2일), 삼막골쌍신제(음력7월1일, 10월1일/년2회), 매봉산산신제(음력10월2일), 수촌마을도당제(음력10월2일), 할아버지산대동산신제(음력10월3일), 할머니산대동산신제(음력10월3일), 현감이태응영세불망비제례(매년 음력10월 상달)글/ 우리고을 마을제전승의 가치와 인식의 재발견오늘날 공동체의식의 약화와 주민참여 및 인식부족 등의 사유로 수백년 간 우리안양에서 지켜온 선조들이 남겨준 귀중한 향토문화유산인 고유 마을제가 무관심과 방치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실정이다.주민 참여도가 예전 같지 않고, 참석자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어 떡과 고기 등 제물을 산속의 산신제단까지 운반하는데도 여간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안양의 마을민속제사는 세대를 대물림하며 누대에 걸쳐 마을단위로 우리고장에 전승되어온 토속 민간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산(또는 산신령), 우물, 비석, 나무 등을 신격화 대상으로 하고 있다.나름대로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온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여기거나 ‘샤머니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축원하는 마을제(洞祭)를 특정 종교의식 행사, 미신이라고 폄하하기보다는 마을의 화합과 결속 등을 꽤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새로이 인식을 전환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마을대동제는 제례행사 재현을 통해 마을의 안녕과 평화 등을 마을단위로 기원하고, 동시에 전통문화행사 계승 및 주민들의 정서함양을 기하고 향토애를 고취시킬 수 있다.디지털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적인 취향이 지배적으로 강하고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은 상대적으로 결핍된 증세를 보이고 있다. 마을제행사 개최는 도시화물결 속에 사라져가는 주민들의 공동체의식 및 일체감(소속감)강화하고 애향심을 고취하는 등 순기능적인 측면이 많이 있다. 또한 민원이나 주민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지역민 상호간의 화합과 연대의식 및 유대감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역사성과 전통이 있는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따라서 현행 마을제가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대책을 수립하고, 필요시 역사성과 지역의 정체성을 간직한 자취를 감춘 일부 우수마을제를 발굴하여 복원하는 등 적극적인 후속조치가 필요하다. 고유의 마을제가 지방 향토문화의 창달과 지역민의 정서함양과 대동화합을 기하는 전통 문화유산으로서 연구되고 계승될 수 있도록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그러나 안양지역에서 수백년간 맥을 이어 전승되어온 우리고을의 마을제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 사라졌고 일부만 명맥을 이어오는 점 매우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마을제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마을제보존회(대동회)별로 정관을 다듬고 재정비하여 조직력을 강화하고, 사회단체로서 자생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동단위 주민자치위원 등 덕망 있는 지역인사 및 마을주민들의 참여와 협조, 특히 청소년, 학생 등 젊은 층의 참여와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하는 마을단위의 전통문화 축제로 자리매김 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또한 안양시, 해당구청, 동주민센터, 지방문화원 등 관련기관 소관부처의 적극적 홍보 및 행∙재정적지원과 함께 문화단체 및 지역사회단체 등과 연대한 범(凡)시민적 행사추진이 필요하다. 안양시사회단체보조금을 심의하는 심의위원은 지역의 정체성을 담아 전승되어온 마을제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점 등 제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마을제 예산심의 시 지역의 전통문화 육성차원에서 마인드를 갖고 심의해 주길 바라며, 해마다 관련예산이 줄어 마을단위 제례행사를 치루는 데 어려움이 상존하지 않도록 적극적 지원책이 필요하다. 마을단위 지역의 향토문화 유산인 마을제의 자체 전승이 어려울 때를 대비 안양시관계 소관부처나 문화관련 기관 등에서 제례행사를 동영상 촬영녹화 등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방안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더 많은 지역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유도하고 지역축제로서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는 등 정책적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선조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인 마을제의 전통을 지키고 후대에 전승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며 우리들의 몫이다.2012 가을의 끝자락 우리고을 마을제인 ‘석수동 쌍산신제’ 등 안양전통문화의 향기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마을제가 전통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장(場)이 되며, 마을단위의 축제로 승화되어 문화관광자원으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당히 엿볼 수 있었다. 안양시 곳곳에서 열린 민속 마을제사가 사라질 위기 속에서 지역민 모두가 함께하는 마을단위의 특색 있는 지역축제로 거듭나 안양향토문화가 창달될 수 있도록 주민, 문화단체, 사회단체, 관계당국 등의 관심이 필요하다. 도시화의 물결 속에 점차 사라져 잊혀져가는 마을제의 싹을 틔워 원형을 살리고 전통의 맥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고유 전통문화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조성현: 안양시문화관광해설사/josh1965@hanmail.net)
 
경인교대 경기캠퍼스에 읽힌 이야기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는 경기도로부터 안양시 석수동에 위치한 삼성산 자락의 석산부지6만5천여평(21만9천566㎡)와 시설비 899억원을 지원받아 2003년 12월 착공한 지 2년여만인 2005년 3월1일 개교했으며 전체 학생수는 2천여명에 달한다. 경기도가 학교 부지와 시설비까지 지원하고 나선 이유는 경기도에 교육대학이 없으나 법률상 수도권에 대학교 설립이 불가능하자 경인교대 캠퍼스 유치에 나선 것으로 도는 2001년 '경기교육대학 설립 1천만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의 노력 끝에 2003년 경기도가 대학 설립예산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경기캠퍼스 설립을 승인받았다.
경기캠퍼스 건축연면적은 51,735㎡(15,650평)로 2003년 12월23일 착공식을 가졌으며 주요시설로는 지상6층 규모의 2개동 종합강의관(6,880평)과 지상3층의 음악관(794평)을 비롯 학생복지센터(1,759평. 지상5층), 기숙사(1,918평. 지상9층), 체육관(1,398평 지상3층), 대학본부(1,337평. 지상 3층), 도서관(1,483평) 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도가 도유지를 경인교대 경기캠퍼스로 제공한 것과 관련 지난 2005년 정부합동 감사에서 '국립대학 설립에 지방재정을 부담한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을 받은데 이어 행정안전부로부터도 경기캠퍼스 부지 및 건물의 소유권을 학교 운영주체인 국가(교과부)로 매각하도록 하는 내용의 권고를 받았다.
이에 경기도와 교육과학기술부는 2012년 6월 19일 안양시 관내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부지 및 건물과 수원의 서울대 옛 농생대 터를 교환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12만2천812㎡와 건물 4만9천186㎡는 정부 소유로 바뀌었다.경인교대 경기캠퍼스 터와 건물은 1천700억원 상당, 서울대 농생대 부지 및 건물은 1천600억원 상당, 남한산성도립공원내 부지는 100억원 상당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 학교는 1970~80년대 집짓는데 쓰이는 자갈이 부족하다 해서 1979년 7월14일부터 1999년 6월30일까지 20년 동안 7천만톤을 골재를 캐낸 자리로 그 면적은 43만2천555.4㎡에 달한다. 지금도 삼막마을 끝자락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6-8번지 경인교대 교정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의 한쪽 거대한 단면을 마치 두부 자르듯 짤린 절단면을 볼 수 있다.
문제는 2004년 대학 신축공사가 본격화하면서 삼막천으로 유입되는 배수구에서 거품을 내는 흰색물이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이 물의 정체가 수질기준 10배를 초과한 카드뮴 등 다량의 중금속이 함유된 광폐수(鑛廢水)로 삼막천은 죽음의 하천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염된 골재를 자재로 사용되면서 기준치를 10배 이상 초과한 카드뮴 등 다량의 중금속이 포함된 침출수가 인근 삼막천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오염원 제거라는 원칙에 소홀히 한 것이 화근이라 할 수 있다.
주민들은 "골재를 캐낼 당시 석산부지에서는 하루에 많게는 200~300박스의 폭약을 터뜨렸다"면서 "석산부지에서 흘러나오는 흰색물의 정체는 채석장 발파용으로 사용했던 화약가루"라 주장하고 배출수에 화약가루 성분이 함유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경기도건설본부가 명지대 산학협력단에 용역을 의뢰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배출수는 수질환경보전법 기준치보다 알루미늄 30배, 카드뮴 10배, 망간 7배, 납이 3배 초과했으며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인근 토양은 기준치보다 알루미늄 1659배, 망간 1723배, 납 104배 등이 초과한 것으로 분석돼 다량의 중금속이 포함된 유출수가 장기간 안양천으로 유입된 것으로 예측되며 중금속 오염 심각성은 상상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석산부지에 학교가 들어선 이후 중금속 오염 물질이 삼막천으로 유입되자 경기도는 2009년 22억원을 들여 경인교대 내에 1일 300t 규모의 수질정화시설을 설치했으나 이후에도 석회 성분 등이 포함된 지하수가 삼막천으로 유입돼 아연은 기준치의 3배, 망간은 4배, 알루미늄은 10배를 초과하며 삼막천으로 중금속 오염물질이 계속 유입돼 개선되지 않자 주민들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수질개선사업을 벌인 결과가 무용지물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수질정화시설이 설치된 이후인 2011년 11월 한국화학시험연구원이 경인교대 석산부지에서 유출된 지하수 수질을 분석한 결과, 아연 14.3㎎/ℓ, 망간 37.9㎎/ℓ, 알루미늄 12.3㎎/ℓ에 달해 수질기준(각 0.3, 3, 0.2㎎/ℓ)을 크게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도 경인교대 아래쪽 삼막천을 보면 백색침전물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인교대를 지나 삼막사 올라가는 길 우측의 삼막천 계곡에서는 백색침전물이 발견되지 않아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물놀이를 하러 오고 있다.  삼막천의 오염도는 학교정문앞 사거리 좌측(안양터널 공사장)의 표지판에 기록돼 있다.
한편 천년고찰 삼막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삼막마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삼성산의 빼어난 경관 아래 삼막천에는 물 맑고 가재가 지천으로 아는 이들만이 물놀이 하러 올 정도 한적했던 곳이었으나 변해도 너무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곳 주민들은 70년대 말부터 20년 동안 삼성산에서 돌을 캐내느라 남포소리에 소음과 분진 등으로 고통을 받더니 2002년부터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조성공사가 시작되고, 2003년에는 삼성산을 터널로 관통해 서울 신림 - 안양 삼막골석산부지 산업도로간 지방도로 개설로 도로가 크게 확장되면서 마을은 개발의 바람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삼막IC와 연결되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마을뒤로 놓여지면서 마을은 도로에 둘러쌓인 섬으로 전락하면서 과거 주거지는 개발붐과 맞물려 하나둘 외지인에게 매각되면서 지금은 도로를 따라 각종 음식점과 카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산자락밑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과거 원주민들이 살던 집들은 이제 찾아보기기 쉽지 않다.
더욱이 2017년 완공을 목표로 안양-성남간 제2경인고속도로 연결을 위해 안양 관양동 동편마을(관양지구) 뒷쪽으로 관악산의 허리를 관통하는 제1공구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안양-성남 고속도로는 안양시 석두동(석수IC)~성남시 여수동(성남~장호원 연결) 구간 21.8km를 4~6차로로 있는 도로로 총사업비 7967억원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롯데건설 등 11개 민간사업자가 출자한 제이경인연결고속도로가 30년간 운영하게 된다. 이 도로 건설 계획을 보면 삼막IC주변에 교통광장을 만든다. 따라서 조용하고 한적했던 삼막마을은 자동차 소음과 매연으로 뒤덮일 것으로 보인다.
 
 
삼막마을 인근 볼거리
 
원태우 지사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멩이 던진 장소
대한민국 사람 중에 1909년 중국 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기차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1905년 11월 22일 경기 안양에서 열차를 타고 가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짱돌을 기막히게 날려 부상을 입힌 안양 출신의 원태우 지사와 민간 항일 운동의 효시라 할수 있는 거사의 현장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들이 많다.
1905년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비운의 해이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7일 조약 체결을 한 후 5일후인 22일 일본측 조약담당자였던 하야시 곤스케 공사를 대동하고 수원에서 사냥을 한 후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오후 6시15분께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항일운동에 불타던 한 열혈 청년이 알게됐다. 그는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1동 642에서 태어나 당시 23세이던 원태우 지사로 그는 당시 동네 청년들과 함께 현재의 관악 전철역에서 서울방면으로 약 400m지점인 안양육교 아래 철로변에 돌을 깔고 열차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두려움에 떨던 일행중 한명이 돌을 치우자 곧 이어 열차가 나타났는데, 원 지사는 혼자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자리를 향해 사방세치 크기의 돌맹이 수개를 던지자 유리창이 박살나며 여덟개의 파편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 여덟군데에 박히는 자상을 입혔고 이토의 일행은 놀라서 상처를 응급처치하는 등 한 시간 이상 열차가 멈춰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원 지사는 어떻게 달리는 기차 그것도 열차안에 찬 이토를 향해 정확하게 돌멩이를 던질 수 있었을까?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으며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열차는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로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이다. 또 고개를 깍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 아시 장사라 불리우던 원 지사의 돌팔매질 실력과 천운을 더해서. 
이토에 대한 피격 사건이 전보를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의 증시가 한때 일시 폭락하고 일본의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열도를 한바탕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 또 사건 발생 이틀후에는 국내에도 알려지자 고종은 사좌서신을 보내고 사건 책임을 물어 시흥군수를 파면하고 경기 관찰사를 견책 처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 이후 전국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사건 직후 원태우 지사는 자리를 피하였으나 안양역의 철도 노무자로 있던 야마사키의 제보에 의하여 일본 헌병들에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동료들은 거사를 결행 시 두려움으로 현장을 이탈하여 무혐의로 석방되고 단독으로 거사를 일으킨 원태우 의사만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민중 봉기 등으로 확대될까 하여 자신을 공격한 원태우 의사의 처벌 수위를 낮추도록 지시한다.
이에 원 지사는 징역 2개월에 곤장 1백 대를 맞고 이듬 해 1월 24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들의 악의적인 고문으로 인하여 평생 고통에 시달렸으며 온몸에 흉칙한 흉터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국부에까지 심한 고문을 당해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만년에는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수푸루지(임곡동)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6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원태우 지사의 의거 결행 85주년이자 원 지사 서거 40년만인 지난 1990년 8월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우 지사의 기록은 대한매일신보와 김윤식의 <속음청사>,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일본인 화가 기무라 고타로가 ‘어리석은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뒤늦게 한 한국인에 의하여 일본에서 발견되어 원태우 지사의 의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원태우 지사의 유품으로는 생존시 만든 돌절구 2개와 맷돌 1개가 있는데, 그중 맷돌 한 개는 1990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으며 나머지는 안양시청 별관 민원실 홀에 전시돼 있다. 또 안양역 광장에서 2층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조형물, 평촌 자유공원에는 동상, 그가 돌멩이를 던졌던 의거지 자리에는 안양시에 세운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정확한 위치는 관악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300미터 정도 올라오면 안양자동차학원 맞은편이다.
한편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에 맞선 최초의 공개적 저항 활동으로 역사적으로 대단히 값지고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과거 시흥군 당시에도 안양1동에서 태어난 안양이 낳은 인물임에도 안양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안양역의 '원태우 지사' 조형물은 좀 더 엄밀한 고증이 아쉬운 사례다. 그는 농민 신분이었는데, 조형물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선비 모습이다. 그의 의거는 조선의 특권 계층이 아닌 일반 민중도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는 증거 중 하나이기에 신분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 옳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선생을 기리는 마음은 좋지만 학문의 길을 걷지 않은 분을 학자로 묘사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일이다"고 했다. 명패에 '의사'로 적혀 있는 점에 대해 "대체로 의사(義士)는 안중근 의사 등 특정 분들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쓴다"며 "의사보다는 지사(志士)가 더 적절하다"고도 했다.
의문 1. 어떻게 달리는 기차를 향해 정확하게 던질 수 있나?위의 내용으로 보면 이토히로부미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져서 큰 부상을 입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정확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가 의문일텐데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그 속도 또한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겠지만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큰 부상을 입은 것이지요.
의문 2. 높은 열차의 창문을 어떻게 볼 수 있었나?돌을 던진 위치가 중요합니다. 현재 석수 IC가 있는 곳이 안양육교 입니다. 예전 말로는 서리재고개라는 말인데 아래 사진으 보시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진의 오른편은 일반 도로가 있는 곳이고, 왼편은 기찻길입니다. 기차길은 상당히 낮은 곳에 있어서 비탈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정확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이죠
만화로 보는 <원태우 지사> 의거 http://blog.daum.net/21c-bom/5428835?srchid=BR1http://blog.daum.net/21c-bom/5428835어린이 역사 만화 『맹꽁이서당 10권(웅진닷컴출판사)』132~133쪽 내용입니다.
 
 
삼막사 청기와 훔쳐갔던 일본인 교장 이야기
삼막사(三幕寺)의 청와(靑瓦), 교장(校長)에 치의(致疑) 절에서는 도적 맞았다 하고 본전씨(本田氏) 주장(主張)은 달라
<매일신보> 1934년 9월 5일자
[영등포(永登浦)] 교육자의 인격향상을 절규하는 이때 주임대우의 학교장이 절도피의자로 취조를 받는 기괴한 사실이 있다.
영등포공립고등학교(영등포공립고등학교) 본전항조(本田恒助)시와 영등포읍 고려자기제조업 황인춘(黃仁春)씨, 산업기수 임구남(林久男) 3씨는 지난 7월 하순경에 고려자기 원료점토를 구하려 관악에를 갔다가 삼막사(삼막사)에 가서 점심을 먹을 때 그 절 망해루(望海樓) 지붕에 있는 청개와(靑瓦, 청기와)를 보고 그 절에 있는 9세 된 지어성(池○成)이라는 어린이를 시켜 그 절 기와를 벗겨내려 잠시 가져갔다가 다시 보내주마고 하고 가지고 갔다. 그후 삼막사에서는 그런 사릴은 모르고 절로서는 중히 여기는 청개와가 없어졌으므로 소관 영등포경찰서(영등포경찰서)에 도난계를 제출하여 동서에서는 각방면으로 수색한 결과 전기 3씨가 가져온 사실을 알고 극비밀리에 엄중 취조중인 바 일반은 학교장에 대한 파렴치(破廉恥)의 절도사건인만큼 그 진전을 크게 주목중인데 이에 대하여 목전교장은 무언이며, 그 감독지위에 있는 소창(小倉) 군수는 "그런 말은 처음 듣는 말입니다. 곧 조사하여 보겠다"고 말하였다.
이계당 서장담(二階堂 署長談)
이에 대해 이계당(二階堂) 서장은 말하되, 교장은 승낙 있어 가져왔다고 하고 삼막사에서는 도난을 당하였다고 하는 바 하여간 먼저 사실여하의 진상을 신중히 조사하여 만약 사실이라면 단호한 처치를 하겠습니다.
승낙(承諾)한 일은 절대(絶對)로 없소
당시 청개와를 지붕에서 꺼내준 지어성(池어成) 소년의 말을 들어보면 사다리를 갖다 놓고 날더러 올라가 청개와를 가져오라고 하여 꺼내주었더니 보고 이 다음에 갔다 주마 하고 가져갔어요 하며 일방 확실히 승낙을 받았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반월암 주승 전○문(全○文,69)과 삼막사 유창○(柳○烈)의 처 지씨(池氏, 29)는 승락은커녕 가져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이 점심을 먹을 때 청개와 한장이 그들 있는 객사의 마루에 있기에 이것은 못가져간다 하며 그 청개와를 법당 마루 밑에다 갖다 두었더니 나중에 노니까 그것까지 몰래 가져갔습니다. 일전에 경찰서에 가서도 그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정리 : 2007.4.17,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탐사63]삼막마을1-삼막천 좌측(2014.11.15)
 
2014.11.15/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석수1동 #삼막골 # 63차/ 제63차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안양 석수동 삼막삼거리에서 경인교대 앞 삼막IC 방향 도로 좌우측에 있는 삼막골이라는 동네로 예전에는 집과 집 사이로는 나무가 우거진 골목이 있었고, 마을 안쪽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집 마당에는 감나무와 은행나무, 고염나무가 자라는 등 농사를 짓고 오손도손 살던 주민들의 공동체가 끈끈하고 평화롭던 곳이었으나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고 말았다. 삼막골은 안양천의 지천인 삼막천을 우측에 끼고 삼막사로 가는 초입부터 현 경인교대 앞쪽까지를 통칭해 부르는데 1980년대 이전에는 석산부지에서 돌을 캐 나르는 차량들이 오고가는 좁은 도로가 놓여져 있었으며 길 옆 주변으로는 단독주택이 뜨문뜨문 자리했던 한적한 마을이었다.그러나 90년대 초 삼막마을 입구(현 삼막사거리) 우측의 구룡마을이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주공아파트 등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2002년부터는 석산부지에 경인교대 경기캠퍼스(2005년 개교) 조성 공사가 착수되고, 2003년에는 삼성산을 터널로 관통해 서울 신림 - 안양 삼막골석산부지 산업도로간 지방도로 개설로 도로가 크게 확장되면서 마을은 개발의 바람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특히 2003년 부터는 마을뒤로 제2경인고속도로와 삼막IC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도로로 둘러쌓인 섬주거지로 전락하면서 과거 주거지는 이제 도로를 따라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선 거리로 바뀌고 말았다. 여기에 2007년 완공을 목표로 안양~성남간 제2경인 고속도로 연결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현재 안양소년원(정심여자정보고) 뒷쪽에서는 현재 관악산을 관통하여 동편마을 뒤로 나오는 터널공사가 한창으로 삼막골 마을 위로는 도로 교각이 여기저기 지나고 차량 소음으로 몸살을 앓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은 1년에 2번 느타나무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향나무 할머니 앞에서 마을제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원주민들이 마져 하나둘 떠나고 공동체 역시 예전갖지 않아 마을제 또한 맥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않다..[탐사64]삼막마을2-삼막천 우측(2014.11.22)
 
2014.11.22/ #안양 #도시 #동네 #골목 #안양기억찾기탐사대 #석수1동 #삼막마을 # 64차/ 제64차 여정으로 찾아간 곳은 안양 석수동 삼막삼거리에서 경인교대까지 좌우로 있는 삼막골(삼막마을)이라 불리우는 곳으로 이날 탐사는 지난주 삼막천 좌측 동네와 골목에 이어 삼막천 우측 동네를 경인교대에서 삼성초교까지 내려오며 살펴보았다.삼막마을 끝자락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6-8번지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교정안으로 들어서면 삼성산의 한쪽 거대한 단면을 마치 두부 자르듯 짤린 절개면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학교는 1970~80년대 집짓는데 쓰이는 자갈이 부족하다 해서 1979년 7월14일부터 1999년 6월30일까지 20년 동안 7천만톤을 골재를 캐낸 자리다.삼막마을은 천년고찰 삼막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삼성산의 빼어난 경관 아래 삼막천에는 물 맑고 가재가 지천으로 아는 이들만이 물놀이 하러 올 정도 한적했던 곳이었으나 변해도 너무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곳 주민들은 70년대 말부터 20년 동안 삼성산에서 돌을 캐내느라 남포소리에 소음과 분진 등으로 고통을 받더니 2002년부터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조성공사가 시작되고, 2003년에는 삼성산을 터널로 관통해 서울 신림 - 안양 삼막골석산부지 산업도로간 지방도로 개설로 도로가 크게 확장되면서 마을은 개발의 바람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특히 삼막IC와 연결되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마을뒤로 놓여지면서 마을은 도로에 둘러쌓인 섬으로 전락하면서 과거 주거지는 개발붐과 맞물려 하나둘 외지인에게 매각되면서 지금은 도로를 따라 각종 음식점과 카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산자락밑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과거 원주민들이 살던 집들은 이제 찾아보기기 쉽지 않다.경인교대 후문앞 산자락에는 안양지역(안양,과천,군포,의왕,광명거주) 장애 학생들을 위해 건립된 공립정신지체 특수교육기관인 안양 해솔학교(http://haesol.sc.kr/)가 있다. 해솔학교는 2002년 8월 착공한 지 1년6개월만인 2004년 3월1일 준공해 2004 3월 6일 유년,초등,중등,고등 총 19학급 113명에 대한 첫 입학식을 갖고 개교했는데 현재 38학급 249명이 재학 중이며 109명의 교직원이 근무하고 있다.경인교대 정문을 내려오면 사람은 안보이고 수많은 차량만이 오가는 교통 혼잡 사거리다. 이곳에서 안양방향으로 내려오면 안양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2017년 완공을 목표로 안양-성남간 제2경인고속도로 연결을 위해 안양 관양동 동편마을(관양지구) 뒷쪽으로 관악산의 허리를 관통하는 제1공구 터널 공사다.안양-성남 고속도로는 안양시 석두동(석수IC)~성남시 여수동(성남~장호원 연결) 구간 21.8km를 4~6차로로 있는 도로로 총사업비 7967억원이 투입되는 사업으로 롯데건설 등 11개 민간사업자가 출자한 제이경인연결고속도로가 30년간 운영하게 된다. 이 도로 건설 계획을 보면 삼막IC주변에 교통광장을 만든다. 따라서 조용하고 한적했던 삼막마을은 자동차 소음과 매연으로 뒤덮일 것으로 보인다.관악산 둘레길 이정표와 돌탑이 세워진 삼막교를 건너면 정심여자정보고(안양소년원)다.삼막천을 끼고 이어지는 뒷쪽 도로변 그래도 오래된 집들이 하나둘 있다. 산자락에 있는 금강사 가는 소로길(이길는 관악산둘레길)로 접어들면 벽돌로 지은 큰 건물이 우뚝 서 있는데 현판에는 안양교회 교육관이라 적혀있다. 그런데 어느 교단인지.. 정체가 불분명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길 끝자락 관악산펜션앞에는 오래된 집 몇채가 있다.이 동네는 석수1동 삼막로 56번길 19(1통)와 삼막로 39번길 5(2통) 71가구에는 2011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도시까스가 공급되지 않아 연탄과 기름보일러를 주 연료로 사용해야 하는 도심속 오지였으며 지금도 도로개설 공사가 한창이다. 삼막로56번길을 따라 내려와 좌측 음식점들을 지나니 막힌 길이다. 굳게 닫힌 철문안으로는 숲이 우거진 넓은 정원이 보이는데 오래된 나무팻말에 삼양농원이라 새겨져 있다.